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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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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51회

 
안동일 작

도도히 흐르는 사랑

“빨리 돌아가 상처를 치유하도록 해라. 내가 내리는 벌이 바로 그거다. 보름뒤에는 반드시 이곳에 건강한 어깨로 나타나 한판 겨룰 수 잇도록 해야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예 왕은 아진의 어깨를 만졌다. 일어서 다시 격구장으로 나가면서 쓰다듬듯 다독였던 것이다.

“참 같이온 저 처자는 누구더냐? 평복을 입었구나.”
“부대에 함께 있는 부장입니다. 국내성 물길 가산 출신이기도 합니다.”

“장백산 산딸기 부르던 그 아이더냐?”

“마마 께서 그걸 아직 기억 하십니까?”

“장백산 산딸기 노래야 말로 우리군의 군가 아니더냐?”

그랬다, 도도가 호태왕 시절 동맹제전서 또랑또랑하게 불렀던 그노래는 이제 고구려 군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 있었다.

아진은 왕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올리곤 마차쪽으로 걸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어깨가 더 아파와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걸었다.
도도가 몇걸음 달려나와 부축하듯 아진을 맞았다.
왕은 아직 격구장 구릉 위에 서서 그 광경을 쳐다 보고 있었다.

“도도, 마마 께서도 너를 기억 하시는데…”
아무리 통증이 심했지만 그 말은 해주고 싶었다.
도도는 마차에 오르기 전 장수왕 쪽을 향해 허리를 크게 숙여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평소의 그녀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도의 사랑은 이렇게 결실을 향해 익어가고 있었다.
아진의 부상이라는 예기치 않은 일이 그녀를 무시로 장원이며 전실 그래고 내당에 까지 출입 할 수 있게 했고 누가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도도가 아진을 간호 하는 것은 왕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아진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했다. 어깨 탈골이야 도도가 응급처치로 맞추어 냈지만 어깨뼈며 갈비뼈 까지도 금이 가 있다는 것이었다.
왕궁 전의도 다녀갔고 평양성의 한다 하는 근골 전문가들이 다녀 갔다. 도도는 어디서 구했는지 장백산 호랑이 한 마리를 통째로 날라왔다. 아진은 보름내내 호랑이에 묻혀 지내야 했다. 뼈에 좋다는 호경환을 상복 해야 했고 , 호편환, 호완자는 물론 식탁에도 온통 호랑이 뼈를 고아낸 곰국이며 호랑이 고기로 만든 요리일색이었다.

어느틈엔가 아진의 마음에도 도도가 여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깊은 밤 임에도 선잠이 들어 뒤척이다 보면 아픈 어깨가 침상에 닿는 통에 깜짝 놀라 일어 나야 했는데 그때 호젓한 방안에서 생각 나는건 도도였다.
낮에 그녀와 주고 받았던 얘기며 호편환을 먹어야 한다고 성화 하면서 부러 흘겨 보던 그녀의 초롱한 눈망울. 아무렇게나 차려 입는 것 같지만 소탈 한 듯 하면서도 은근한 멋이 풍기는 그녀의 입성들, 그리고 산딸기꽃 향기라고 느껴지는 그녀의 내음, 그런것들이 새록 새록 생각나고 되새겨 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진은 아침이 더 기다려졌다. (계속)

 

< 주: 고구려의 혼인.
중국인들은 고구려인의 결혼에 관해서도 보고 들은 바를 적어두었다, 그런데 초기의 기록과 후기의 기록이 다소 다르다. 아마도 고구려의 풍습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보고들은 지역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5세기 이후의 기록들에 보면 혼인을 할 때 재물이나 폐백을 드리지 않았고,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딸을 종으로 팔았다고 해서 몹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아울러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했으며,이럴 때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면 그만이고 재물을 보내서 맞는 예가 없다고 한다. 이같은 풍속에 대해 중국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음란한 것을 숭상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 혼인풍속이 여성중심에서 남성중심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서옥제와 같이 남성이 여성의 집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고서야 여자를 데려오는 풍속에서 탈피하여 쉽게 결혼하고, 여성의 집에서도 남성의 집에 무엇을 바라지 않는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여성측에서 폐백과 지참금을 준비하여야 하는 단계로 전환되는 중간 과정의 풍속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후기의 결혼풍속에서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의당 남자의 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불교의 전파ㅡ 중국 문화의 흡수 등의 영향과 고구려가 팽창하면서 우대받기 시작한 무사계급 남성의 권위 향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결혼풍속 중에 특이한 것은 우씨왕후의 예에서 보듯 형이 죽으면 형수를 시동생이 돌봐주는 형사취수제도이다. 남성의 집안에서 일단 자기 집안에 들어온 여성노동력을 상실하지 않고 남성의 집안에 묶어두려는 경제적인 이해와 남편이 죽은 후 여성이 경제적 곤란에 처하게 될 상황을 구해주는 사회보장제도적 측면의 이해가 합치되면서 존속했던 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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