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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수기> “하나님은 분명코 아신다.” (1)

박희도 박희성 형제에 관한 오해와 진실  

독실한 크리스찬, 손주 며느리에게 듣는다. 

 -들어 가면서 

박씨 형제 분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5월5일 새벽, 컴퓨터를 켜니 그윽한 성당 사진이  MS 빙의 배경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에 검푸른 산을 배경으로 십자가와 장식 별이 반짝이는  멕시코의 소도시 푸에블로 마을의 한 성당 사진이었다. 사진밑에는 ‘싱코데 마요를 기념하며’라는 작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싱코 데 마요’ (Cinco de Mayo)  스페인어로 5월 5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5월 5일이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의 날로 온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국가 공휴일이다. 그런데 멕시코 사람들에게도 5월 5일은 싱코 데 마요 기념일, 국경일 이란다. 1862년 5월 5일 멕시코의 민병대가 푸에블로 마을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하는 멕시코의 전승기념일이다.

이날 멕시코에서는 물론 미국에 사는 멕시코인들도 각지에서 성당을 중심으로 축제를 펼치는데,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고유의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며 하나 되어 즐기는 행사다.
이 축제에는 멕시코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와 환희의 순간들이 얽혀있다. 식민지 시절, 그리고 이를 청산하는 과정의 지난 아픔들, 그리고 멕시코인들의 신앙과 자존심과 결부된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록이 담겨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멕시코인들은 성당을 찾고 축제도 성당을 중심으로 벌인다.

바람 속의 들풀처럼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고 끝내는 식민 지배까지 당해야 했지만 이를 극복한 우리 한국 역사의 모습과도 비슷해 그 마음을 짐작할 만 하다.

지금부터 그 얘기,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항거했던 선배 선열들, 그리고 그를 기리는 현재의 우리, 또 그 속에서 큰 작용을 했던 종교와 사상, 그 얘기가 시작된다. 글을 시작하려는 순간 그윽한 교회의 모습이 찾아온 것은 우연이 이닌 듯 싶다. 이글은 박씨가로 출가해 간 박희도 선생의 친 손주 며느리 노현경(미국명 하이디 박)씨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체험기를 구술에 따라 풀어쓴 것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죽어서 남긴 이름

지금부터 14년 전인 2010년 11월 15일, 대전국립현충원에서는 LA 한 공동묘지에서 쓸쓸이 잠들어 있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한 재미 애국지사의 유해 봉환 안장식이 열렸다.

오전 11시 애국지사 제4묘역에서 열린 이날 안장식은 여느 안장식보다 성대했고 참석자들의 면면도 굵직했다. 공군의장대의 근엄하고 경건한 운구와 주악연주 속에 진행된 안장식에는 애국지사들의 선양업무를 총괄하는 보훈처의 장관을 위시해 광복회 회장, 광복군 동지회 회장, 대전 시장, 충남도 고위간부, 그리고 공훈 추서와 봉환에 힘쓴 재미언론인, 그리고 누구보다 애쓴 유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했는데 특별히 눈에 뜨이는 인물은 3성장군 별을 단 현역 공군참모차장의 모습이었다.
안장식의 주인공 박희성 애국지사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군 파일로트, 비행 장교였기 때문이다.

이날 안장식은 약력소개, 추모사 및 헌화·분향, 조총 및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김구 선생의 손자이기도 한 김 양 당시 보훈처장은 조사를 통해 “광복 6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고인을 조국의 땅으로 모셔서 죄송하다”면서 “개인보다 민족의 안위를 걱정한 박 선생님의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고 말해 고인을 기렸다.

