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는 고구려의 옛 이름, 물길은 여진의 옛 이름)
안동일 작
연재를 시작하며
이 소설은 여진(만주족) 출신으로 고구려 장수왕 때, 태대모달 숙신도호 대장군으로 까지 올랐고 왕으로부터 대창하(大昌河)라는 고구려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던 인물의 일대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알다시피 청나라를 세운 고조가 누루하치다. 그는 인구수 5백도 채 되지 않는 압록강가의 작은 여진 부락에서 태어나 입지전적 노력에 행운이 겹치면서 천하를 재패했던 지략과 용력을 겸비한 동북아 최고 영걸의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장사의 길에 나서 큰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바탕으로 병력을 모아 독특한 방식으로 운용하고 성장시켜 중원을 재패했다.
그런데 그의 부의 축적 과정에 가장 큰 도움을 준 후원자가 조선 사람이었고 그의 가슴에 웅지와 지략 그리고 학문적 소양을 심어준 사람 들이 조선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도 청나라 건국의 당당한 주역이었다는 얘기다.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네 인생사에 있어서 지난날의 일에 대한 가정이 큰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광해군이 친명 사대주의 세력에 의해 축출 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 후에도 강홍립 장군이 조선으로 귀국해 모멸과 질시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지 않고 청에 계속 남았더라면 우리의 역사, 동북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누루하치를 탐구하다 보니 만주족, 여진족이 고대로부터 우리와 끈끈한 인연 속에 애증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의 4촌 쯤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런 기저위에 마침 얼마 전부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동북아의 평화연대’ 라는 명제가 시대를 선도하는 담론으로 떠올라 있다.
국내의 경제 상황이며 북핵으로 꼬이기만 하는 남북문제, 그리고 G2로 올라선 미국과 중국의 극한 대립, 일본과의 식민지배 사과 문제 독도 문제 등 제반 여건이 난마처럼 얽혀지면서 그 빛이 바래져 한때의 장밋빛 바람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지만 이런 관심과 바람은 ‘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각국의 역사인식 공유와 평화공존, 상호 발전 모색 이라는 당위 섞인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져야만 하고 또 그럴 때 모두의 지평을 높이게 되는 윈윈이 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속에 담을 콘텐츠를 우리 만으로 채울 수 있냐는 것이다. 당연히 주변국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고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이 꽤 오래전 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라 하면서 고구려사의 자국사로의 편입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고구려 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 및 자국사로의 편입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해 그들의 아전인수, 견강부회를 지적해 시정을 촉구해야 한다. 하지만 행여 이 대응이 감상적이며 국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쳐진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현실적 위상이며 전략적 위치에 대한 분석과 고려 위에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 중국은 물론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하는 주변 당사국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 차원 높은 연대 협력의 구조 형성과 그 역사적, 논리적 기반을 만드는 노력에 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 어찌 보면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가장 강력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가장 연고권이 높은 만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만주족의 명맥이 끊어져 있다는 이즈음 4촌인 우리가 만주의 역사를 새롭게 연구하고 만주족의 인물들을 탐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성과는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만주의 역사, 동북아의 역사를 어느 한 개개 민족의 틀과 시각 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을 공유하고 있는 제 민족 전체의 틀에서 공통의 역사라는 인식을 갖자는 것이다.
우리의 배달 민족주의는 중화의 패권 민족주의와 일본의 황국 민족주의와 정면으로 싸움을 벌이겠다는 공격적 민족주의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실제 현실에 있어서도 승산도 없을 뿐더러 또 국가의 국경을 변경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을 넘어서 ‘만주는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 이라는, 다소 계면쩍으면서도 무수히 불러 보았던 그 구호 속에 담겨 있는 ‘찬란한 민족사’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 낸 환영에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요즘 같은 지구촌 시대에 꼭 우리의 행정력이 미쳐야만 우리 땅 인가. 꼭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만이 동족인가. 중국이 아무리 자기네 역사라고 우긴들 천하가 엄연히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구려가 중화 속의 변방 고구려가 될 것인가. 이탈리아가 반도에 갇혀 있다고 로마의 역사가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제 시야를 더 넓게 떠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민족이라는 담론이 만들어 낸 프로그램속의 국수적 성향의 메트릭스에서 는 벗어나되 함께하는 큰 틀의 역사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천 700년전 장수왕이 바로 이런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됐을 때 우리는 인식의 지평을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 세계로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될 것이며 이런 우리의 발상의 전환과 지평의 변화는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상대편에 의해 상대편 진영 깊숙이 들어가 종국의 승리를 따내는 가장 힘 있는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래 고구려가 당신네 역사라고 그럼 당신네 역사 전체가 우리 것이 되는구만…’ 2023년 봄 저자 안동일
장수왕 초상화
1. 천도와 평양성 건설
“아진, 여기서 내려다보는 능라도의 경치야말로 천하 절경 아니냐?” 한참을 아래쪽 풍광을 둘러보며 말이 없던 왕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옆에 서있는 아진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위나라나 동진이 나라는 크다고 하지만 우리땅처럼 이렇게 정겨운 풍광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아진이 대답했다.
