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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4회

안동일 작

-평양성 망루의 대화

아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라를 세운 것은 요동의 선비 사람들이라고 얘기되고 있지만 그 나라는 이미 한족 중국 사람들의 나라였습니다. 선비족 황제는 한족들의 꼭두각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한족들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뭘까 싶었습니다.”
“그래 잘 봤구나, 그 힘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요?” 아진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였다.
“문화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그런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서로 어울려 살면서 나라를 만들고 뜻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한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말하는 것이다. 학문·예술·종교·도덕 등 우리 인간들의 정신활동의 소산을 가리킨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직 기억을 하고 계십니까? 돌을 쪼고 있었지요.”
“그럼 기억하다 마다 돌을 다루는 네 눈빛이 얼마나 문화적이었는지 아느냐? 네가 돌에 쪼아넣는 것은 글자였고, 그 글자가 포함하는 역사였고 정신이었고 마음이었느니라.”
그러자 무언가 알 듯 했다. “그게 문화입니까?”
“그래. 그때 네가 열중했던 오경의 가르침이 바로 중국 한족들의 문화가 아니냐?”
“맞습니다, 마마.”
“바로 그런 힘으로 중국인들은 주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복속하고 동화시키고 있다고 보면 된다. 중국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자신들이 중심이라는 그런 오만함 아니더냐?”
“그러면 우리 고구려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서둘러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그들의 영향을 될 수 있으면 덜 받고 그들의 것을 우리것으로 소화해 그들 못지않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버지 호태왕 마마의 뜻이었고 나의 뜻이기도 하단다.”
“아 그랬군요.”
아진은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장수왕에게는 독자적 고구려 문화 문명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중화문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들의 문화는 용광로처럼 주변 민족들의 작은 문화를 끓여 녹였다. 그리하여 흔적 없이 자신의 것으로 삼켜버렸다. 언제나 이민족을 동화 흡수시키는 중국의 옆에서 고유의 문화를 만들고 지켜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도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 문명이 확립된 해상 왕국. 그것의 건설이 그 무렵 장수왕의 심원이었던 것이다. 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왕국이었다.

2. 장백산 산딸기

-태왕은 반 고구려적 입장을 취하던 식신지역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을 공격하여, 남녀 3백여명을 사로 잡았다. 실전을 통해 고구려의 위력을 똑똑히 알게 된 숙신족들은 이때부터 복종을 맹약하고 어김없이 조공을 바칠것을 다짐했다. (광개토왕비 2면 25째 줄.) –

국내성의 가을은 빨리 찾아왔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꺾는가 싶으면 이내 장백산맥과 압강(압록강) 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왔고 하늘이 높아지면서 태양도 멀어 졌다.
그래도 가을 햇살은 따사로운 정감을 머금고 돌산 자락을 쪼이고 있었다.
“아진, 어디 있어? 이 녀석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연마백장(鍊磨白長) 가두의 고함소리였다.
양차 석도강. 고구려 제일의 채석장이자 석물 제조창이다.
도읍 국내성에서 퉁화로 가는 환퉁대로 변의 양차향과 녹수교 일대의 화강암 절벽 지대가 바로 양차 석도강이다.
이곳에서 채석되어 다듬어진 돌로 고구려인들은 그 유명한 석총들을 만들었고 곳곳에 성채를 세웠으며 이일대의 돌로 각종 석물을 만들어 생활 용품으로 또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석도강은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는 중요한 국책 사업장이었다. 일하는 인부만도 천명이 넘었고 우두머리 석도강제조는 양차향 향군보다 높았고 그 위세는 국내 성주며 대가들에 버금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유난히 돌을 좋아했고 또 돌을 잘 다뤘다. 후세의 사람들과 사가들은 국내성 시대 고구려인들을 ‘돌의 마술사’라고 까지 했다. (후한서, 삼국지)
고구려인들은 맥족(예맥족)이면서도 여느 맥족과는 달리 적성총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돌무덤을 조성했던 특이한 집단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돌을 이용한 견고한 성곽의 축성으로 중국세력의 침략을 저지 했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도 성의 뜻을 가진 책구루(幘搆樓)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거대한 암석을 채집 채석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힘은 바로 국력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석(석 무게를 다루는 단위 1석은 300KG쯤 된다. 주 참조)의 돌을 하루에 10리 옮기는데 40명의 장정의 힘이 필요 했고 150석 쯤 되는 큰 돌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2백여명 장정의 힘이 필요 했다. 또 돌을 연마하고 다듬는데 얼마나 많은 힘과 기술이 필요한가.
축성과 석조물 건립에 따른 인원의 동원과 그에 수반되는 권력집중의 필요가 바로 고구려 국가 성립과 발전의 과정 이었으며 수많은 대외전쟁을 수행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채석장 꼭대기의 화강암 바위 위에 한 소년이 아까부터 가을 바람과 햇살을 함께 맞으며 저 만큼에 내려다 보이는 국내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렛나루며 턱에 솜털이 송송 맺혀있는 것으로 보아 20은 되지 않았고 16-7세쯤으로 보이는 소년 이었다.
반짝이는 두 눈에는 총기가 흘렀고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만만치 않은 의지를 느끼게 했다. 검게 그을은 팔뚝은 어른 서넛을 해 넘길 만큼 강해 보였다. 검은 띠로 뒤로 묶은 머리와 검은 베옷의 차림새로 보아 귀족은 아니었고 채석장에서 일하는 인부였다.
압록강가 통구분지(通溝盆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국내성은 천연의 요새 였다. 그 북쪽에는 장백산맥의 갈래인 노령산 줄기가 동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가파른 봉우리들이 첩첩이 솟아 있었고 그 사이에 험악한 골짜기들이 연이어 있었다. 그 모습은 수많은 마치 말 들이 앞발을 쳐들고 포효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것은 북에서 오는 적을 막는 기다란 성곽 같기도 했다. 성 동쪽 시오리 지점에는 용산(龍山), 북쪽 두 마장 지점에는 우산(禹山), 그리고 서쪽 두 마장에 칠성산(七星山)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앞쪽에는 압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천혜의 성곽이었다.
서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국내성 못지않은 규모의 환도산성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국내성과 조화를 이루며 전쟁 등 비상시에 왕성 역할을 대신하는 방어용 예비 도성이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은 209년에 아예 환도산성으로 천도해 왕성으로 삼기도 했었다.
소년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이 하고 있을까.
“ 니르아이신, 가두님이 찾고 있어, 빨리 내려와”
저 밑에서 같은 또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머리띠의 소년은 그 목소리를 듣고도 크게 아는 체 하는 기색이 없이 성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니르아이신이란 이름도 그랬고 그를 부르는 소년의 억양도 예사 고구려 소년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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