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줄 아는 부자, 김경재 동국대 미주 동창회장 스토리 <2>
모교 향한 그의 사랑은 계속 이어져
적수공권으로 오늘의 부를 일궈 낸 그의 인생스토리야 말로 입지전적 드라마
‘김경재 회장 초청 북미주 해외연수’ 프로그램 연수 마지막 날에는 잔디광장에 둘러앉아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다. 연수기간 동안 보고 배운 것에 대한 감상과 앞으로의 포부를 발표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학생이 없었고 김 회장 또한 벅찬 마음에 매번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2009년 까지 6년간 진행돼 모교 후배 150여명이 초청 돼 혜택을 누렸고 이들은 각계로 진출해 큰 몫들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김경재 장학재단 미국문화체험 동호회’를 결성해 활발한 네트워킹을 펼치고 있다.
한번 학생들을 초청하면 10만 달러 이상의 경비가 소요 됐다는데 큰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단다. 하지만 그는 절약 할 수 있는 대목에서는 철저하게 아낀다. 그때 학생들과 견학 여행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한토막.
“랍스터가 유명한 뉴잉글랜드를 갔을 때 였습니다. 그날 따라 폭풍우가 심해서 사람들이 거리에 하나도 없을때 였는데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어항에 큰 랍스터가 가득 들어 있는데 손님은 한 테이블도 없더군요”
그래서 식당주인을 불러 그 답게 흥정을 했단다. 반값 이하인 거의 원가에 구입을 해 일인당 한마리 이상씩 돌아가게 됐기에 의기양양 흐뭇했는데 한참 후 신나게 먹고있는 학생들의 테이블을 보고는 혼비백산을 해야 했단다.
“잔 술로 하우스 와인 한잔씩 시켜 먹으라고 했는데 이 녀석들 무슨 영문인지 거의 일인당 한병씩 병으로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미국 와인 중에서는 제일 비싼 나파벨리 오푸스 원을 말입니다. 식당에선 한병에 2백불 훨씬 넘죠. 알고 보니 한 녀석이 와인리스트 맨위에 있는 그걸 20달러로 보고 잔술 보다 싸다며 주문했고 다른 애 들도 같은 것 달라고 해서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마시고 있는 걸 빼앗을 수도 없고, 아무튼 랍스터 에서 절약한 돈 수십배를 내야 했습니다. 나중에 버스안에서 맨먼저 주문한 학생에게 박수쳐달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이런 때 아니면 나도 못마셔 본 그런 와인 언제 먹어 보겠냐고….”
지금도 기억나는 학생들의 ‘오푸스 원’ 소동
짐작 하겠지만 적수공권으로 오늘의 큰 부를 일궈 낸 그의 인생스토리야 말로 입지전적 드라마다. 후배들을 위해 자서전을 펴내자는 권고에는 ‘내가 한 게 뭐 있어 남사스럽게 그러겠냐’며 손사래를 치지만 자전적 소설이라면 얘기가 달라 질 법 하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한편의 소설이다.
(서부 최고의 퍼블릭 코스, 팔로스 버디에 있는 로스 버디스 골프 코스에서 포즈를 취한 이번 초청 골프 여행 멤버들, 맨 가운데 배시영 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가 김경재 회장이다. 안지영기자 촬영)
1945년 해방동이인 그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해남의 명물인 김을 생산하는 덕장을 운영했는데 그 규모가 꽤 커 유복한 편 이었다. 1남2녀중 장남, 3대 독자였는데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단다.
고등학교때 광주로 유학을 갔는데 모범생은 못 됐던 모양이다. 2년을 못 채우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해야 했다. 광주에서 권투도장에 다녔는데 그 무렵 권투도장은 모범생들이 다니는 곳은 아니었고 인근 왈패, 어깨 형님들과 꽤 교분을 가지게 됐던 모양이다. 소년 경재의 펀치 하나는 대단 했단다. 그때 도장의 사범이 무서운 이였는데 유망주로 꼽히는 한 친구를 그리 편애했다. 그 아이의 스파링 상대로 그를 시키곤 했는데 그애 에게는 다치면 안된다고 헤드기어도 씌워주면서 경재군에게는 스트레이만 쓰라는 등 제재가 심했기에 줄창 맞아야만 했다. 어느날 사범이 없는 틈을 타 기어를 벋기고 스파링을 하자고 해 늠씬 때려 눞이고는 그길로 해남으로 달려가 할머니가 모아둔 쌈짓돈을 뒷주머니에 꼽고 서울로 향했다. 그때 우리 손주 깡패가 될까봐 노심초사 걱정했던 할머니는 서울로 가겠다니까 적지않은 그돈을 성큼 주셨단다.
서울역에 내렸을때도 그에게는 위기가 있었다. 두리번 거리고 있으려니 그의 경험에 한눈에도 어깨로 보이는 어떤 형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기에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달려 택시를 탔단다.
“그때 그 형한테 불려가 같이 어울렸다면 김경재 인생 또 달라졌을 겁니다. 사람의 운명 한끗 차이입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난데없는 고아원 생활을 해야 했다. 고향 아저씨뻘인 한 친척의 주소를 가지고 있어 금호극장 뒤의 그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때 그 아저씨가 고아원 경영에 나서려고 할때 였기에 그렇게 됐단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그는 고아원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고 회고 한다.
