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은 (작가, 인터넷 인퓨런서)
– 영화 <환상의 빛>과 데운 사케(정종)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1999년)보다 ‘미야모토 테루’의 단편소설(1995년)로 먼저 만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뒤를 잇는 서정 소설가라는 평답게 언어가 여명 아래 펼쳐진 염전의 소금알갱이처럼 말갛게 반짝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원작을 더 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스크린에 옮겼다. 덕분에 영화 <환상의 빛>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수 차례 수상을 하게 된다.
첫사랑과 결혼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유미코. 그러나 그녀는 그의 아들을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남편을 황망하게 잃는다. 그런 유미코의 생(生)과 사(死)를 향한 심리를 감독은 빛과 어둠을 명민하게 이용해 표현한다. 영화 말미,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 후 새롭게 시작된 일상(삶) 밖으로 자신을 싣고 떠나 줄 버스를 기다리지만 결국 그 버스에 오르지 않고 다시 자기의 일상(삶)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어느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된다. 아주 길고 느린 롱 테이크로 펼쳐지는 이 광경은 고요한 파문으로 끊임없이 일렁이는 호수처럼 두고두고 보는 이의 가슴에 원을 그리게 되는데, 이 영화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떠올렸다. 언제나 슬픈 쪽은, 슬픔이란 감각을 껴안고 사는 쪽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生)이라는 선(線) 밖으로 사라져간 이들의 ‘사라져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 오랫동안 헤맨다. 어쩌면 평생 명치를 쪼개는 뻐근한 부채의식 속에서 방황하며 살 수도 있다. 이별과 단절, 그리고 죽음은 단어의 모양새만 다를 뿐 남겨진 이가 지고 가야 할 마음의 무게는 남은 생의 무게만큼 무겁다.
무엇보다 이미 죽은 사람에겐 죽음의 사유를 물을 수 없다. 특히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에게는 살아남은 자가 받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조차 없다. ‘왜’라는 한 음절에 담긴 복잡한 심경은 음향이 소거된 메아리가 되어 나를 때리며 통과한다. 사는 일의 곡진함은 스스로를 극한의 피로 속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그 피로로부터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건 나의 몫이다. 그러므로 남은 삶 동안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건네는 일, 어떤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건 의미로운 행동이며, 유미코가 장례행렬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 담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며, 길을 걸어가는 행위의 주체는 나일지라도 ‘함께’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이라는 뜻이 될 테다.
죽은 사람은 끝내 침묵한다. 그를 휘감아 사라진 ‘환상의 빛’이 어떻게 그에게 다가갔는지 알 길 없고 어쩌면 그 빛은 언젠가 내게도 방문할지 모른다. 바다 쪽으로 난 창문으로 들이치는 건 햇빛이나 달빛만이 아니다. 그렇다 해서 모서리마다 고드름으로 채울 바람의 냉랭한 울부짖음만도 아니리라. 다행하게도 우리는 창문을 닫는 법을 안다. 커튼을 치고 난로에 석유를 채울 줄도 안다. 그 모든 행위는 바로 ‘사는’ 일에 다름 아니기에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이어 도래한 암전의 고요 속에서 한때 내 삶에도 드리운 적이 있던 환상의 빛을 떠올리며 조금 울었다. 삶의 빛을 잃었던 시절 환상의 빛을 좇아 따라가고 싶었던 그 순간을 말이다. 눈물을 훔치고 싱크대 두 번째 칸에서 도쿠리(사케를 담는 작은 술병)과 오초코(사케를 마시는 작은 술잔)을 꺼내 여행길에 사왔던 준마이 사케(순 쌀로 빚은 일본 술)을 따랐다. 중탕으로 데운 술이 입술과 혀를 지나 식도를 통해 몸 안으로 흘러 횡경막 언저리에 온기를 전한다.
어쩌면 술을 데워 마시는 건 일상에 위로의 온도가 부족해 시작된 게 아닐까? 살아남은 자에게 남은 건 슬픔만이 아니라고, 지금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숨을 쉬며 술병을 데우는 모든 행위는 살아있어 가능한 일이라고. 내 곁에 없는 그 사람을 원망하며 그리워하는 일조차. (02/08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