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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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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72회

안동일 작

비키라는 바이올린

“순 날강도 같은 깡패.”
비키가 빌리의 품에 안겨 앙탈을 부리며 말했다.
“왕자하고 여왕 가운데 누가 높지?”
빌리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면서 물었다.
“난 여왕하고 싶지 않아.”
비키가 대답했다.
“그럼?”
“난 당신의 애인만 하면 돼.”
빌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입술이 활짝 열렸다. 빌리의 손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만 했는데도 그녀는 벌써 한 옥타브 높아진 바이올린이었다.
빌리가 능숙한 솜씨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연주장 이었다. 강물과 연주장 사이에 주차장과 쇼핑센터가 들어서 있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세상의 남자 연주자들이 그토록 켜고 싶어 하는 명기 비키 트레이스의 깜찍한 케이스는 빌리의 손가락 두개로 간단하게 스르르 흘러 내렸다. 빌리만큼 비키를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세상에 없었다. 속헝겁 두개를 벗겨 낼 때 바이올린 네개의 줄에서 청아한 소리가 살짝 울렸다. 최고의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바이올린의 자태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강물에 반사 됐고 빌리의 손과 입술이 활이 되어 명기를 연주하기 시작 했다.
봉긋이 솟아 오른 G선에 활이 닿았을때 바이올린이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저음의 베이스를 울렸다. 활은 능숙한 솜씨로 팽팽해진 D선으로 옮겨 갔고 바이올린 몸체가 파르르 떨렸고 강물 흐르는 소리를 냈다.
A선은 흰 돛단배 였다. 강물을 가르는 바람이 돛단배의 물살을 가파르게 했을 때 E선은 이미 최고조의 옥타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자는 악보에 따라 다시 G선과 E선에 활을 그어 댔고 바이올린 소리는 연주장을 가득 열띤 화음으로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E선의 연주가 시작됐다. 빠른 템포의 스타카토였다. 비키라는 명기를 만든 명장도 빌리만이 연주 할 수 있는 E선의 스타카토에 흐뭇한 미소를 보냈으리라. 연주자와 명기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활은 어느때 보다 팽팽했고 그 가는 E선에 붙어 있던 먼지 한톨 한톨도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을때 창을 통해 강물이 온통 흘러 들어온 듯 연주자도 바이올린도 모두 젖어 있었다. 언제나 연주에 더 크게 만족 하는 것은 악기였다.

“휴, 이렇게 해놓고 나보고 여왕이래?”
비키가 빌리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말했다.
“나는 문득문득 여왕이 바라는게 이것 뿐인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아니야, 결코 그렇지 않아, 물론 당신과의 섹스도 너무 멋지고 로맨틱 하지만 난 그것 없이도 당신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어. 정말이야.”
비키는 빌리에게 올때 마다 어떤 로맨틱한 언어를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약속도 해 줄 수 없었다. 비키 뿐만 아니라 카니에게도 그랬었고 숙정에게도 또 지난번에 심양에서 만났던 연화 에게도…
비키라는 멋진 여인을 옆에 두고 그것도 멋진 연주를 끝낸 후 감미로운 시간에 다른 여인을 생각한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기는 했지만 빌리의 감정이 그랬다.
자신에게 다가온 여인들이 모두 매력적이고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닌 멋진 여인들 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자신을 모두 던지기에는 웬지 허전 했다.

더우기 고구려 복원이란 원대한 꿈이 자신의 뇌리를 지배하게 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한여인을 완전히 소유하고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는 것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그 가정을 이 지구상 그어떤 곳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지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과 그것을 병행 하기란 빌리의 능력으로도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피속에 돌고 있는 이기적인 바람둥이 속성이 강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합리화 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빌리는 어쨌든 당분간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었다.    “참, 아까 이제 창가에 서지 못한다는 말은 뭐야? 나 정말 더이상 오지마?”
비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마저 깃들어 있었다.
“응, 그냥 비키 놀리려고 한 말이야.”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빌리가 말했다.
빌리의 완강한 태도 때문에 비키도 대강은 빌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처럼 함께 연주를 하면서 상대방을 파악 하지 못할 리 없었다. 비키가 그토록 원하고 있고 또 결코 그녀가 싫지 않은데, 그토록 구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집을 도둑고양이 드나들듯 찾아오는 그녀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은 나 이사 가려고해.”
“이사? 맞아, 회사에서 큰집 사기로 했구나, 이제 빌리도 큰 저택에서 살때가 됐잖아? 그만큼 성공 했는데 돈도 많이 벌었을텐데…”
비키도 그 타령이었다.
비키가 큼직한 선그라스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도둑고양이 빠져 나가듯 빌리의 아파트를 나간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크리스가 건축 업자 한명을 데리고 빌리네 아파트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집문제 때문에 들르겠다고 하더니 녀석은 일요일도 없이 뛰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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