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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75회

안동일 작

빌리의 저택과 러시아

이윽고 비행기가 굉음을 내면서 활주로를 미끌어 지기 시작했다. 빌리는 신문을 덮고서 창 아래 펼쳐지는 뉴욕의 경치들을 새삼 스러운 심정으로 내다 봤다. 비행기가 선회를 하면서 맨해턴 섬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맨해턴 섬을 한바퀴 도는 유람선이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 만큼에 석양을 등지고 서있는 녹푸른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자유의 여신상 유람선을 탔을때 연화는 소풍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 했었다.
그녀는 지금 하얼빈과 북경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억척 스러운 듯 하면서도 소녀 다운 순박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녀, 그녀도 자신의 고구려 계획이 성사 단계에 들어 가면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적 자원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그녀의 뉴욕 여행이 빌리에게 남긴 게 있다면 아무래도 그녀는 가깝게 알고 지내야 하는 관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 에게서 빌리는 여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자라온 환경 이란게 무섭다는 것을 실감 했던 것이다.

한때 고구려 계획에 들떠 있을 무렵 고구려의 기상을 지닌 연화가 자신의 반려로 적합하지 않은가 생각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와 가깝게 접해 보면서 빌리는 자신의 여성관 언저리에는 허물어지는 듯한 퇴폐의 냄새, 자본주의의 냄새가 자욱하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절감 했던 것이다. 카니나 숙정, 그리고 비키는 모두 서구사회에서 자란 여인들이었다. 그런 그녀들 에게서 솟아나는 암컷으로서의 냄새,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수컷으로서의 동물적 감정, 그런 것들이 남녀 관계에 얼마나 깊이 작용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때문에 연화를 두번째로 집으로 초대한 날에는 일부러 비키도 합석 시켰다. 비키가 의기 양양하게 ‘오픈 더 라이트 프린세스’하며 거실의 샨데리아의 불을 켜는 모습을 보면서 연화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연화는 곧 평정을 되찾아 스스럼없이 빌리를 대했다. 그러고 나니 빌리도 무척 편했다. 남녀 관계에 있어 마음속 깊은 곳에 딴 생각이 없다는 것, 그것도 참 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헤리의 아내인 상미도 있었고 또 학창 시절 친구로만 지냈던 여학생들이 있었음에도 왜 그런 사실을 진작 몰랐을까 싶었다. 그만큼 그동안 자신은 여자를 어떤 목적의식을 지니고 대해 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얘기였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비행기가 다시 선회를 하면서 막 켜지기 시작한 맨해턴의 검고 흰 빌딩군의 불빛들이 차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많은 빌딩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세계의 돈을 긁어 모으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고 처음 맨해턴 섬을 봤던 20여년전 아버지의 친구 중에 한사람이 워싱턴으로 가던 비행기 속에서 말했었다. 그말을 들으며 빌리는 어린 소견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뉴욕이 세계 경제의 수도가 되고 있구나 생각 했었다.
뉴욕이란 도시, 자신이 청춘을 바쳤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뉴욕은 자신에게 적지않은 보답을 해준 도시였다. 세계 경제의 수도 답게 빌리에게 경제적인 면에서의 보답을 했던 것이다. 크리스가 자신들 회사의 자산이 20억 달러 라고 했을때 그것 밖에 되지 않냐고 했지만 그 20억 달러란 돈은 어머어마한 금액 이었다. 미국 서남부의 중소도시라면 쓸만한 주택 4만채를 지을 수 있는 금액 이었다. 5만달러 라면 주택 한채를 충분히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거액의 자산을 5년 만에 쥘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속했다.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고 왕노인과 같은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어려운 고비마다 우연치 않은 행운과 기연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행운은 계속 될 것이었다. 자신이 야무진 꿈을 간직하고 있는한, 그리고 장수왕이며 호태왕과 같은 위대한 선인들의 얼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한. 성사 단계에 들어 간 트럭 회사가 발족 한다면 빌리네 자산은 열곱절로 늘어 나면서 수익도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 계획에도 더 많은 자산을 당당하게 투자 할 수 있어 명실 상부한 자신들의 사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이번 러시아 여행도 사업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차원으로 만들어내는 발판을 만들기 위해 단행한 여행 아닌가. 세계 경제의 수도 뉴욕에서 세게를 상대로 돈을 벌어 옛 고구려 땅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 한다, 미구에는 그곳이 세계의 수도가 되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비행기가 고도를 찾았고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싸인이 들어 오기 무섭게 금발 미녀 한사람이 빌리의 자리를 찾았다. 빌리네 모델 에이전시에 속해 있는 페트리샤였다. 모스크바 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를 여행하게 됐다는 그녀와는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한 사흘쯤 있다가 페테스부르크 하고 사할린에 갈 예정인데, 페트리샤는?”
“저는 아직 정확한 일정을 몰라요, 모스크바 계실 때 같이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러지 뭐.”
페트리샤는 빌리를 끔찍히 생각 했다. 평소에도 복도 같은 데서 마주치면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감사의 표정과 제스쳐를 아끼지 않는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빌리네 에이전트에 속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 했고 이제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빌리네 에이전트의 깔끔하고 합리적인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 지저분한 짓을 강요 하지 않는 방침이 모델들 사이에서는 선망과 감사의 돌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페트리샤에게는 빌리는 또 채무자 이기도 했다. 빌리가 쉐퍼드 에이전시를 인수 했을 때 포트폴리오를 맡겨둔 많은 무명 모델 들이 그야 말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설 기회는 없고 잘빠진 육체는 지니고 있었고 남자들은 유혹의 검은 손길을 뻗어 오고, 그런 그녀들이 갈 길은 뻔했다. 그래서 빌리는 자신의 개인 구좌에서 그런 그녀 들에게 자리 잡으면 갚으라면서 작게는 5천불에서 2만불 까지의 돈을 무이자로 빌려 줬던 것이다. 자신의 저축도 얼마간 내놓으며 빌리를 졸라 댔던 비키의 응석도 큰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도 빌리의 통장을 보면 여기 저기서 생각지도 않았던 2-3천 달러의 입금이 생겨나 있곤 했다. 정확히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페트리샤라면 원금 이상을 갚지 않았나 싶다.

페트리샤가 또 찾아 오겠다고 진한 웃음을 날리고 돌아 간뒤 빌리는 의자를 뒤로 제끼고 잠을 청했다. 며칠동안 곤잘레스 일이며 트럭 회사 일그리고 중국일 등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일이 밀려 오는 때에 출장 준비까지 해야 했기에 말 할 수 없이 피곤 했다. 옆의 김종우는 벌써 코까지 골면서 잠에 빠져 었었다.더우기 모스크바에 도착 하면 새벽이었기에 내일 아침 부터 뛰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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