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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47회

안동일 작

/ 신랑인 헤리 바로옆에 또다른 들러리로 서 있던 빌리는 다음번에는 녀석들 차례구나 싶어 혼자 미소를 흘려야 했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는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 이루어 낸 뒤에야 그 문제를 신경 쓰기로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시면 좋아 하지 않을 얘기였다. /

 

지나의 부모들은 엄청난 액수로 책정된 그녀의 보석금을 마련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그녀는 보석 되지 않았다.
빌리는 친구들과 상의해서 김광호가 운영하고 있는 청소년 마당집 엠마오의 집에 얼마간의 성금을 전달했고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자고 다짐을 했었지만 나서기 쉬운일은 아니었다. .

 

브렌드 네임 ‘탈’은 엄청난 성공작 이었다.
제일 처음 시도 한것은 청소년용 자켓이었다. 콜럼버스와 리미트 브랜드의 자켓을 만들어 본 경험이 큰 몫을 했다.
상미의 아이디어로 자켓에 모자를 달았고 모자 뒷쪽에 취발이의 탈을 그려 넣었다.
뉴욕의 청소년들 사이에 때 아닌 취발이 붐이 일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임에도 아이들은 모자를 뒤집어 쓰고 다녔고 그런 아이들의 뒷모습은 영락 없는 취발이였다.
미국애들은 치바리라고 발음했다.
뉴욕서 촬영해 전국 네트웤에 방영 되는 홈드라마 ‘올 아메리칸 보이’에 출연하는 청소년 배우들에게 선물로 증정한것이 주효 했다.
굳이 다른 말 않고 하킴을 통해 나눠 주기만 했는데도 아이들은 기를 쓰고 그 자켓을 입고 출연했다.
뉴욕의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멀쩡한 자켓이 있음에도 1백 50달러나 하는 탈 자켓을 사내라는 아이들의 성화에 울상을 지을 때쯤, 서부에서도 중부에서도 조금씩 주문이 들어 오기 시작했고 얼마뒤에는 텔레비젼 뉴스에서 까지 치바리 자켓의 붐 에 대한 소개가 있기도 했다.
다음에 시도 한 것이 티셔츠였다. 최고급 호주산 카튼을 대량 수입했고, 헤리의 경험을 토대로 상미가 디자인을 했다. 프로골퍼를 겨냥한 티셔츠 였다. 종래의 유명 티셔츠들이 디자인만을 생각해 에리 아니면 소매에서 플레이 하는데 조금씩 이라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헤리의 탈 티셔츠는 그런 결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작품 이었다.
아무리 사회성이 없는 헤리였지만 10년의 방랑골퍼 생활에 티셔츠 몇장쯤 선물할 동료 들은 있었다. 대개 중하위권을 맴도는 무명 골퍼 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모두 작은 취발이 로고 밑에 TAL 마크가 새겨져 있는 세련된 티셔츠를 입고 플레이 하는 장면은 TV를 통해 매주말 줄기차게 방영 됐다. 티셔츠 자체가 워낙 공을 들여 잘만든 제품이었기에 골퍼들은 자진해서 탈 셔츠를 즐겨 입었다. 몇몇은 골프 용품 제조회사의 브렌드 네임을 다른쪽 가슴이나 소매에 달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눈은 이색적인 탈마크로 집중되곤 했다.
백화점 마다 아우성이었다. 자신의 백화점에 탈 티셔츠를 납품해 달라는 것이었다. 빌리네는 그래도 몇몇 고급 백화점 만을 고집했다. 줏가가 더 올라 갈 수 밖에 없었다.
탈의 디자이너 세라 한, 상미는 디자인계의 샛별로 부각됐고 잡지들이 앞다투어 혜성의 등장을 알렸다.
이처럼 자켓과 티셔츠에서 성공을 거두자 문제로 떠오른 것이 모조품 들이었다. 탈이라는 브랜드는 상무성에 상표등록을 했기에 보호 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의 문화 유산인 탈그림에 대해서는 상표권을 인정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회사에서 취발이며 말뚝이 그림을 디자인으로 사용해 얼마간 재미를 보는 듯도 했지만 ‘탈’을 따라 갈 수 없었다. 탈바가지 디자인에 눈이 끌려 진열대로 다가 오거나 입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 섰다가 ‘탈’이라는 브랜드가 찍혀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씩 웃으며 돌아서곤 했던 것이다. 빌리네도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업자들이 대개 한국인 영세 업자 였기에 적극적으로 나서 그들을 재제하지 않기로 했다.
빌리네 공장앞에는 전국으로 나가는 물건을 싣기 위한 트럭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을 이었다. 절반은 맥도걸이었고 절반은 콘설리데이트였다. 맥도걸 트럭 기사들과 콘설리데이트 트럭 기사들은 더이상 서로 싸우지 않았다.
