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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20회

안동일 작

아진과 호태왕 비(碑)

영락 8년 막사라성 정벌의 기록을 놓고 아진과 비문을 작성한 박사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됐었는데 그 사연은 이랬다.
막사라성 정벌은 바로 아진이 고구려로 끌려온 영락대왕의 숙신정벌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아진에게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박사들은 이를 기록 하면서 성채 일곱을 빼앗고 마을 30여개를 복속 시켰으며 3천명의 숙신인 들이 왕을 따라 고구려로 왔다고 적었던 것이다.
글씨의 크기며 행간을 조정 하기 위해서 남박사와 구하 아진은 거의 함께 지내야 했고 아진은 자연스레 비문 문장의 마지막 검토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진은 자신의 일이기도 한 막사라성 전투의 일이 잘못 적혔다고 남온 박사에게 따지듯 덤볐다.
“어떻게 잘못된 기록을 남길 수 있단 말입니까? ”
“비문은 원래 그런 거야. 당시 기록관으로 따라 나갔던 종사관이 그렇게 적었나 보지”
“아닙니다. 바로 잡아야 합니다.”
“글세…”
“고쳐야 합니다.”
“여럿이 의논해서 완성된 글인데 나 혼자 힘으로 될까.”
“그래도 고쳐야 합니다.”
아진은 그 부분만 닥종이를 돌에 붙이지 않고 며칠을 버텼다.
이 소동은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갔고 왕이 아진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더니 학사들을 불러 논의를 한 끝에 고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막사라성 전투는 그렇게 기록 됐던 것이다.
‘청동으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로 할 수 있고 옛 것을 거울로 삼으면 흥함과 폐함을 볼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과 실을 알 수 있다.’는 성현을 가르침을 금과옥조 로 삼고 있다고 아진에게 몇 차례 얘기하곤 했던 장수왕의 사람을 대하는, 역사를 대하는 성정이 그랬다.
이밖에도 왜가 백제의 꼬임으로 반도에 들어왔던 상황을 두고 남온 박사는 왜 도래 위신민이라 주부인 고구려와 호태왕을 생략하고 적었는데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리고 후반부의 성곽 숫자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을 아진은 기억 하고 있다.

이들 부분 비문의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 글에 이르기를 영락 5년 을미가 되는 해에,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을 지나 산을 등지고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과 육칠백 영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이에 수레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 준비를 시키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는 옛날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잔의 꾀임으로 도래하자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남으로 공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 *성 * * 성 *이야라성   (중략)  * * *성들을 취하였으며 어느덧 백잔의 국성(수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의리를 따르지 않고 감히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봉군을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군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성을 포위하였다. 그렇게 되니 백잔 임금이 궁박하게 되어 남녀 노비 1천명과 가는베 1천필을 바쳤다.
그리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여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58성과 7백촌을 얻었고 백잔 임금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돌리어 국도로 돌아왔다.

영락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토곡에 보내 관찰 순시토록 하였다. 그 기회에 막사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명을 습격하여 잡아 왔으며, 이때부터 숙신은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하게 되었다.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고 있는데, 노객(신라왕)은 신민으로서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영락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귀순 항복하였다.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신라성 염성 등을 함락시키니 왜구가 크게 궤멸되고 성안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신라성 —-(안타깝게도 비문이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남은 왜적들이 궤멸되어 달아났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 순라병과 수비병을 두었다. 옛날에는 신라 매금(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와서 매금(신라왕)이 가복이라고 자칭하면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이 생전에 명령하여 말하기를 “조상왕들은 다만 멀고 가까운 곳의 구민들을 뽑아 수묘와 청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구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약화될까봐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단지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붙잡아온 한 예를 뽑아서 수묘와 청소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명령을 말하심이 이와 같았으므로 명령과 같이 신래한예 220집을 뽑도록 지시하고 그들이 수묘의 규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 110집을 뽑았다. 그렇게 하니 신구묘지기호수는 합하여 국연이 30집 간연이 300집 도합 330집이 되었다.
선조왕 이래로 묘 위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서 묘지기연호에 착오가 생기게 되었는데 오직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이 선조왕 모두를 위하여 묘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세김으로써 착오를 없게 하였다. 또 법으로 명하기를 ‘묘지기는 지금 이후 서로 전매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더라도 함부로 살 수 없다. 법령을 어긴 경우에 판 자는 형벌을 주고 산 자는 묘지기를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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