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크리스찬 손주며느리 노현경에게 듣늗다.
“하늘이 맺어준 큰 우정” 박희성과 린드버그
최초 대서양 횡단의 미국 하늘 영웅과 , 독립 염원 안고 미국의 창공을 날았던 조선인
찰스 린드버그(위 사진)는 1927년 5월 20일 홀로 뉴욕 -파리 간을 무착륙 비행한 최초의 조종사다. 오늘이 바로 97년전그날이다. 그 이전에도 대서양 상공을 날아 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있었으나 단독으로 중간에 쉬는 일이 없이 횡단한 것으로는 처음이었고 착륙지가 유럽의 중심 파리여서 항공사상 중요한 이정표로 남게 되면서 그는 일약 미국을 넘어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박희성은 3.1운동의 33인중 기독교 대표인 박희도의 동생이다. 형님의 뜻에 따라 비행사가 되기 위해서 1918년 미국에 왔다. 그러나 비행사 자격을 받던 날 돌풍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끝내 그 꿈을 펴지 못했다. 비행기 추락사고의 후유증으로 박희성은 1937년 1월15일 4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희성은 1897년 생이고 린드버그는 1902년 생, 동년배다. 하늘을 생각하는, 날으는 사람들이 그토록 귀했던 시절, 그들이야 말로 선각자로 여겨 졌던 그 시절 동년배의 두 사람의 교류는 생각 보다 짙었다.
주로 박희성이 팬의 입장에서 구애(?)를 하면 스타 린드버그가 답하는 수순 이었겠지만…
린드버그를 먼저 살펴본다.
“‘세인트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이 파리로 날아갈 때, 비행은 발명의 차원에서 유용성의 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중의 정복’이 시작된 셈이었다. 당시의 안전을 위한 조치는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으면, 비행사는 계기판이 아니라 땅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오직 자신의 감각으로 상황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찰스 린드버그의 책 <The Spirit of St. Louis>의 서문에서)
정말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였다. 대서양 바다 위를 날기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난 것 같음에도 그곳이 그곳인 것 같았다. 마침내 육지가 보이기 시작할 때 찰스 린드버그는 성공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1927년 5월 21일 밤 에펠탑의 불빛은 구원의 신호였다.
린드버그의 삶과 모험을 그린 빌리 와일더 감독의 수작 영화 「The Spirit of St. Louis」(1957)를 한글 제목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로 한 것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
불과 80여 년 전이었음에도 당시의 비행기는 우리가 현재 이용하는 항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고도계며 계기판도 없는 것은 물론, 사실상 추위나 비, 안개 등 악천후에도 속수무책인 비행기였다. 이 모든 악조건을 딛고, 뉴욕의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파리의 르부르제 비행장까지 장장 5,815km의 거리를 33시간 32분에 걸쳐 한번도 쉬지 않고 비행한다는 것은 무모하기도 했다.
1919년 5월 15일 라파예트 호텔 경영자인 레이먼드 오티그는 특별한 상을 제정하여 공표했다. 뉴욕과 파리간 무착륙 비행을 성공한 조종사에게 상금 25,000달러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역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상이었지만, 그것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상이었다
. 1924년까지 도전자가 없자 오티그는 기간을 5년 연장했다. 도전자 중에 찰스 린드버그는 나이도 젊고 비행 경력도 별로 없는 편이었다. 첫 번째 도전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적기를 75대나 격추한 르네 퐁크였다. 1926년 9월 21일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시도한 도전은 비행기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폭발하면서 끝난다. 르네 퐁크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두 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린드버그가 도전하기까지 6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린드버그는 비행기가 오래 견디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료와 최소한의 무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승무원 없이 혼자서 탑승하기로 했고, 최소한의 식량에 모든 구명장비를 생략했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한 과감한 조치였다. 대신 2,750파운드의 충분한 연료를 구비할 수 있었다. 린드버그의 비행기 이름은 그 비행기를 사는 데 자금을 대준 세인트 루이스의 사업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이라고 붙였다.
5월 20일 오전. 드디어 ‘Spirit of Saint Louis’는 롱아일런드 루즈벨트 비행장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린드버그는 비와 진눈깨비, 눈 속을 날아갔다. 졸음과 배고픔,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화장실도 없어 용변을 보는 일도 어려웠다. 린드버그는 무게 때문에 무전기도 싣지 않아 33시간의 비행 도중 외부와 교신할 수도 없었다.
5월 21일 저녁, 사람들은 드디어 린드버그가 프랑스 파리 부근 르루르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착륙한 비행기의 엔진이 채 꺼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와 항공기와 린드버그를 둘러싸고 환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감격해 울기까지 했다. 그날 광장에는 20만이 운집해 있었고 광란에 가까운 축제가 이어졌단다.
린드버그는 일약 세계의 영웅이 됐다.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는 그에게 영예로운 훈장들을 수여했다.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영예 비행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수도 워싱턴과 뉴욕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이 벌어졌다. 뉴욕에서는 전무후무 4백만명이 참여 했다고 얘기된다. 이후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해 중남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기도 했다.
