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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여성생활

특별연재 <구술 수기>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4)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 노현경씨 에게 듣는다.

 죽어서 남긴 이름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터-이니— /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경상도 민요 성주풀이의 1절 가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박희도 선생의 이야기는 그가 묻혀 있는 망우리 공원의 묘비에서 시작해야 될 듯 싶다.
묘비명이야 말로 사람이 죽어서 남기는 이름 아닌가.
언제 부터인지 서울 북단의 망우리 공동묘지를 망우리 공원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서울의 공동묘지 역할을 톡톡히 해 온 곳이다. 공동묘지’라는 이름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망우리공원으로 개칭된 후 다시 망우 역사문화공원으로 개칭됐다.

독립운동가들의 사망 후 장지로 쓰인 일이 많았기에 오세창, 한용운, 유상규, 방정환, 등 유명인들이 묻혀 있으며 박인환 이중섭 등 예술인들도 다수 묻혀 있고 도산 안창호와 유관순의 가묘도 아직 남아 있다. 이곳을 관할하는 서울 중랑구에서는 ‘독립운동가 등 명인들이 묻힌 사색의 공간으로 4.7km의 산책로가 있어 산책, 조깅 등을 즐길 수 있는 공원’ 이라고 소개 하면서 만해 소파등 15인 유명인들의 연보비를 산책로에 조성 해 놓고있다.
한때는 28,500여기의 무덤이 들어차 있었으나 이후 지속적인 이장과 정비를 통해 범위가 많이 축소되어 2013년 현재는 1만기 미만의 묘소로 조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리사무소 인근 순환로를 기점으로 좌측 방향으로 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고 다시 5분 정도 더 걸으면 오른쪽에 만해 한용운의 묘가 보인다. 독립지사이며 시인으로 유명한 만해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
“님은 갔지만은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만해의 묘를 지나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요 독립지사인 유상규 지사의 묘소가 있고 조금더 가면 길 오른쪽 바로 아래에 글이 많이 새겨진 희끄무레한 비석이 하나 보인다. 비석의 크기는 평균 이상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 (앞면)

“고(故)선생은 단기 4222년(1889) 6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 (뒷면)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민족의 신생활 운동 교육에 이바지’ 비문 내용 그대로라면 대표적 독립지사로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만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해와 소파등 유명 독립투사와 예술인에 대해서는 묘지 위치와 상관없이 산책로에 연보비를 세워주기도 했고 굳이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차중락 선생 같은 대중가수를 포함해 30명 정도의 인물의 묘소 위치가 안내도에 명기 돼 있는데 민족대표 33인에 끼어 있었던 박희도 선생은 거기에 없다. 대우가 전혀 다르다. 그가 변절한 친일파이기 때문이란다.

선생의 묘소 비석은 국군 정훈학교 장병 일동이라고 건립자를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훈 학교 장병 일동은 무슨 까닭에 세인의 오해를 무릅쓰고 비석을 건립했을까?
죽어서 이름을 남긴 박희도의 일생에 대한 평가의 단초가 여기에 있다.
이 비석 설립의 까닭이며 그 과정은 박희도를 밉게만 보고 매도하려 했던 후인들이 애써 외면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현경과 같은 긍정적 추적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주효 했던지 마침내 “선생은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후 세상의 비난과 오해를 뒤로 한 채 병든 몸을 이끌고 국군정훈학교를 만들기에 온 힘을 쏟았기에 누가 뭐라 한다 해도 우리는 이 비석을 건립하기로 했고 이처럼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정훈학교 관계자의 증언을 건립 현장에서 들었다는 유력한 인사의 증언이 나왔던 것이다.

지난 2008년의 일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 독립지사 유상규 씨의 아들인 유옹균씨의 증언이다. 당시 그는 공군 에비역 준장이었다.
극적인 반전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생각 해볼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엄연한 사실 아닌가.
박희도 선생,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토록 평가가 갈리고 호불호가 나뉘게 됐을까?
일단 신빙성있는 각종 유력자료를 바탕으로 박희도 선생의 일생을 개괄해 보면서 일정 부분 필자의 사설을 첨가하도록 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 간력

