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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김동찬 컬럼> 황기환 애국지사, ‘ 조국과 함께‘ 영생하리라

 

김동찬 (뉴욕 시민참여센터 대표)

 

2023년 4월 8일에 고 황기환 애국지사가 1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뉴욕시 퀸즈 보로 메스패스의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를 떠나 죽어서도 잊지 못하던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분이 생전 조국독립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했던 뉴욕 최초의 한인 교회인 뉴욕한인교회에서 환송 행사를 마치고, 한국군 출신 노병들의 운구와 미군 출신 노병들의 굿바이 경례 그리고 뉴욕 한인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렇게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0보 떨어진 곳에 함께 잠들어 있는 고 염세호 애국지사와 비석도 없이 묻혀 있는 수많은 동지들은 그 공적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여전히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드망즈 주교의 1920년 3월 12일자 일기에 따르면 그는 188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국가보훈처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평안도 순천군 출신으로 되어있고 1904년경 하와이에 입항해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을 하자 기독청년회 소속으로 미군에 지원하여 유럽전선에 파견되어 병사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파리에 있던 김규식 선생의 제안을 받고 1919년 6월 3일부터 한국 대표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활동을  했다고 중국신문&lt;신민일보&gt;1919년 8월 14일자에 보도하였다.

이후 런던, 파리, 제네바, 이탈리아 샹레모 등을 오가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각종 언론에  인터뷰를 하던 도중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드망즈 주교화 면담을 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간 내용과 미군입대 후 2년간 프랑스에서의 전쟁 참여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프랑스에 남아 있게 된 내용을 설명하였던 것이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기록되어 오늘날 그의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원되는 활동 자금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1921년까지 근 3년 반동안의 활동을 하다가 1921년  8월 워싱턴 회의 준비 차 미국으로 돌아와서 미국에서의 활동을 하다가 1923년 4월 18일  심장병으로 향년 37세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다하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고 황기환 애국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지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가 뉴욕한인교회의 장철우 목사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2013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유해 봉환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 2023년 2월 뉴욕 주 법원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국운이 다한 구한말 태어나 16살에 홀홀 단신으로 이역만리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자신의  조국이 일본제국주의에 빼앗기는 것에 분노하여 나라를 찾기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을  오가며 비록 37세 짧은 생애였지만 조국 해방을 위하여 불꽃처럼 온 생을 바쳐서 싸우다  쓰러지셨다. 그러나 결혼도 하지 않아 가족도 후손도 없이 쓸쓸히 잠들었지만 조국은 그를 잊지 않고 100년만에 조국으로 모셔갔다. 이로서 황기환은 민족과 함께 영원히 조국 독립의  애국지사로 영생하게 되었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외세에 빌붙어 한 생을 편히 살았던 자들은 영원히 매국노로 영생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청춘과 생명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은 조국과 함께 영원히 애국자로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행사에 참석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애국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에서 동포들과 함께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발전시키고, 권익을 향상시키며, 모국과 발 딛고 서있는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좋게 만들고,  나아가 민족의 숙원인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서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동찬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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