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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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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여성생활

‘서지은과 함께 마시는 영화 한 잔, 술 한 편’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샤도네이 와인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쪽이 정확 하려나. 언젠가부터 비는, 특히 출퇴근 길에 맞이하는 비는, 귀찮음과 짜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실은 쾌적한 실내에서 투명한 통창을 통해 바라보는 비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는 거면서, 비를 좋아한다고 수 십 년 동안 주장해왔던 걸까?

‘비’는 영화나 문학작품, 그리고 음악과 같은 장르에선 여전히 낭만의 매개체로 쓰인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서 주인공 ‘개츠비(티모시 샬라메)’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Everything happen to me’처럼, 비 오는 날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법이라고 믿고 싶게 만든다.

나도 그런 문장을 철썩 같이 믿었던 시절이 있다. 우산 없이 빗 속을 걷다 누군가 내 머리 위로 드리워준 커다란 우산, 우산을 든 이는 공교롭게도 내가 호감을 품고 있던(혹은 첫 눈에 반한)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의 애틋한 로맨스, 이런 상상이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될 거라 믿었던 날들이. 하지만 비 오는 날 내 이상형을 ‘우연히’ 만날 확률은 개츠비가 영화 속에서 부른 노래와는 달리 Nothing happen to me로 수렴된다. 지난 48년간의 경험에서 터득한 사실이니 믿어도 좋다.

그렇다면 우린 어째서 비를 좋아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는 걸까? 어때서 비의 낭만에 기대고 싶은 걸까? 출퇴근 길에 마주친 비에는 거친 짜증을 내뱉으면서도 비가 그리는 낭만의 클리셰엔 지금도 설레니 말이지.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건조한 일상이 나를 강퍅하게 할수록 실은 비가 그립다. 비의 낭만을 전적으로 믿었던 시절의 촉촉한 순수함이.

단언컨대,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줄거리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어여쁘기 짝이 없는 청춘 남녀의 풋풋한 러브스토리에 줄거리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게다가 배경이 뉴욕 아닌가! 청춘은 연인의 작은 변화에도 전전긍긍하다가도, 우연히 만난 다른 인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지는 일이 허락되는 거의 유일한 시기다.

뉴욕 거리에 비가 내리고, 그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추억의 인물과 어쩌다 함께 비를 맞고, 같이 미술관에 거닐고, 남자가 젖은 머리를 한 채 피아노를 치며 쳇 베이커의 재즈를 들려주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의 미덕은 충분하다. 젊음은 불안이 서린 얼굴조차 아름다워 눈이 부시다. 그들의 불안은 아직 낭만을 믿고 있어 피어난 불안이다. 어느덧 창 밖의 비 풍경만 좋아하는 나는 청춘의 한 장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을 뿐, 무턱대고 낭만을 믿지도, 낭만에 기대지도, 무엇보다 느닷없는 사랑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장마인지 태풍인지, 올해 한국의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고 길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비와 관련된 음악을 찾아 듣고, 비가 배경이 된 영화를 찾았다. 어둑한 거실 창문 밖으로도, 브라운관 안에서도 비가 보인다. 마시다 만 미국산 ‘샤도네이’ 와인과 잔을 꺼낸다. 청아한 황금빛을 띠는 액체가 글라스에 담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잔 표면에도 물방울이 맺히다 비처럼 흘러내린다. 세계가 온통 비로 가득하다.

샤도네이는 화이트 와인 대표 품종으로 미네랄 뉘앙스를 비롯해 사과, 파인애플 등의 과실미와 갓 구운 빵을 연상시키는 복합적인 아로마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미국산 샤도네이는 오크통 숙성을 통해 바디감이 있으면서도 버터, 마카다미아, 바닐라 등 기분 좋은 향기를 지니고, 산미가 뾰족하지 않아 텍스처가 크리미하다. 뭐랄까, 청춘의 로맨스를 닮았다고나 할까.

어릴 적엔 ‘신맛’이 싫었다. 그저 달고 부드럽고 고소한 것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음식의 다른 풍미를 단정하고 견고하게 받쳐주는 신맛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낭만을 믿으며 여름 비를 한 번쯤 무모하게 맞아보는 경험이 초래한 결과가 지독한 감기뿐이라 해도, 그렇게 호되게 앓고 나면 면역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낭만을 믿는 마음과 낭만에 배신을 당하는 경험 사이에서 아프다 보면 한층 자란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간 청춘이 실은 청신한 신맛을 띤다는 것도. 그러니 조금 더 비의 낭만을, 낭만의 힘을 믿어보자. 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동안에는. (지은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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