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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4회

안동일 작

운명의 조우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는데 다시 석도강 식당막사 옆, 햇볕 내리 쪼이는 공지.
“왕이라고는 했지만 자기 밑에 변변한 군사들이 없는기라, 모두 사성이라 불리우는 호족 대가들이 저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 아니가. 그러니 왕의 말을 듣는 사람도 없고 궁녀들이라 해도 대가집에 일하러 다니지 않았나.”
주돌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모르고 있는 저 남쪽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그랬다. 아진도 주돌의 침 튀기는 입술을 바라보면서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
“남쪽에 있는 나라 가운데 그래도 꼴을 갖추고 있는 나라는 신라하고 백제 인기라. 가락국이라고 하나 더 있는데 여긴 큰 심 없고, 신라라는 나라는 원래는 6개의 부락이 서로 모여 사는 나라였다는데 평온한 날이 없었던 기라. 서로 자신들이 잘 낫다고 싸웠던 모양이라, 그래서 여섯 부락 촌장들이 냇가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보내 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거라, 이때 갑자기 산 기슭 숲 사이에서 빛이 나더니 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네. 기이하게 여겨 그곳으로 몰려가 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고 자줏빛 알 같기도 하고 박[瓢] 같기도 한 것이 있어 깨 보았더니 잘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던 기라. 신기하제? 그래서 그 아이를 샘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빛살이 뿜어져 나왔는데 이때 새와 짐승들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안하나. 박같이 생긴 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했제, 말에서 나왔다 해서 마립간이라 불렀던 기라. 혁거세 마립간의 부인도 알에서 나왔다고 그러제”
주돌은 주워 들은 것도 많았다. 주돌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문득 이들이 한 구룬(민족의 만주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 물길인들의 처지가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주돌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구루인 뿐만 아니라 부여인 이며 실라 백잔 까지도 쥬신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새의 자손으로 알에서 나왔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말 뿐만 아니라 전설 까지도 같은 것 아닌가. 아마 훨훨 나는 새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뭣 들하고 있어 빨리 일 해야지.”
십장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인부들은 아쉬운 듯 자리를 털고 일어 났다.
자신의 작업대로 걸어 가려는데 십장이 아진을 불렀다.
“아진, 도감 어르신이 찾으신다. 가 봐라.”
도감은 제조 바로 밑의 관리자였다.
아진은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했다. 대가집 석물 공사에 가게 되는가 싶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도감의 천막에 가보니 몇몇이 모여 다들 각부서 에서 손끝이 맵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전각부의 구하가 아진에게 웃음으로 아는 체를 해 왔다. 구하는 비석 전각 전문 이었는데 지난 봄 소노부 하대가 집 공사 때 함께 일했던 사이였다. 전각을 하다보니 한문에 조예가 있었는데 아진에게 이런저런 유학 경전의 얘기를 해주면서 친해졌고 아진에게 글을 알아야 한다는 각성을 깨우쳐 준 사람이 구하였다.

“다 모였으니까, 시작하지.”
도감이 걸상에서 일어나 채 좌중을 훑어 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도감과 같이 앉아 있던 준수하게 생긴 학사풍의 젊은이도 함께 일어서 좌중을 훑어보았다. 옷깃이 자주색인 것으로 보아 대 가집 자제였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태학에 가서 일하도록 되었다. 태학 알지? 거기 할일이 많은데 오경이라고 들어 봤는가?”
태학이라면 소수림왕 2년 이었던 372년, 전진(前秦)의 제도를 본 따 설치한 고구려 아니 한국 최초의 학교다. 귀족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고 경학(經學)·문학·무예 등을 가르쳤다. 오경이 바로 그때 가르쳤던 경학의 요체였다.
“태학 앞마당에 태학비와 오경비를 세우는 큰 작업이다. 알다시피 지금 나라에서 태학에 쏟는 관심과 기대는 대단하다. 그런 만큼 양차 석도강의 자랑스러운 인재들이 이번 일을 잘 끝내 학문 높은 학사 박사님들 한테 책 잡히지 않고 칭찬 받게 되기를 바란다. 자세한 얘기와 준비는 여기 있는 창 학도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한다.”
말객 출신인 도감은 항상 군대식으로 절도 있게 말하곤 했다.
태학에서의 일이라. 아진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웬지 글을 배우는 태학이라면 좋은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는 강도있는 학문 열풍이 불고 있었다. 마을 마다엔 경당이란 학교이면서 공회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운영되고 있었고 국내성 안 북쪽 언덕에는 태학이 설립돼 있었다. 웬만한 집안의 자제들은 모두 책을 옆에 끼고 다녔다. 성장하는 국력의 반증이기도 했다. 경당이 사립 교육기관 이었다면 태학은 수도에 설치된 국립 학교였다. 각 부락 마다에 경당이 있었는데 아진과 같은 하호들의 부곡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진은 계루부에 있을 때 부내 학사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 글을 배우나 싶었었다. 누가 특별히 얘기 해준 것은 아니었는데도 글을 모르고서는 사람구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자신들 말갈인들이 고구려인들에게 복속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글을 몰라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었었다. 그래서 학사들의 어깨 너머로 눈동냥 귀동냥 하곤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학 일을 한다고 해서, 매일 태학 마당에 간다고 해서 글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가 아닐 수 없다. 아진에게 맡겨진 일은 돌을 연마하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건 무슨 뜻밖의 소리 인가.

“구하, 아진 너희들 두 사람은 지금 부터라도 창 도학사를 도와 돌판을 구하는 일 부터 착수하도록 해라, 그리고 오경에 대해서도 학사님께 배우도록… 대강의 내용을 알아야 그 석판을 제대로 만들 것 아니냐?”
도감은 창학사를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 그렇지 않은가 조카님, 뭘 알아야 일을 할 것 아닌가, 이 두사람이 보기엔 아주 영특한 젊은이 니까 신분 따지지 말고 오경의 대강이나 일러 주도록 하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일이다.
“그러죠 뭐 저도 오경의 깊은 가르침을 절반도 깨우치지 못한 상태지만 열심히 일러는 주겠습니다.”
창학사가 아진과 구하를 호감어린 눈으로 번갈아 쳐다 보면서 말했다. 그는 표정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창학사는 태학의 살림을 맡는 직분에 있기는 했어도 학자로서도 괞찬은 학자였다.
이 덕에 아진은 대강이나마 오경에 대해 작으나 식견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각 경마다 5개씩의 석판으로 그 대강의 요체를 적어 5경의 저자인 공자를 기리는 그런 작업이었다. 서른개 쯤의 석판이 필요 했는데 이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양차 석도강 화강암 보다는 질 좋은 응회암을 구해야 했는데 아진과 학사 창조는 이를 위해 압강 유역이며 멀리 장백산 까지 원행을 하면서 석재 채집 발굴에 힘을 쏟았다.
이 일이 후일 아진의 일생에 큰 반전의 계기로 작용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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