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2. 장백산 산딸기
니르아이신이라 불리운 소년이 미동도 하지 않자 다른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나뭇가지들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 왔다. 위에 있던 니르아이신이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 당겨 올렸다.
“야, 빨리 내려 가자니까, 가두한테 또 당하려고 그래.”
올라온 소년이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한번 다그쳤지만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서두는 기색없이 계속 성곽과 산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진, 너는 도대체 매일같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혼자 하냐? 어떻게 하면 구라이들을 몰아내고 저 성을 차지할까하는 생각이라도 하는 거냐?”
니르아이신, 아진이 꽤나 매서운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았다.
“야, 왜 그렇게 쳐다보냐? 내가 틀린 말 했냐? 너나 내 처지에선 그런 생각 해야 되는 것 아니야, 가능성이야 별로 없겠지만, 그리고 네 앞이니까 이말 했지 아무한테도 그런 말 안해, 정말이야, 큰일 나려고 그 말을 하겠냐?”
말을 꺼낸 소년이 되레 너스레를 떨면서 아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매서운 눈을 푼 아진은 계속 성 너머 산맥을 응시 했다.
“저 봉우리들을 넘어 가면 장백산이 나오겠지.”
아진이 혼자말 처럼 중얼 거리며 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야 후라운, 우리 숙신 사람들은 저 장백산 늑대의 자손이라는데 구루 사람들은 개구리 알에서 나왔다며, 개구리와 늑대라…”
바위 틈에 자란 나무등걸을 잡고 아래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아진이 말했다.
“다 지어낸 얘길 텐데 뭐…그렇지만 개구리는 좀 웃기기는 해.”
후라운도 아진을 따라 뛰어 내리면서 한마디 대꾸 했다.
그랬다. 두 소년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숙신(肅愼)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국내성과 인근에는 숙신인, 말갈인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다.
더러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기도 했고 또 일부는 자원해서 이주해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말갈인들은 전쟁의 포로로 잡혀와 살고 있었다.
때는 서기 410년, 영락 14년, 그러니까 호태왕,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른지 14년 째 되는 해였다. 당시 고구려는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면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호태왕은 전대인 백부 소수림왕 대에 발아했던 문화 정책과 부왕인 고국양왕 시대의 요동 확보를 기반으로 서진(西進)과 남진(南進) 그리고 동진(東進)을 병행해 서북으로는 요하를 넘어 대흥안령 남록의 시라문강 유역 까지 진출 거란을 복속 시켰고 서남으로는 패망한 후연 지역을 공략해 대릉하 유역 까지 경계를 넓혔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한편으로 공격하고 한편으로 위무하면서 반도 전역의 패자로서도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아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18세의 나이로 즉위, 그해 32세가 됐던 장년의 태왕은 고구려사는 물론 요동 요서의 역사에서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는 확실한 발판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달 이었던 영락 14년 8월, 한때 요동의 주인으로 황제를 칭했던 북연의 풍홍이 북위의 침공으로 패망하게 되자 고구려 군의 호위 아래 국내성으로 망명 오던 광경을 아진과 후라운도 연도에서 목격한 바 있었다. 연나라는 60 여년전 고구려에 쳐들어와 당시 선왕의 묘까지 파헤쳐 시신을 약탈해 가면서 왕의 모후를 포함 남녀 5만명이나 포로로 잡아 가기도 했었던 원한 맺힌 흉폭한 나라였다. 그랬던 나라의 왕이 이제는 쫒기는 몸이 되어 고구려에 몸을 의탁 하게 된 것이었다. 고구려 로사는 중원의 패자인 위나라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면서 영역을 또 한번 넓히는 일이었기에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오색 깃털을 꽂은 투구와 칼과 방패를 양손에 든 화려한 고구려군은 기 보병 합해 80리길을 메우는 장관을 연출했고 연도의 백성들은 ‘고구려 만세’ ‘호태왕 만세’를 연호 했었다.
그때 아진(니르아이신의 고구려식 호칭)과 라운(후라운의 고구려식 호칭)은 환호하는 군중 속에 있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었다. 군중 속에서 흥분되기는 했지만 어딘지 고구려 사람들 만큼 기뻐 할 수는 없다는 심연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족의 연나라 보다는 좋았지만 니르아이신 에게 아직 고구려는 남의 나라 였던 것이다.
니르아이신은 호태왕 8년 숙신정벌 때 흥안령 너머 막사라성 전투에서 붙잡혀 온 300명 물길 사람의 하나였다. 아직 어렸던 7살 때의 일이었지만 그 혹독했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목책과 마을은 온통 불타고 있는데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찾을 수 없었다. 말 울음소리 여인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면서 아버지 아타이의 손을 잡고 니르아이신은 고구려 군에 끌려 와야 했다. 그때 니르아이신은 흐르는 눈물이 연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되 뇌였었다.
“아진, 도대체 어디갔다 온 거야? 그렇게 작업장을 네 맘대로 빠져 나가면 어떻게 해, 또 한번 그랬단 봐라, 도대체 말갈족들이란…”
작업장 가두의 화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지만 사족처럼 이어져 나온 마지막 말은 아진의 신경을 자극하는 말 이었다. 말갈 여진 물길 읍루 숙신 다같이 여진족을 뜻하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숙신은 그들 종족이 애초에 살았던 지방의 이름이었고 말갈은 농경에 종사하는 여진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물길은 수렵에 종사하는 을 일컬었고 읍루와 여진은 중국사람들이 사서에 붙혀준 호칭이었다. 그랬는데 니르아이신 시대 정도에 와서 이민족과의 교류며 충돌이 잦아 지면서 말갈은 저들을 깔보는 비칭, 읍루와 물길은 큰 감정이 없는 평상통칭, 숙신은 지식계층에서 쓰는 일종의 경칭으로 간주 됐고 여진이란 말은 이 시대에는 사서에나 등장했고 후기에 와서는 말갈과 함께 비칭으로 여겨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