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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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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여성생활

<레비나의 영화 한 잔, 술 한 편> ‘러브어페어’와  ‘에그노그’

서지은 (수필가, SNS 인플루언서)

사랑은 사건인가, 사고인가? 영화 ‘러브어페어’와 칵테일 에그노그

‘참신한 사랑’ 이라는 말은 사랑의 영역에선 형용모순이 된다. 사랑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부할수록 생명력을 갖는 것, 그건 어쩌면 사랑만이 유일하다.
비행기 고장으로 불시착한 섬, 귀환을 위해 옮겨 타게 된 러시아 크루즈, 그 여객선 바(bar)에서 눈이 마주친 두 남녀, 이렇듯 뜻하지 않은 사고로 특수한 상황에 처하게 된 마이크(워렌 비티)와 테리(아네트 베닝)은 그만 사랑이라는 사건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둘에게는 이미 각자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다.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마이크의 제안으로 둘은 마이크의 고모가 사는 타히티 섬에서 꿈결 같은 3일을 보내며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고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3개월 후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자는. 만일 그 때까지 마음에 변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시간은 함께하자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사고로 시작된 사랑이라는 사건을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둘은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러나 시각이 자정이 될 때까지도 테리는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마이크는 결국 실망과 분노에 휩싸여 그녀에게 주려던 그림을 호텔 직원에게 버리듯 주고 떠난다. 사실 테리는 약속 장소로 오는 동안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지만 마이크에게는 그걸 알 길이 없다.

서로의 소식을 알지 못 한 채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던 둘은 한 성탄절 음악회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나 서로의 곁에는 각자의 약혼자들이 함께다. 테리를 향한 그리움, 실망감, 궁금증 등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마이크는 그녀의 집을 수소문해 불쑥 방문한다. 왜 그 날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대신 그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거짓말을 하는 마이크, 테리 역시 사고에 대한 언급 없이 그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내내 기다렸는데 마이크가 오지 않아 화가 났었다는 거짓말을 한다. 어째서 둘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여전히 의문에 싸여있는 마이크, 그때 테리의 집에 자기가 그녀에게 선물하려 했던 그림이 걸려있음을 발견한다. 동시에 호텔 직원의 말을 떠올린다. 휠체어를 탄 여성이 간절하게 그 그림을 사고 싶어해 주었다는 것을. 비로소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포옹한다. 진부한 로맨스란 이렇듯 해피엔딩 이어야만 완벽해지는 법, 사고처럼 시작되어 특별한 사건이 되었지만 예상하지 못 했던 사고로 제대로 된 이별의식도 없이 묻혀버릴 뻔 했던 둘의 이야기는 마침내 사랑의 일(love affair)로 완성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아름다운 두 배우의 진심 어린 열연과 장면마다 스며든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타히티 섬의 풍광,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의 행복이야(I like watching you)’와 같은 명대사가 등장해서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실 제 두 주인공의 현실 러브스토리 덕분에 유명해졌다. 헐리우드의 소문난 바람둥이였던 워렌 비티는 이 영화로 바람둥이의 삶에 종지부를 찍으며 진정한 연인 아네트 베닝에 정착한다. 스물 한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해 세 명의 자녀와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행복한 삶을 나누고 있다. 세기의 로맨스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둘의 러브스토리가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한다.

언젠가 외국 땅에서 홀로 겨울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나는 집 근처의 DVD 렌탈샵에서 영화 <러브어페어>를 빌려와 플레이 시킨 후 반쯤 졸고 있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한 잔의 에그노그를 만들어 홀짝인 기억이 있다. 마침 창 밖에서는 거짓말처럼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안타깝게 했던 마이크와 테리의 로맨스가 행복하게 맺어져 울었고, 그만큼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울었다. 부드러운 고양이의 감촉과 달콤하고 고소한 에그노그만이 나를 위로하는 존재였다. 레시피고 뭐고 제멋대로 만든 에그노그지만 내게는 최고의 에그노그였다.

에그노그(eggnog)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달걀이 들어간 달콤한 맛의 음료로 주로 위스키나 브랜디, 럼 등의 알코올을 첨가해 마신다. 달걀 흰자를 거품 내어 설탕을 넣기 때문에 커스타드 크림과 비슷한 맛이 나서 아이들도 좋아하고, 커피에 섞어 에그노그 라떼로 마셔도 맛이 아주 좋다. 특히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즐겨 마시며 취향에 따라 넛멕이나 시나몬과 같은 향신료를 첨가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집 안 가득 향긋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피어올라 한층 연말 기분을 느끼게 한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따뜻한 에그노그를 한 잔 만들어 영화 <러브어페어>를 플레이 하기 좋은 시즌, 어쩌면 창 밖으로 영화 속에서 마이크와 테리가 해후했던 그날 밤처럼 함박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22 겨울 레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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