“한 석 달쯤 있었는데 그곳 미제 버터를 잔득 푼 미제 밀가루 수제비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그곳에서 지도 주임하던 형도 만났고…그 형이 바로 동국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곳 고아원에서 서울의 문리를 얼만큼 터득한 그는 중동 고등학교 야간부로 적을 올겼고 자취 생활을 했다. 하지만 중동 고등학교 에서도 일이 있어 온전히 졸업을 못했고 바로 옆 같은 재단 수송전기공고 졸업장을 지니고 있다. 이때의 이야기는 그의 자전 소설이 나오면 그때 자세히 듣기로 한다.
아내의 결단으로 이뤄진 운명의 맨손 미국행
이 또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64년 동국대학교 농학과에 입학을 했고 동기들 보다는 다소 늦게 69년 졸업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대 독자였기에 군대는 가지 않아도 됐다. 졸업 후에도 결혼이며 직장 전전 등 사연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뛰어 넘기로 하는데 그는 74년 서울 여의도 에서 난데 없이 중국집을 오픈했다.
그때 여의도는 막 개발이 한창이던 때여서 유입인구가 급증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공사장이 많았기에 여의도 고등학교 인근 미주상가에 있던 그의 중국집 ‘래객(來客)’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그 무렵 그는 버는 돈 못지 않게 쓰는 돈이 많았다.
그의 중국집은 해남 고향친구 들이며 동국대 동창 친구들의 집합소 였고 아지트 였으며 인생 상담이며 급전융통의 장이 었다. 매일 저녁 술판이 벌어졌고 화투판이 벌어졌고 술판은 장소를 옮겨 단란주점이며 룸쌀롱으로 이어졌다. 그런 곳의 비용은 늘 통 큰 카우보이 김회장의 몫. 이런 생활이 몇년 이어지자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 김여사가 특단의 조치를 한다. 아이들은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당신 미국 가는 것은 어때요? 거기가면 나쁜 술 친구도 없고 돈 꿔 달란 고향사람도 없을 테고… ”
광주에서 이러다 뒷골목 부랑배 되겠다 싶어 서울로 향했던 그의 결단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그래서 중국집을 넘기고 미국행에 오른 것이 81년 이었다. 막상 중국집을 그만두고 이것저저것 정리하고 나자 그들 부부의 수중에는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자식 얼마간 먹고 살 돈 남기고 거의 무일푼으로 새출발을 다짐하며 혼자 미국행에 올랐다.
그가 미국에서 첫발을 내딘 곳은 친지가 있었던 아이오와의 드모인이었다. 지금도 드모인은 우리 동포들에게는 오지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그 무렵에는 더했다. 친지가 경영하는 그로서리는 그집 식구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그곳에서 김회장은 세차장일이며 청소일 등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몇달 뒤 너무도 막막하고 지쳐 서울의 아내에게 돌아가야 겠다고 거의 울면서 전화를 했다. 그때 여사의 대답은 한술 더 떴다. “사나이가 칼을 한번 뽑았으면 두부라도 잘라야지 비겁하게 뭐하는 짓 이냐?”는 호통이었다. “이곳은 어떻게든 내가 책임질테니 다시 용기를 내라”는 격려 였다.
그리고나서 다시 추스리고 나섰을 때 만난 사람이 바로 그의 인생 중후반 친동생 이상으로 여기는 동반자 이금재씨였다. 이씨는 동국대 67학번 경찰행정학과 출신으로 한국서 경찰에 있다가 정식으로 이민 와 번듯한 미국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그의 조언과 도움으로 김회장은 안정을 되 찾았고 또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 까지 취득하게 된다.
있으면 개도 안 물어 가지만 없으면 그게 전부인 영주권
있으면 개도 안 물어 가지만 없으면 그게 전부라고 여겨 지는 것이 바로 영주권이다. 영주권을 딴 김회장은 무대를 이른바 큰 물인 LA로 옮기면서 서울의 가족들을 불러 들이게 된다.
그가 LA로 옮겨와서 시작한 일이 봉제 일이었다. 미싱으로 오버록그라 불리우는 시침질을 하는 재봉틀 일이었다. 우연한 시작한 일이었다. 동포 교회에서 만난 한 부부가 홈워크라 불리우는 그 하청일을 하고 있었고 힘이 좋으니 한번 해보라는 권고에 성과급제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내 손에 익었고 열심히 재봉틀을 밟았다. 하루에 열시간 이상씩 재봉틀을 돌리고 나면 일어 설 수도 없었고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기 일 쑤 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밟고 또 밟았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 빨리 가족을 불러와야 한다는 일념에서 였다.
후일 모교 동국대학교에 대한 장학사업으로 유명세를 탔을 대 한국의 일간지들은 김경재 회장이 1969년 농학과를 졸업하고 81년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해 의류 유통 그룹 KJ 그룹을 비롯해 부동산, 골프장 사업을 운영하는 등 북미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손꼽히고 있다고 간단히 그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의 성공은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이룬 금자탑이다.
열심히 재봉틀을 밟아 홈워크 하는 남자 재봉사 가운데는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억척을 떤 덕에 가족 초청의 날은 앞당겨져 84년 무렵에 부인과 아이들이 도미했지만 고생은 그때 부터 더했다.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