이날 정복을 입고 안장식에 참석한 김양홍 당시 공군 참모차장은 “박희성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임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장교, 우리 공군의 선각자로서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 이역만리서 험난한 비행훈련을 거쳐 장교에 임관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으로 그 애국심과 열정을 늦게나마 우리 공군이 기리게 돼서 너무 기쁘다” 말한 뒤  “LA 일본인 전사자들의 묘역 묘지의 묘비명에 ‘한국의 아들(SON OF KOREA)’이라는 묘비명이 써있는 점을 특이하게 여긴 재미 사학자와 현지 언론인의 끈질긴 탐구, 그리고 그 후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 됐고 오늘 이렇게 국내로 모셔져 현충원에 안장 되게 됐다.”며 저간의 상황을 언급했다. 이어 김차장은  “공군이 진작 했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여러 인사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앞으로 우리 공군의 자랑인 선생의 유지를 우리 공군이 앞장서  받들겠다.” 고 다짐했다.

이날 유해를 안고 미국에서 건너간 고인의 조카손자인 박홍남(미국이름 매튜, 47)씨는 유가족 대표인사에서 “미국에서 작은 할아버지의 묘가 일본인들의 묘 틈에 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 이렇게 조국 땅에 옮길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며 “많은 사람들이 작은 할아버지의 나라 사랑하는 뜻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메튜 박은 박희성 지사의 친형인 박희도 선생의 친손자다. 독립운동에 헌신 했던 박희성 선생은 죽는 날까지 독신이었기에 직계 후손이 없다.

그랬다. 직계 후손이 없었던 박희성 선생의 유해는 그동안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민간 공동묘지인 에버그린 묘소에 안장돼 있었다. 김양홍 장군이 언급한대로 돌보는이 없이 쓸쓸이 안장 돼 있던 고인의 묘소는 2002년 독립군 비행학교가 부각 되면서  발견됐고 수년간 각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독립운동가로 공식 인정 받게 됐으며 마침내 이날 오전 7시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봉환되어 그길로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마침내 그 이름을 청사에 남기게 된것이다.

박희성 선생은 1895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8년 친형 박희도 선생의 권유에 따라 도미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였다.  1921년 5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선생 등이 독립전쟁에 나설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설립한 비행사양성소에 입교했다. 고인은 1921년 4월 조종사 자격시험 중 기체 결함 사고로 인한 중상을 입고 대수술을 받았으나 5월에 재응시해 7월에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자격증을 받고 조종사가 됐다. 이후 임시정부는 고인을 비행장교로 임명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회의 직속 육군비행병 참위’로 되어 있다.

그후 박선생은 항공 독립군 창설에 적극 나섰지만 제반 여건이 따르지 않아 뜻을 이룰수 없었다. 하지만 비행사고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 채 투병 속에서도 도미해 있었던 친 누나인 박영복 애국지사와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흥사단, 나성,  상항 한인회 등의 활동에 적극 나서 독립운동의 길에 헌신했다. 하지만 선생은 1937년 추락 사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파킨슨병으로 미혼인 상태에서 세상을 등졌고 주변에 의해 에버그린 묘소로 모셔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고인이 뭍혀 있던 이 묘역은 1950년대 초 일본 왕세자 아키히토가 방문해 위령탑을 세우고 기념식수를 한 묘역이어서 후일 발견 됐을때 슬픔이 더했다고 한다.  더욱이 공식 유공자가 아니면 국내로 봉환 할 수도 없었다. 10년 가까운 노력 끝에 2010년 8월 정부가  마침내 고인의 공훈을 기리게 됐고, 건국포장을 추서함으로써 73년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가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편안히 영면을 취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이날 이같은 헤피엔딩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조카 손자 며느리인 노현경씨다. 안장식 당일 현경씨는  두딸과 함께 가족석에 앉아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 가곤 했다.   그녀는 이사야서를 되뇌이며 끊임없이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인들의 오해 속에 있는 친 시할아버지 박희도 선생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 이었던 그는 후일 변절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 돼 있었다.  시할아버지 께서는 “너무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너무 바로 잡으려 하지 말아라. 하나님 께서는 단연코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 하섰다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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