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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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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 현장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97회

안동일 작

대망의 고구려 프로젝트

“주균(酒勻)이라면 사까와 아닙니까? 그리고 좌백(佐伯)이라면 사에끼죠?”
“맞아요, 광개토대왕 비문의 탁본을 일본에 제일 먼저 들여 갔다는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가 사까와죠. 사에끼는 최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다시 펴낸 사에끼 이에마사의 조상인듯 싶죠?”
“그렇네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중요한 사실이 아직까지 알려 지지 않았단 말인지…”
“고 어르신, 혹시 어느 일본인이 무슨 책자와 문서를 이집에 가져온 일이 있습니까?”
“글쎄 그런일은 없는데요…”
“그럼 부친이나 조부님께서 생존해 계실때는 어땠습니까?”
“글쎄 그때 우리는 향촌에 살았는데 더러 일본인 학자라는 사람들이 다녀 가긴 한것 같은데 그때 마다 우리 조부나 부친이 호통을 쳐서 쫒아 버렸던 기억은 있습니다만,근자에는 전혀…”
“음 대단한 기록이군 틀림없어.”
두 박사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빌리와 두 학자는 고씨댁에서 발견한 문서를 소중히 가슴에 품고 급히 비행기 스케쥴을 만들어 동경으로 날아갔다. 오박사가 발견해 낸 증서는 사에끼 다께따로라는 사람이 1878년 음력 3월 27일에 고씨 댁에서 청나라 광서 시대의 학자가 저술한 ‘광개토영 평안 호태왕 비 금석 지록’이란 문서와 탁본을 빌려 갔으며 일본군 참모부의 사까와 이찌로라는 사람이 보증인 격으로 부서한 영수증이라고 했다. 두 박사들은 이 문서로 해서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사건의 실체와 일본이 내세우는 임나일본설의 허구가 백일하에 밝혀지게 될것 같다고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다. 오영식박사가 빌리에게 광개토 대왕비문의 내용에서 기인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들려 줬다.

“비문에 보면 倭以辛卯求渡海破百殘 * * * 羅以爲臣民(왜이신묘구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이이란 문구가 나오는데 일본 학자들은 이를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고 해석 하면서 자신들이 당시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의 패자 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의 근거로 삼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정인보 선생이나 신채호 선생 같은 이는 이문장의 주체가 고구려가 되며 신라 백제와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을 분할 지배 했다고 해석 하고 있죠. 또 근래에 들어 서는 바다를 건넜다는 도해라는 글자가 변조 되었다는 학설이 여러 근거를 가지고 대두 되고 있죠, 판독할 수 없는 세 글자가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튼 지금까지는 사까와가 일본으로 1879년에 들여간 쌍구가묵본이 최초의 탁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먼저 고씨댁에 탁본이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 탁본이나 아니면 청나라 때의 금석학자가 썼다는 연구서를 보게 되면 자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되겠죠.”

빌리에게도 두 학자들의 흥분이 전염됐는지 일본인들이 그것도 군인이 비문을 훼손하고 조작했다는 사실에 비분의 마음이 들면서 고문서와 탁본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사람들 그 탁본과 고서를 없애 버리지는 않았겠습니까?”
“그렇게는 못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여기 사까와와 사에키의 이름이 나와 있으니 일단 그 후손들을 찾아보면 틀림없이 뭔가 나올겁니다.”

빌리등은 동경에 도착 하자 마자 시부야꾸의 김천수 노인 저택을 찾았다. 노인도 두 학자와 빌리 못지 않게 흥분 했다. 노인이 전폭적으로 탁본과 고문서 찾는일에 협조 하겠다고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두 일본인의 후손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빌리와 김천수노인이 동경 최고의 사립탐정을 고용 했기 때문이다. 두 집안 다 쇠락해 있었다. 오사까의 최하층 빈민가에서 국수집을 하고 있는 사까와의 증손자로 부터는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었지만 나고야의 어느 국민학교에서 야구부 코치일로 연명하고 있는 사에끼의 증손자에게서는 수확이 있었다. 민박사가 예상 했던 대로 그의 아버지가 바로 임나일본설을 주창한 유명한 사학자 사에키 이에마사 였기 때문이다. 그는 빌리등과 함께 간 김노인의 비서가 돈이 든 흰봉투를 건네자 그는 아버지가 소장하던 고서들이 다 없어졌지만 아버지와 절친했던 다께미야 씨에게 넘겨 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려 줬다.
다께미야는 나고야에서는 이름난 고서화 골동품 수집가 였다. 그는 혼쥬 동부일대를 주름 잡는 기타니조라는 우익 야꾸자 조직의 대부이기도 했다.
김천수 노인의 연줄을 통해 중간 거간꾼을 넣어 다께미야를 찔러 봤지만 그는 딱 잡아 뗐다. 거간꾼은 다른 얘기는 않고 어느 손님이 호태왕비 탁본이 있다면 고가로 매입하겠다는데 양도할 의사가 없냐고 했는데 다께미야는 탁본 같은 것은 본적도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물건은 다께미야가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낸 다께미야네 집에서 오랫 동안 식모살이를 했던 어느 여인으로 부터 그집에서 탁본을 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높이가 6미터가 넘고 넓이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비석 네면의 탁본은 누구의 눈에도 금새 뜨이는 독특한 것이었다. 여인은 민교수등이 보여 주는 사진을 보면서 10여년 전 한동안 다께미야의 지하 전시실에 큰 벽걸이로 되어 걸려 있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께미야가 그 물건들을 깊숙히 숨기고 있으리라는 정황은 여러 측면에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일본의 국수적이며 극우적인 역사인식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개거품을 무는 인물이었다. 민선 나고야 시장이 천왕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발언을 사석에서 해서 한참 문제가 됐을때 시정이 마비가 될 만큼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것도 그의 조직이었고 또 몇년전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 일본 정부의 고관의 입에서 나와 한일간에 신경전이 있었을 때도 동경에 까지 올라가 한국대사관 앞에서 눈살 찌푸려지는 시위를 벌였던 것도 그의 수하 청년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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