찰스 린즈버그와 그의 아내 앤 머로우 린즈버그.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린드버그는 미국 대사의 딸 앤 모로우를 만났다. 이들은 사랑에 빠지고 1929년 결혼했다. 린드버그는 아내에게 비행기 조종을 가르쳤다. 그리고 함께 장거리 비행을 즐겼다. 앤은 소설가이기도 했다.
언급한 대로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5월 글렌 커티스가 설계한 NC-4 비행정이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비행체였다. 그해 6월 14~15일에는 영국의 비행사 존 앨콕과 아서 브라운이 한번도 쉬지 않고 대서양을 횡단했다.
최초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 비행은 앨콕과 브라운이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뉴펀들랜드에서 아일랜드까지 약 3,030킬로미터의 최단거리를 16시간 27분 비행했다. 린드버그는 앨콕과 브라운에 비해 훨씬 먼 거리를 긴 시간에 걸쳐 ‘단독으로’ 비행했다는 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린드버그의 정확한 판단력과 목숨을 건 도전 정신은 인류의 장거리 비행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으며, 이후 항공기와 비행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한 것은 약간의 시련이었다. 그는 1902년 2월 4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주의 리틀 폴스와 워싱턴 D.C.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1907년부터 1917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미국 참전을 반대하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린드버그도 반전주의자가 된다.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기계를 만지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아주 좋아했다. 191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농장에서 일한 후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의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2년의 교육을 마치자 그는 비행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2년에는 링컨 비행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된다. 그해 4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짜릿한 추억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변화무쌍한 세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는 것을 꿈꾸어 보았다. 하늘을 꿈꾸는 것, 그것이 곧 린드버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링컨 학교에서의 순회비행을 통해 그는 평생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이 세상을 마음껏 날아다니리라 마음먹는다.
1923년 린드버그는 드디어 자신의 비행기를 소유하게 된다.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의 부산물인 커티스 JN-4 ‘Jenny’를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500달러로 이 비행기를 구입한 린드버그는 비행술은 물론 비행기 자체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게 된다. 비행기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는 10월 제니를 아이오와에 가서 팔 때까지 운행하면서 여러 번의 사고를 겪었는데, 사고를 통해 위험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당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포함한 모험이었다.
1년 동안 텍사스 육군 비행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기 직전, 다른 비행기와 공중에서 충돌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1925년 린드버그는 세인트루이스의 로버트슨 항공회사에 취직했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린드버그의 집념으로 그는 특별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카고까지 특별 항공우편로를 통해 우편물을 전달하는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오티그 상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세기의 도전을 감행하여 대서양 횡단 비행을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하늘을 꿈꾸어온 몽상가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기의 모험에 성공한 린드버그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추앙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비행기의 출발지점인 뉴욕에 돌아오자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에게 행운은 계속되었다. 앤 모로와 혼인했을때 신혼부부는 세계일주를 하며 세계인의 축하를 받으며 최고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30년 6월에는 사랑의 결실인 아들까지 낳게 되어 행복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씨앗을 숨기고 있었다.
린드버그 부부가 뉴저지 버겐 카운티 에서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고 있던 1932년, 그들의 생후 20개월 된 아들이 유괴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괴범은 린드버그에게 5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린드버그는 경찰의 도움을 뿌리치고 암흑가의 대부를 통해 유괴범과의 교섭을 구했지만, 아이는 끝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영화(마크 라이델 감독의 <린드버그 유괴사건>(원제 ‘Crime Of The Century’), 1996)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인을 안타깝게 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미국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 린드버그는 아내와 둘째아들 존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사했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생리학자 알렉시스 카렐과 협력하여 장기(臟器)를 몸 밖에서 산 채로 보존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기도 하였다.
린드버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참전을 반대하여 군에서 명에직을 해임당하기도 했던 반전주의자였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적을 보인 적도 있다. 독일 공군을 방문한 후 그 뛰어난 군사력과 기술력에 감탄했다 면서 나치의 숭배자가 된 것이다. 심지어는 히틀러에게 훈장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시기에는 박희성이 이미 타계한 이후 여서 이에대한 박희성의 반응은 당얀히 찾을 수 없다.
린드버그 그는 미국이 전쟁에 휘말리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나라들은 강력한 독일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미국의 여론은 린드버그에게 등을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반역자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더는 미국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2년 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린드버그는 더 이상 중립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린드버그는 전쟁 중 미군 항공기를 제작하는 회사의 자문으로 일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이면서 50회나 비행기를 몰고 전투에 참가했다.
공군에 복귀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린드버그의 요청을 거부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공군 준장의 계급으로 지위를 회복했지만, 나치 숭배 경력은 그의 생애에 끝내 오점으로 남았다.