그사이 빌리와 헤리는 존 젠마노와 몇번 골프를 같이 쳤고 유진은 젠마노가 개최하는 친선 포커판의 단골 초대 손님이었다. 젠마노는 판판이 깨지면서도 유진을 초대했고 유진은 오늘은 얼마나 따줘야 하는가 고민 한뒤 적당히 따주곤 자리에서 일어 섰다. 젠마노는 포커 게임 중에서 넌 프러쉬 골프 게임을 좋아 한다고 했다. 넉장의 서로 다른 무늬를 모으는 게임이었는데 세번의 카드 교체 다음에는 자신의 패를 세장까지 오픈 하면서 배팅을 하는 게임이었다. 세장을 오픈 한뒤 또한번 교체할 찬스가 있었다. 유진은 이 마지막 교체의 명수 였다. 상대방의 카드를 다 읽은 다음에 마지막 교체로 판을 뒤집어 상대를 울리곤 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교체를 한다는 것은 넉장이 모두 무늬가 다른 메이드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이 로에서 도망가기 위한 탈출일 수도 있는데 유진이 받아낸 카드는 귀신같이 메이드를 만들어내는 카드 였다고 젠마노는 빌리와 골프장에서 만나면 궁시렁 대곤 했다.
젠마노는 골프장에 나올때 꼭 빌리네 탈 티셔츠를 입었다. 젠마노의 골프는 짰다. 핸디가 18이라고 우기면서도 자신의 핸디를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가 골프장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순간은 퍼팅 순간 뿐이었다. 티셧을 칠때면 ‘웁스 슬라이스다’ ‘어이쿠 쪼로다’ 하며 엄살을 떨기 일쑤였고, 세컨셧 때는 골프장의 거리 마크가 틀렸다고 투덜댔지만 그린에 올라서면 그의 눈은 독수리의 눈이 되곤 했다. 한발은 쭉 내민 어정쩡하게꾸부정한 자세로 그는 귀신같이 먼거리 퍼팅을 성공 시키곤 했다.
빌리야 스코에서건 기량에서건 존을 쫒아 가지 못했지만 헤리와의 골프라운딩은 환상적 이었기에 존은 그들과 골프 치는 것을 윤호와 포커 하는 것 만큼 좋아했다. 헤리는 자신이 원한 지점에 어김없이 공을 갖다 놓곤 했다. 그와의 내기는 스코어가 아니라 자신이 디클레어한 지점에서 얼마나 떨어져 공이 멈추느냐 하는 것으로 해야 했다. 존은 헤리가 몇년전 유에스 오픈서의 바로 그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다음 부터 그를 챔프라고 불렀다.
헤리는 골프를 안친다고 했지만 그건 미국 프로 무대에서 안친다는 얘기였다. 왕노사가 뉴욕에 왔을때 그를 접대하기 위해 다시 클럽을 잡은 이래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필드에 나갔다.
헤리와 세라 그러니까 현성과 상미의 결혼식은 뉴욕 교포사회가 형성된 이래 최고로 호화롭고 성대한 결혼식으로 기록 될 결혼식 이었다.
온 뉴욕이 벌컥 뒤집힐 정도로 쟁쟁한 인물들이 하객으로 참여 했다. 그레이트 메너라고 뉴욕에서 제일 큰 방퀘 식당서 치렀는데 헤리의 선 스승인 법상스님이 주례를 선것이 또 이채를 띠었다.
1천명도 넘는 하객이 밀려 들었다. 홍콩의 왕노사도 날아왔고 검은 예복의 청년들에 둘러싸여 식장에 들어서는 존 젠마노와 중화공소의 양 강경 회장의 모습은 카메라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골프 황태자 조지 니콜슨이며 쟁쟁한 프로 골퍼들의 참석으로 이목이 더 집중됐다. 니콜슨에게는 따로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그는 다른 동료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며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해왔고 그의 축하를 마다할 필요가 없었기에 빌리등은 흔쾌히 그를 맞았다. 니콜슨으로서도 헤리에게는 찜찜한 평생의 짐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디 쿨릿지며 나오미 무어등 최고의 인기모델과 엘자 클레이본 등 유명 디자이너들이 속속 식장으로 몰려 들었다.
패션계의 샛별의 결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올 아메리칸 보이’의 출연진들이며 하킴을 통해 알게된 유 무명의 영화계 인사들이 참석해 완전히 선남선녀들의 총 집합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날 식장에서 신랑 만큼 기분 좋은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신랑 둘러리를 서고 있는 유진이었다. 유진은 결혼식이 진행 되는 순간에도 계속 눈길을 신부측 들러리를 서고 있는 스텔라에게서 떼지 않았다. 스텔라도 왕노사와 함께 홍콩에서 날아와 들러리로 참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랑인 헤리 바로옆에 또다른 들러리로 서 있던 빌리는 다음번에는 녀석들 차례구나 싶어 혼자 미소를 흘려야 했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는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 이루어 낸 뒤에야 그 문제를 신경 쓰기로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아시면 좋아 하지 않을 얘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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