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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67회

 안동일 작
“백두산이여 민족의 시원이여’”

웬지 그 두개의 돌산이 시루를 연상케 한다고 빌리는 느꼈다. 빌리의 기억에 집에서 시루떡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시루는 빌리의 망막에 각인돼 있었다. 그 두 개의 검은 큰 돌산 사이를 빠져 나가자 녹지대가 나타났다. 곧 이어 자갈 밭이 펼쳐 지면서 천지 호숫가에 다가 설 수 있었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운동화를 벗고 호수물에 발을 담갔다.
잠시도 서있을 수 없을 만큼 물이 찼다.
천지로 흘러들어가는 물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천지에서는 끊임없이 물줄기가 흘러 나온다는 것이다.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속에는 끊임 없이 솟아 오르는 샘이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는 것이었다.
오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빌리는 문득 이 강토를 보우하는 천지의 신령과 백두의 혼백이 거기에 깃들어 있고 또 반 만년 이 민족을 지켜온 준엄한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 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생전 생각해 본적도 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백두의 봉우리들이 빌리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찌안(集安)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무렵이었다. 이동에 하루 반이 소비된 셈이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이도 백하 까지는 오선생의 짚차를 이용 했고 거기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통화에 내려 또 짚차를 타고 6시간이나 걸려 찌안에 왔던 것이다.
통화에서 찌안 까지의 직선 거리는 1백 70키로 미터 남짓 이라고 했다.
백마일이 조금 넘는 거리였는데 6시간이나 걸려야 한다는 사실이 빌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울화까지 치미는 것이었다. 왕노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아무리 근력을 뽐내곤 하셨지만 칠순을 훨씬 넘긴 노인은 노인이었다. 밤 기차안에서 노인은 많이 흥분 했었다. 빌리가 고구려의 역사, 우리 민족의 강성했던 과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선생과 자신에게 에게 연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노인으로서는 한껏 흐뭇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안주도 변변치 않은데 그 독한 마오타이주를 계속 마셨고 신이 나서 대꾸를 했었다. 거의 눈도 붙히지 않았다.
통화역에 내려 대기하고 있던 짚차에 오를때 노인은 휘청 했었다. 그런데다가 짚차가 고약하게 낡은 차였다. 오선생이 몹씨 송구스러워 했지만 미리 조직했던 차가 급히 수리할게 생겨 그렇게 됐다는데 지금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통화의 한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때도 노인은 어제 까지의 그 기백이 어디 갔는지 국물만 조금 떴을 뿐 영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
호텔에 들어 목욕도 하고 잠시라도 쉬어 가자고 빌리가 권했지만 찌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더 일이 복잡해 진다고 막무가내 였다. 하긴 이놈의 나라는 장거리 전화라는게 제대로 작동을 안하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애써 활력을 찾은체 했지만 덜컹대면서 찌안으로 오는 6시간 동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던 모양이다.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공사장에는 낡은 트럭이 길을 떡 막고 서 있엇을 뿐 대낮인데도 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빌리는 1백마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의 고속도로를 자신이 깔아 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이 들었다. 미국이나 서울의 유수 건설 회사가 달라 붙으면 아무리 몇개의 산이 가로 막고 있다 해도 두달이면 떡을 칠 공사 아닌가 싶었다.
찌안은 고구려가 최고로 강성했던 무렵의 수도였다. 아무리 중국인 들에게는 변방의 소수민족 국가라고는 해도 그래도 유물과 유적이 즐비한 이 도시를 이렇게 개발 하지 않고 천덕 꾸러기 처럼 내버려 두고구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더 울화가 치밀었다.
찌안 빈관이라는 호텔에 들어 목욕을 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덕에 다행히 노인은 생기를 되 찾으셨다.
“야, 빌리 조금만 더 차를 오래 탔으면 오늘 초상 치뤘겠다.”
1층 식당에 앉아 간장을 뿌린 쌀죽을 뜨면서 노인이 배시시 웃었다.
“어제 술을 너무 드셨어요.”