박희도(朴熙道)는 1889년 8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朴桂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박계근이 매우 부자였다는 애기도 있고 그렇지 않았다는 애기도 있는데 현경은 증조할아버지가 대단한 부자였다는 말을 여러차례 들었다고 했다.
박희도는 해주 의창학교(懿唱學校)에 입학하여 보통과, 고등과를 졸업했다. 의창학교는 1904년 황해도 해주에 설립된 사립학교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노블(W.A.Noble, 魯普乙) 이 설립했고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사립학교령」에 의해 의창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통학교로 인가받은 그 지역 에서는 명망있는 미션스쿨이었다. 소년 박희도는 이곳에서도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이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했다. 이후에는 감리교에서 세운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를 다니다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16세 되던 해인 1905년에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이후 해주군 교회 소속의 전도사로 활동 하면서 1914년에 중창 설립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16년 6월, 전개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회원확대 운동에 ‘열심단(熱心團)’으로 참여하여 금패 포상을 받을 정도로 크게 활약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함경남도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永信學校)의 교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년 시기 부터 기독교, 특히 감리교와 인연이 깊었던 그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는 후술 하기로 한다.

그는 20대 초반, 역시 해주 출신 김 희신과 결혼 했는데 처가 쪽도 유명한 기독교 집안 이었다. 처숙모 주룰루는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사의 한 사람이었고, 처사촌 김명신도 기독교계 출신 독립운동가였다.
1916년 8월, 서울로 상경한 그는 미국인 목사 베커(白雅德) 등의 지원을 받아 서울(경성) 안국동에 사설 기숙사를 설립했다. 서울에 유학중인 황해도 출신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당시 지방의 서울 유학생들은 민간인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청결문제, 금전편취 등 문제가 많았다. 박희도는 감리교 교도인 안국동 김용달의 집을 빌려 ‘육영사(育英舍)’라는 간판을 걸고 기숙사로 운영했다. 그가 일생을 통해 벌인 첫 육영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비는 베커 목사 등 외국인 독지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매일신보, 1916.8.30.)
그해 1916년 9월에는 장낙도·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와 함께 정동교회 유치원 분원으로 중앙유치원( 후에 중안 보육 학교로 확대 되고 후에 중앙대학교의 전신이 된다.)을 설립, 운영을 시직했다. 이 유치원은 중류계층 이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신앙의 민족교육을 표방했다.

29세 되던 1917년 그는 서울 영신학교 (서울 매동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했고, 베커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학교의 부교장을 맡기도 했다. 협성학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등학교였다. 이처럼 그 무렵 부터 그는 학교 설립과 운영 등 육영,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서른살이 되던 1918년, 그는 벌여놓은 학교 운영과 함께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의 성실성이 평가돼 10월에 YMCA 회원부 간사로 위촉돼 취임하게 된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경성을 위시한 전역의 기독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급 인사가 됐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여건을 십분 활용해 3.1 운동 준비과정에서 민족대표들과 학생 측 사이에서 가장 활동적이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한편 그 무렵 조선에는 벌써 몇몇 재미동포 출신들이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활약 하고 있었다. 하와이로의 이민이 시작 된것이 1902년의 일이다. 그해 12월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떠난 121명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0여년 만에 그 곳 미국에서 신문물, 기독교를 접한 몇몇 인물들이 조국 동포들을 깨우치기 위해 급거 귀국, 전도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석기(董錫基)목사가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1919년 1월 20일 경기도 이천읍교회에서 겨울철 지방 사경회(査經會)가 열렸다. 사경회란 기독교인들의 성경 공부모임을 말한다. 이날 모임에서 박희도는 국제통으로 불리는 동석기 목사를 만났다. 동석기는 하와이 교민 출신으로 명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수원 남양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박희도는 동석기를 만나 그 무렵 국제정세에 대해 소양을 널힐 수 있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자세한 내용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881년 함경도 출생인 동석기는 1903년 하와이로 이주했으나 그곳 농장 주인의 배려로 그는 9개월 만에 노동자 생활을 청산하고 감리교 계통의 명문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에 입학했고 1913년 노스웨스턴 개럿신학교(Garrett School of Divinity)를 졸업하고 미국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인물이다. 1913년 12월 조선으로 귀국한 동석기는 원주지방 순행 목사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 내리교회 목사(1914), 서울 마포교회(1917)를 거쳐 1919년 수원 남양교회 목사로 사목 활동 중이었다. 박씨 형제들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석기 목사와의 만남, 이 부분도 따로 후술 한다. (계속)

 

  화자 노현경에 대해 

 노현경씨와 박씨 집안의 인연은 1994년 그녀와 박홍남과의 결혼에서 비롯된다. 몇차례 강조 했듯이 현경이 매튜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 집안이 5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이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컸다.
노현경(이하 대부분 경칭생략)은 1968년 서울 생이다. 노주한씨와 하복임 여사 사이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서울 평창동 이지만 그녀는 아직도 경남 함양의 개평 마을을 고향으로 생각 한다.
당시에 서울 평창동은 부친이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서울에 마련 한 집이었고 당신과 대부분의 식솔은 함양에 살았기 때문이다.
부친 노주한씨는 풍천 노씨 집성촌이 개평마을 유지의 한 사람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였고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너른 전답과 과수원이 있어 생활은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두집 살림을 꾸리기에 큰 불편은 없었단다.