때는 서기 433년 장수왕 20년이었다. 평양으로 천도를 마치고 6년이 지나면서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장수왕은 부왕 광개토대왕의 영향으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지니고 있어 차근차근 그 웅지를 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처럼 왕과 호젓하게 함께 있게 된 셈이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부쩍 왕의 권위가 높아져 국내성에 있을 때처럼 독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없었다. 두 군신은 평양성 북성 현무문 꼭대기 망루에 올라 있었다. 내군들을 저만큼서 쉬게하고 왕은 아진만 따라 오라 하더니 망루 꼭대기에서 한참 동안 아래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러차례 와 보았을 터였지만 왕은 높은 곳에 올라 완성 단계에 와있는 새 도읍 평양을 굽어볼라치면 새삼 감개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현무문 아래로 옹문으로 된 전금문이 있었고 그 아래로 대동강이 흘렀고 능라도와 반월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성은 최근에 완성된 신성이었다.
평양은 온통 성으로 세워진 성곽의 도시였다. 무려 7개의 성이 있었다. 아래로 내성, 그리고 왼편으로 대성산의 우람한 산성이 있었고 아래쪽에 왕이 거처하는 안학궁, 그리고 중성과 외성이 연이어 펼쳐져 있었다. 양각도가 저 아래쪽에 강바람을 맞으며 갈대 잎이 흩뿌려지듯 넘실대고 있었고 능수버들 위로 새들이 떼 지어 날고 있었다.
성안 모습들도 정리가 이루어져 활기를 띠고 있었다. 성 북방에 동명왕릉이 있었고 청호동은 권신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동창리는 무관이며 역관들, 역포구역은 상인들, 그리고 황룡구는 일반 백성들의 가호가 들어서 있었다. 사통팔달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승리대로와 주작 대로를 축으로 하여 각 마을과 구역 그리고 성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대로의 이름은 국내성 대로의 이름을 거의 다 가져왔다. 대성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북으로 산줄기를 따라 묘향산과 국내성으로 이어진다. 또 대동강 일대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서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아진, 네가 수고 많았구나.” 아진이 도축부도감으로서 보낸 짧지 않은 세월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아진이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고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장수왕의 눈길에는 신뢰와 성의가 가득했다. “네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훌륭한 성들이 어찌 들어 설 수 있었겠느냐?”
“제가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저 마마의 명을 좇은 것 뿐입니다.”
“아니다. 저 외성문의 우람한 주춧돌이며 동명왕님 능의 상석들도 너와 숙신백성들이 큰 힘을 들여서 옮겨와 세웠다는 것을 내가 들었느니라. 고맙다.”
“모두 마마의 백성으로서, 고구려의 신민으로서 행한 일이었습니다. 황공할 따름입니다.”
광활하기는 했지만 오지나 다름없던 평양의 옛 모습을 지금과 비교하며 감개에 젖은 장수왕이 아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몇 년이 됐지? 네가 평양에 와서 일을 하기 시작한지가?”
“예. 햇수로 꼬박 15년입니다.”
“짧은 세월은 아니로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예, 마마.”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진, 나는 이 곳에 천년 도읍을 만들고 싶구나.”
“예,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옵니다.”
천년이 아니라 만년이라도 대왕은 선정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장수왕을 곁에서 보필하고 지켜보았던 사람으로서 그것은 입에 발린 아첨이나 그저 그럴 뿐인 찬사가 아니라 스스로 갖는 확신이었다. 확신은 확신으로 간직하면 되는 것이기에 아진은 그 뒷말을 삼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