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니르아이신 환생 전말
김연주씨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다음날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짐을 꾸리는 우리에게 호텔로 찾아 왔다. 고등학교 하루 수업 분의 책 보따리 분량이었다.
“그건 뭡니까?”
“어제 말씀드린 출판 관계 원고와 자료에요.”
“그렇게나 많이 썼어요?”
“내가 쓴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원고에요.”
“아버님 원고요?”
“네 아버님이 평생을 걸려 쓰신 유고인데 딸 된 도리에서 꼭 빛을 보게 하고 싶어요.”
이렇게 해서 그 보따리는 나에게 건네졌고 그 보따리는 지금도 모 출판사 케비넷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원고는 일종의 독립운동 비사 였다.
막내딸인 김연주 씨가 서울서 중학교 다닐 때 작고했다는 부친 김학준씨는 일제시기 만주에서 살았다고 했다. 독립운동 단체에 깊이는 아니었지만 얼마만큼 관계를 했었고 이런 저런 자료와 수기를 모았고 글을 썼던 모양이다.
누렇게 바랜 갱지 원고지에 펜으로 쓰여진 원고며 낡은 대학노트에 쓰여진 글들, 그리고 심하게 바랜 사진들 언뜻 보기에도 세월의 편린과 정성과 집념이 담겨져 있는 자료들이었다. 그중에는 탁본으로 보이는 자료의 복사물들도 몇 가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안 된 얘기지만 김선생의 글은 내 견지에서는 요령부득이었다. 몇 문장을 읽어 보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법이나 문법 맞춤법 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이해가 돼야 할 텐데 논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일기나 서간문 이었다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으련만 장중한 논문 투로 글을 썼기에 더 그랬다. 만주 역사를 다룬 글이 눈에 띄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무슨 만주의 역사란 말인가 싶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아쉬운 점은 그 글들 대부분이 만주 현지에서가 아니라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이라는 점 이었다. 그래도 찬찬히 읽어 보면 숱한 정보며 비사가 나오려니 싶었고 연주씨의 바람이 간절했기에 출판사에 한번 가져가 보기는 하겠다고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서울에 도착 하자마자 이내 출판사로 가져가기는 했다. 차분하면서도 안목 있는 후배가 그 출판사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무슨 정보라도 있을 테니 꼼꼼히 살펴보기라도 하라 했더니 그러겠다고는 했는데 그 후 시간이 꽤 흘렀다. 그 후배마저도 이제는 출판계를 떠나 정보산업 계통에서 일하고 있다.
무슨 큰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기에 김연주씨에게도 이런 저간의 사정을 이르기는 했다.
98년 겨울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 수 없죠 뭐. 원고나 잘 간수해 주세요.”
목소리로 가졌던 그녀와의 연락은 그게 마지막 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뒤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원고를 당초의 그 출판사에서 가져오기는 했다. 소포로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하와이에 갈일이 있거나 아니면 연주씨가 서울 올일 있으면 그때 처리 하려 했는데 서로의 연락이 끊긴 것이다. 해빙 이후에도 내 책이 한권 더 나와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었는데 도통 답이 없었다. 수소문을 해봤더니 김연주씨는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갔다는데 그녀 친구들로 부터도 그 후에는 도통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와의 인연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 것 같다는 예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후 한참 동안이나 내 책상의 마지막 서랍을 가득 매웠던 김학준 선생의 원고를 다시 들여다 보게 된 것은 지지난해 가을 그러니까 2003년 10월의 일이다. 미국 생활을 아예 접고 서울로 영구 귀국을 하게 되면서 여동생 집에 맡겨 놓았던 서울 짐을 다시 받아와 풀었는데 그 원고 보따리가 있었다.
웬지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 원고 보다도 사진이며 탁본 복사본에 눈길이 갔다.
김구선생의 휘호 사진도 있었고 만주며 상해의 공원 사진 묘지 사진등이 있었다.
청사진이라 불리웠던 옛날 복사를 기억하는 독자들 있으리라 믿는다.