 현경은 밝고 활달한 성격의 집안의 막내로 부모님이며 오빠 언니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지만 어려서 부터 큰 고민이 있었단다. 그녀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벌써 환갑이 넘은 아버지며 어머니를 위시해 스물 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큰 오빠 언니들이 세상을 떠나면 누가 자신을 돌보고 키울것이냐 하는 당돌하지만 실존적인 고민이었다. .
그런 고민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우연히 찾아가게 된 동네 교회의 주일 학교에서 해결이 되었다.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는 선생님의 말이 가슴에 박혔던 것이다. 또 이 하나님, 예수님을 믿으면 . 현세의 생이 다하더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토록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힘을 얻었고 그날부터 주일학교를 가장 열심히 다니는 꼬마 신도가 되었다.

 모태신앙은 그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를 교회로 안내해 독실한 신앙을 갖게한 사람이 그녀였다. 유가의 선비를 자임했던 아버지와 몇몇 오빠 언니들은 그무렵에는 전도에 성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중학교에 들어가 잠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도 했지만 세상의 역사가 ‘히즈 스토리’ 예수 그분의 이야기라는 역사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도 공감을 했고 다시 견고한 신앙을 되 찾을 수 있었다. 후일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된것도 그 집안이 5대째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에 무조건 후한 점수를 주었던 까닭이 제일 컸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서울의 상명사대 부고를 졸업한 1986년 18세때 도미 했다. 둘째 오빠와 두 언니가 정착해 있는 뉴저지가 행선지였다. 학년을 낮춰 인근 고등학교에 등록, 영어를 익힌 뒤 뉴욕 시내에서 디자인 미술 계통에서 유명한 학교인 파슨스에 진학 했다. 졸업은 뉴욕 FIT에서 했단다.
대학 시절에도 한인 학생회며 기독 학생회에 관계 했는데 92년 필라델피아의 한 동포가 억울하게 인종차별 당한 사건이 있어 그를 도와주러 학생들과 어울려 그곳에 갔다. 그때 청년들의 회의서 메튜 박을 만났다. 그녀보다 6살 위인 메튜의 듬직한 외모와 세상을 보는 눈, 특히 미국 법률에 대한 상식은 그녀에게 큰 호감으로 다가왔다.

이들의 만남은 마침내 1993년 결혼으로 이어진다. 현경이 매튜의 구애를 받아들인 것은 말한대로 그 집안이 5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이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컸다.
그랬는데….
“ 집안 살림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시아버지가 생선 가게를 했는데 남들은 돈을 번다고 했지만 우리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몸이 여기저기 계속 아팠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자손 만대까지 복을 준다고 했는데 예수님 잘 믿는 집안에 시집온 내가 왜 병이 들고 아픈가 고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민족대표 33 인 이라는 저희 할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셨을까 어떤 분이셨을까 진짜 크리스찬 이었을까 진짜 하나님의 자녀었을까 오대까지 믿는 믿음이 진실된 믿음이었을까 할아버지에 대해 우리 조상에 대해 그 가족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의 자손은 어떻게 이어질 것이며 나는 나 자손들에게 무엇을 전해 줄 수 있을까 생각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엔 실망과 체념이 먼저 찾아왔다. 세상 사람들의 오해 섞인 평가가 너무 완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백방으로 뛰며 수소문했다. 그 작업이  30년째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박희도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평가가 완강 했기에 틈새로 파고든 것이 시 조숙부 박희성 지사였고 시 조고모 박영복 여사 였다.

전술한대로 그녀의 노력이 하늘에 닿아 박희성지사는 2010년 서훈돼 국립현충원에 안장 됐고 박영복 지사는 2015년 서훈돼 독립지사의 반열에 들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박희도 선생이다. 복권과 독립 유공자 서훈은 지금으로서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다시한번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있다. (동일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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