“그래, 나도 이제 늙었어, 그 정도 술을 이기지 못하다니…”
“중간에 차를 세워 쉬고 오셨으면 덜 힘드셨을텐데…”
“아니야 이렇게 와서 샤워하고 나니까 거뜬 하잖아, 중간에 어디 쉴곳이 있데?”
“또 어제 드신 술이 평소에 드시는 마오타이하고 질이 다르던데요.”
“글쎄, 아무튼 걱정 끼쳐 미안하다.”
그때 미리 약속을 했다는 집안의 사람들이 오선생의 안내로 식당 안으로 들어 섰다.
찌안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뚱뚱한 사람과 안경낀 박물관장, 그리고 유적지 관리 책임자라는 호리호리한 사람, 세명이었다.
그들은 왕노사를 잘 아는지 각별하고 공손하게 대했다. 빌리는 오는데 하도 마음 고생 몸고생을 했고 찌안 시의 꼴이라는게 영 마뜩치 않아 이들이 그렇게 반갑지도 않았지만 초면에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이들의 안내로 해가 뉘엇뉘엇 기울고 있었지만 호태왕비며 장군총을 돌아 보기로 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 있는 법이었다. 모든것이 다 못마땅했고 울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호태왕비라면 한민족에게는 최고의 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찌안현 관리들의 태도며 보존 상태 주변 환경들이 영 빌리의 성에 차지 않았다.
호태왕비를 국보문화재로 관리 하고 있다면서도 전각의 시멘트는 다 낡아 먼지가 부수수 날렸고 비각 주변은 개똥과 소똥 투성이었고 쓰레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벽에는 동리 꼬마들의 낙서가 즐비 했다. 꾀죄죄한 동리 아낙이며 꼬마들이 조잡하기 이를데 없는 기념품을 손에 고 빌리와 왕노사의 옷끝을 잡아 당기며 사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을 유발했다. 빌리네가 그지역 최고 관리들과 함께 나타 났는 데도 그정도 였으니 그렇지 않았을 경우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호태왕 영락 대왕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자니 묘비를 뒤로 하고 민가의 돼지우리가 빤히 보이는 정문에서 차에 오르려니 눈물이 막 솟았다.
‘그 위대 했던 대왕이 후손들 잘못 둬서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 계시는 구나’싶었다.
호태왕비에서 5킬로 쯤 떨어진 장군총으로 향했다. 장군총에서도 이런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7층으로 된 석묘는 누가 봐도 1천 5백년 전 우리 조상들의 스케일이며 웅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그런데 그 관리 실태가 한마디로 개판 이었던 것이다.
7미터 높이의 장방형 화강암 8개가 석실 건조물의 중심을 잡기 위해 사방에서 받치게 되어 있었는데 뒤쪽의 그것들이 두개나 없어져 버린채 방치 되어 있었다. 문화 혁명때 홍위병 녀석들이 판판한 돌을 인민재판석 으로 사용하기 위해 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총이 매년 조금씩 뒷쪽으로 기울고 있다나. 환장할 지경이었다. 문화혁명이 언제 있었던 일인데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대로 두고 있다니…
예산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그까짓 2톤 정도 되는 화강암 두개를 만들어낼 예산이 없다니 도무지 얘기가 되지 않았다. 빌리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지갑을 열어 그 화강암 값을 지불 하겠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야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바로 뒤의 일이었다. 빌리와 왕노사는 관리들을 따라 석총 위를 올랐다. 7층으로 되어 있는 석총 3층 까지는 철계단이 설치 돼 있었고 그 위부터는 원칙상 오르지 않게 되어 있는지 철계단은 없었다. 그러나 계단식으로 돌이 쌓여 있어 목마를 타듯이 손을 짚고 오르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젊은 축인 관리국장이 그런식으로 위로 올랐고 빌리와 오선생도 무심히 그를 따라 위로 올랐다. 왕노인과 뚱뚱한 위원장은 그냥 3층 기단에 서서 이것 저것 얘기하고 있었고 박물관장 까지 네사람이 꼭대기 까지 올랐다. 장군총 꼭대기는 2백 스퀘어 피트 정도 넓이의 정방형 공간 이었다. 다른곳도 그랬지만 꼭대기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여기저기 빈병이며 담배꽁초도 늘어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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