푸른빛이 도는 그리고 정작 글자 부분은 미어져 있기 일쑤인 그 청사진으로 대창하 장군의 지석(誌石)이 내 눈앞에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청사진은 희미했고 그리고 너무 퇴색해 있었다. 하지만 앞부분 ‘숙신 도호 대장군 읍루 천장 도호 위해 경’ 이란 글자는 내 안목으로도 판독할 만 했다. 숙신이 무엇인가. 읍루가 무엇인가 바로 여진을 말하는게 아닌가. 그 무렵 나는 누루하치와 여진에 빠져 있을 때였다. 숙신 장군이라면 년전 박시형 교수가 말한 그 여진 장군이 아닐까?
눈이 번쩍 떠졌다. 갑자기 주변은 어두워지고 그 탁본 청사진이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무슨 글자가 쓰여 있는지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독서백편 의자현은 아무래도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몇 년전에는 시큰둥했던 대학 노트에 쓰여진 김학준선생의 ‘쥬신 만주사 비고’ 라는 제목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암호문을 읽는 심정으로 찬찬히 밤을 꼬박 새우면서 읽었다.
2004년 9월 하남시 감이동 마천장.
당시 나는 내가 기거하던 감이동의 우거를 마천장이라고 불렀다. 무슨 스님네나 유력인사가 기거하는 거창한 곳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 쑥스러운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내와 떨어져 산간과 농촌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이곳을 지칭하는데 적격이라고 여겨 감히 부르고 있다.
그곳은 그 흔한 마을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마천동 버스 종점이나 전철 역에서 내려 근린공원을 지나 논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송파와 하남의 경계가 나온다. 거기서 산쪽으로 10분 가량 걸으면 30호쯤 되는 널문이 마을이 나오는데 맨 뒤쪽 꼭대기 집이 바로 내 거처 마천장이다.
그리 높은 곳은 아니지만 하늘에 닿을 기상을 간직하자 해서 마천(摩天)이라 했는데 마천동의 마천은 말마(馬)자에 내천(川)자를 쓴다나. 하늘에 닿았건 말이 헤엄칠 만한 큰 내가 됐건 둘 다 내가 니르아이신과 누루하치를 쓰는 데는 의미를 부여 할만 하다는 것이 내 자부이고 각오다.
하늘 이야 옛 고구려인들이 동맹이란 축제를 열어 하늘에 감사했고. 말이란 고대부터 우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하고 가까웠던 동물 아닌가.
김학준 선생의 유고 ‘쥬신 만주사 비고’가 이곳에 거처를 정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 글을 읽고 나서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 겠다는 결심이 섰고 집필에 적당한 장소로 물색한 곳이 바로 이곳 이다.
서울로 돌아온 첫날 누루하치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 하던 그 무렵 선생의 유고는 내 시야의 지평을 구체적으로 한 차원 넓히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로서는 어려운 한자어와 요령부득의 문장으로 읽는다는 것 자체가 수양의 일종이었지만 그 요지는 만주의 역사가 바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선생은 예 맥 여진 거란 까지를 우리 민족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쥬신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민족이 사는 온누리라는 뜻의 고유 우리말이라는 것이었다. 한자어 조선(朝鮮)의 본래 말이라는 얘기다.
신라의 통일 이후를 남북 쥬신으로 보면서 고구려 발해 금 요 청을 우리 역사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무리는 있어 보였지만 전혀 뜬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런 맥락에서 우리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단군왕검을 숭상하는 대종교 계통의 모임의 한단고기, 태백경 이며 다물 학회 같은 곳에서 진작부터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데 그 내용이 대동소이 했다. 다만 김선생의 글이 60년대 초반 쓰여졌는데 그때도 다물회 같은 단체들이 활동을 펴고 있었는지 궁금했고 또 선생과 그런 단체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쥬신구라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김선생의 글로 접하게 되면서 내 뇌리를 섬광처럼 스치는게 있었다. 사실은 변증법적인 깨달음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수적인 틀에서 벗어나 견강부회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만 밝혀도 큰 파장이 있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김선생의 유고야 말로 나에게 메트릭스를 벗어나는 빨간 캡슐 약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김 선생이나 다물 학회등의 절규에 가까운 주장이 견강부회이며 대세를 그르치게 된다고 배격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다. 사관의 관점 이라는 것은 사가의 고유 권한이자 자유영역 아닌가. 믿고 따르는 것은 후학 각자의 자유인 것 처럼… 오히려 일의 성취에는 강온 양면 이 필요한 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