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은 (수필가, SNS 인플루언서)
와인으로 하나 되는 사람들, 영화 <와인 패밀리>와 이태리 와인.
대학을 졸업한 1998년부터 약 6년 정도를 일본의 작은 소도시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에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일류대학을 나와 큰 기업에 입사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고향으로 내려가 선대의 가업을 잇는 걸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어릴 적부터 들으며 자라온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였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그런 태도가 당시엔 꽤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태리 남부의 시골 마을 아체렌자 출신의 마크는 캐나다에 이민 와 자동차 회사의 전문경영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이윤추구 방식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에 시달리던 마크는 그간 성공만을 좇아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삶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던진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마크는 무작정 유년을 보낸 아체렌자 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오래 와보지 못했던 고향마을에 도착한 마크. 그러나 도착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할아버지의 와인농장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내내 방치되어 있던 탓에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 모습을 본 마크는 할아버지의 와인농장을 되살리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 그의 무모한 결심에 캐나다의 아내와 딸은 물론, 아체렌자의 주민들마저 마크를 만류한다.
예로부터 와인은 가족 중심의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생산되어 왔다. 포도의 재배, 수확, 발효, 병입, 숙성 등 하나의 와인이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과 섬세한 보살핌, 지난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핵가족화 되고 와인 생산에도 새로운 기술과 최신 설비가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방식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아체렌자 마을도 다를 바 없었다. 마을에는 청년들보다 노년층의 인구가 월등하게 많아 보이는데다가, 오래 방치된 할아버지의 포도밭에 바쿠스가 와줄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마크는 지금껏 와인을 마실 일은 많았을지 몰라도 와인을 만드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와인농장을 살리겠다는 그의 결심은 충동적일 뿐 아니라 무모해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포도밭의 잎과 열매들도 마크를 보며 비웃는다. 당신이 와인을 만들겠다고? 라며.
한때 소믈리에가 되고 싶어 엄청나게 와인을 마셔온 나 또한 그런 마크의 결심이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그의 결심이 사뭇 반가우면서, 도시의 삶을 중지하고 낙향해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는 일을 당연시 여기던 일본의 문화가 떠오르며 응원하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마침내 가족들과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런 마크의 진심이 전해져 모두가 와이너리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기술의 발달은 분명 삶을 더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그럴수록 묘하게 아날로그를 향한 향수도 짙어져 감을 느낀다. 인간은 뛰는 심장과 따스한 온도를 가진 존재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공산품이 아니니까. 와인은 최신의 설비가 최고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분야가 결코 아니라 생각한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와인은 만드는 자의 고민과 정성 어린 손길이 유효하게 작용하며,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를 매우 중요한 철학으로 삼는 술이다. 하늘의 표정과 바람의 방향을 살펴가며 포도를 수확하는 와이너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자동차 회사의 CEO에서 아체렌자의 와이너리 주인이 된 마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와인패밀리>의 원제는 <From the Vine>으로, 이를 풀어보자면 ‘와인으로부터’가 된다. 마크는 아체렌자에서 와인으로부터 무엇을 발견했고 또 그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 오랜 기간 와인을 마셔온 한 사람으로, 와인은 누군가의 인생을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들이게 할 정도의 힘이 깃든 술이라 단언한다. 와인을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와인을 한번만 마셔본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만나본 일이 없다.
영화 <와인 패밀리>에는 와인과 관련된 지식이 방대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크와 그의 가족이 할아버지 방식으로 주조된 와인의 DOCG(Denominazion di Origine Controllata Garantita) 인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DOCG는 이탈리아가 자국 와인의 전통과 품질을 지키려 만든 원산지 통제명칭을 뜻하며 이는 고급 와인을 선별하기 위한 기준이라기 보다는 와인의 퀄리티를 균등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태리 아체렌자는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알려지지 않은 10곳의 하나로 뽑힌 도시로 영화에는 아름다운 아체렌자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이곳에서 재배되는 ‘알리아니코’라는 포도는 이태리 토착품종으로, 일찍 싹이 트고 알맹이는 늦게 익어 와인으로 만들 때 알코올 도수가 높기도 하고, 탄닌과 산미가 풍부해 ‘남부의 바롤로’라 불린다. 향신료가 강한 음식, 토마토 베이스 요리, 철분 맛이 나는 가금류를 재료로 한 음식과 잘 어울리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으니 당장 비행기를 잡아 타고 이태리에 갈 수는 없어도 알리아니코 와인이 어느새 당신을 이태리 아체렌자로 데려다 줄 거라 믿는다. (지은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