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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21회

안동일 작

배움의 길

– 오랑캐 나라라 하지만 동이족은 음식과 제사에 있어 예가 있다. 중원이 예를 잃었을 때는 그것을 동이에서 구했다. (삼국지 권 30 서문)-

동이 막 터오는 아침이었다.
아진은 궁궐 안 통구지 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새벽 무예 수련을 마치고 연못가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진의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 테를 두른 미색의 무관복이 그와 썩 잘 어울렸다.
왕실 근위병, 내군임을 표시하는 금색 연꽃잎 문장이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호태왕 비 건립이 끝난 뒤 왕은 약속대로 아진에게 어떤 상을 내려 줄까 하고 물었고 아진은 학문과 무예를 닦고 싶다고 대답했다.
왕은 즉각 아진을 자신의 근위 부대인 내군 백부장에 임명을 했고 궁내에 들어 와 살게 했으며 궁내 제일의 무술 사범 근위대 말객을 스승으로 붙여 주기까지 했다. 또 조의선인(皁衣仙人)에 들게 했다.
아진도 이제 하호에서 어엿한 고구려 양민, 그것도 군관이 된 것이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아진은 왕의 이례적인 후원 속에 무예수련과 책 읽기에 전념했다. 왕이 아진을 너무 자주 찾는 통에 공부가 늦어지는 것 같이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장수왕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장수왕은 보면 볼 수록 뛰어난 인물이었다. 사실 그 무렵, 즉위 초기 장수왕의 입지는 그렇게 편안하고 탄탄한 편이 아니었다. 너무도 뛰어난 부왕을 두었기에 그 그늘이 깊었다고나 할까.
영락대왕 시절에는 왕의 추상같은 권위에 꼼짝 못하던 권신들은 젊은 신왕에게는 사사건건 토를 달았고 오히려 왕을 자신들 마음대로 뒤흔들려 했다.
그래서 장수왕은 자신 주변으로 사람을 모았다. 아진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출신이 미천하고 배운 것 가진 것 없었지만 왕은 아진의 가능성을 보았고 또 그를 키웠다. 후일 따져보면 그 무렵부터 왕의 내심에는 어떤 복안이 있었던 것이다.
왕에게 한번 다가간 사람들은 그의 도량과 사람됨에 감복했고 진심으로 충성을 다짐했다. 장수왕은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관대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고 내쳐야 할 순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진역시 자신이 직급은 낮지만 왕의 곁에 있는 충복중 하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다수 물길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명상에 잠겨 있는 듯 눈을 지그시 반쯤 뜨고 연못에 비치는 햇살을 응시하고 있는 아진의 곁으로 한 궁장 여인이 다가섰다.
저 만큼에서 아진을 발견 한 궁장여인은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이내 아진 곁에 서는 것이었다.
“ 아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침부터”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볼수록 정감이 가는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가 우렁찼다.
“무미님 이시군요.”
아진도 여인 쪽을 보면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무미는 장수왕을 모시는 궁녀였다.
궁에 들어와 왕의 지근에 있으면서 아진은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무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아진보다 세 살이나 위였지만 처음부터 아진에게 잘 대해 줬고 여러 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인물이었다.
“뭐 하는 거야 ?”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 무슨 소리?”
” 세상이 움직이는 소리죠.”
” 세상이 움직이는 소리?”
” 꽃들이 봉오리 안에서 피어오르는 소리. 그리고 또…….”
” 또……?”
”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잉어의 지느러미가 깊은 물을 가르는 소리. 나무가 숨쉬는 소리, 땅이 말을 거는 그 모든 소리 입니다.”
아진의 시를 읇조리는 듯한 말은 감미롭게 무미의 귀를 자극했다.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무미는 그러면서 아진이 무척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귀도 좋군. 정말 그런 소리가 있단 말이야? ”
” 조용히 있으면 어떤 소리든 들을 수 있지요. 들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만 있으면, 한번 들어 보세요.”
그러면서 아진은 다시 눈을 감았다. 무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서 눈을 감았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잉어들이 뛰어오르는 물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그의 말대로 그녀는 땅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눈을 뜬 무미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아진의 팔뚝 위로 가져갔다.
“아진은 무사답지 않게 섬세한 구석이 있어.”
아진이 놀란 듯 눈을 떴다. 무미는 왕의 먼 인척이기도 하다는데 군문에 들겠다며 독신을 고집하고 있는 여성 이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아진에게는 유별났다. 아진도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진에게 아직 여성. 더욱이 고구려 여성은 생각지도 못할 관심의 범주 밖이었다.
“팔뚝은 이렇게 튼튼하기만 한데. 이번 사냥대회에서는 어사주 받겠지?”
아진이 살며시 몸을 틀어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팔뚝을 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 봐야 겠습니다.”
“아니 왜?”
그녀가 아쉬운 듯 몇 마디 더 하려 했지만 아진은 벌써 저만큼 근위대 훈령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진에게는 바쁜 일이 있었다. 흑치 사범과 함께 노령산으로 용노인을 만나러 가기로 한날이 오늘이었다.

연꽃이 꽃을 피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예사범 흑치남연의 가르침이었다.
흑치 사범 앞에 처음 섰을 때 그는 아진 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무예는 연무(練武)와 연공(練功)으로 나뉘며 이를 서로 병합하여 수련하는 것이 올바른
수련법이다. 연무란 권법, 검법 창법 등의 기술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고 행위에 대한 이치를 깨우쳐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연공이란 호흡법을 통하여 기를 축적하고 심신을 닦아 맑게 함으로써 정, 기, 신을 단련하는 것을 말한다.”
흑치 사범은 군문의 사람 이라기 보다는 무예를 체계적으로 배운 무인이었다.
“무예를 내공과 외공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외공이라면 몸의 동작을 이용하여 인체를 강건하게 함으로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방어하고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에 대해 내공이라 하면 인체 내의 정, 기, 신을 튼튼하게 하며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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