민족 대표 였던 박희성의 형 박희도(위사진)가 변절자로 곡해되어 천하의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린드버그는 비행 외에도 여러 분야에 손을 댔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에는 그곳 의사와 함께 인공심장을 개발했고 멕시코 마야 인디언 유적 탐사에도 참여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문화에 대한 연구도 앞장서 전개 했다. 만년에는 자연 보호 ,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했던 그는 1974년 8월 26일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 논란 속에서도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으로 대변되는 그의 도전 정신은 세계를 이웃처럼 드나드는 첨단의 항공기 속에서, 꿈 속에서만 존재했던 별나라로 가는 우주선 속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으면서 그가 박희성과 주고 받은 여러통의 편지는 그의 많은 것을 새롭게 대변하고 있다.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인 박희성 (1896~1937) 지사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어 지난 2010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 안장 됐다는 소식은 이미 전한 바 있다.
몇차례 밝혔듯이 박희성은 임정이 비행분야에서 오늘날 소위 계급에 해당하는 ‘참위’에 처음 임관한 인물이다. 전 광복회장인 김우전 한국광복군동지회 고문은 20여년 전에 벌써 “박희성의 독립유공 공적을 심사해 달라”며 그에 대한 독립유공자포상신청서를 보훈처에 제출했었다. 김 고문은 “박희성은 41세에 미혼으로 사망, 직계 유족도 없다”면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런 분도 잊혀지지 않고 역사에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한 고(故) 박희성의 조종사 자격증 사진 (왼쪽 사진). 미국 LA ‘에버그린’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SON OF KOREA(한 국의 아들)’라고 적혀 있다(오른쪽 사진) 현충원 이장 전 사진.
앞으로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박희성은 연희전문에 다니다가, “학교 다닐 때가 아니다. 미국에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는 형 박희도의 조언에 따라 학교를 중퇴, 미국으로 건너왔다.
2년간 정비사로 일하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군무총장(현 국방장관) 노백린이 주축이 돼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스(Willows)에 설립한 윌로스 비행학교에 입교했다.
이 학교는 임정이 ‘독립군 공군 양성’의 꿈을 키우던 곳이다. 노백린은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행학교는 3·1운동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며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비행학교의 상급기관이자 후원기관인 비행가양성사의 ‘장정(章程)’엔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 데 있다’고 돼 있다. 이 비행학교는 독립운동가이자 쌀 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이 재정적 후원을 했다. 김종림은 당시 재미 동포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내는 사람이었고, 임정은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박희성의 우수한 조종술은 당시 한인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도산 안창호가 창간한 ‘신한민보’는 1921년 3월 31일자에 ‘우리 비행학생 성적, 박희성씨가 가장 능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촉망받던 그였지만 1921년 4월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비행기가 추락, 중상을 입었다. 여기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부상을 치료할 겨를도 없이 한 달 만에 시험에 나서 결국 합격했다. 그가 7월 7일 날짜로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 자격증을 받자, 임정은 10여일 만에 그를 비행병 참위로 임관했다. 그후 박희성은 독립전쟁 참전이라는 꿈을 펴지는 못했지만 불편한 몸으로 미주, 특히 서부에서의 각 재미동포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비행기 추락사고 때 입은 후유증을 끝내 극복 하지 못하고 파킨스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1937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광복 후에도 수십년간 역사에 파묻혀 있던 박희성지사는 지난 2005년 한 재미 언론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대령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는 한우성(당시 54) 기자가 임시정부의 윌로스 비행학교를 다룬 기획기사를 쓰면서, 박희성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던 것이다. 후일 동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재외동포 재단 이사장 직을 수행한 이가 바로 그 한우성기자다.
한기자는 당시 박희성의 묘가 미국 LA의 한 묘지에 방치돼 있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에버그린’이라는 이 묘지는 1950년대 초반 일본 왕세자 아키히토가 방문, 위령탑을 세우고 기념식수를 했던 곳”이라며 “그 위령탑과 불과 10여m 거리에 박희성이 묻혀 있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점”이라고 안타까와 했었다.
박희성의 묘비에는 ‘SON OF KOREA(한국의 아들)’라는 글과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 그의 미국이름(HOWARD S. PARK)과 한국이름(박희셩)이 적혀 있다.
한기자는 당시 “박희성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독립전쟁에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되뇌곤 했다고 한다”면서 ” 참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1호 비행장교라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그 바람은 10년 뒤에 이루어 졌고 또 10년이 지난 지금 박희성 지사의 조카 며느리인 노현경씨에 의해 미국의 하늘 영웅 린드버그와의 우정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박지사의 가장 가까운 유족이라 할 수 있는 누나 박영복씨의 딸 헬렌 임 여사가 린드버그가 세계 일주를 할 때 박희성 지사에게 보낸 각국의 엽서며 서한을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누가 보낸 엽서인지 편지인지 몰랐다고 한다.
당연히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박희성은 린드버그 뿐 아니라 당시 혜성처럼 떠오르는 비행기 사업가 찰스 보잉에게도 여러번 편지를 보내 교분을 갖자고 요구했고 가능하면 비행기를 기증받거나 싸게 구입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또 보잉사의 신형기에 박희성의 아니디어가 반영 됐다는 증언도 있다. 역시 후일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