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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 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20회

안동일 작

 

/ 최소한 미 국무장관은 하겠다고 큰소리 치던 자신의 모습을 존경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오늘의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 잘난 연봉에 묶여 이 눈치 저눈치 봐야 하고 경과야 어쨌건 직장 상사 협박이나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에헴 해야 하는 자신의 꼴이란 정말 거지 같이 한심한 것이었다./

 

회사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오면서 윌리는 무슨 복마전을 탈출 한것 같은 해방감을 맛 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에리베이터를 파트너의 한사람인 브렌든과 함께 타야 했던 것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자네 부서 회식 있다던데 왜 먼저 가려고?’
‘요즘 어때? 석유회사 건 골치 아프지?’
‘또 차이나 타운 가나보지?’
겉으로는 부하를 생각하는 온정이 배어 있는 듯한 말이었지만 가시가 돋혀 있는 말들이었다.
브렌든은 볼수록 아무리 그러지 말자고 해도 주는 것 없이 미운 그런 기분나쁜 작자 였다. 윌리의 먼저 부서인 국제부 상사이기도 했던 그 역시 겉으로는 웃으며 윌리를 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 못잡아 먹어 하고 있다는 것 윌리도 알고 있었다. 그와 속으로 으르렁 대개 된것은 이가영의 일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달 가영이 엉뚱한 일로 꼼짝없이 빼도 박도 못하고 검찰에 기소 될뻔한 일이 있었다. 가영 수하 한 녀석이 고속도로에서 담배꽁초를 버리다 뒤따라 오던 경찰에게 적발 된 일이 있었는데 차속에서 대마초며 쇠파이프, 단도가 나왔기에 녀석은 즉석에서 수갑이 채워 졌다. 그것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녀석이 차이나 타운 베트남 갱단과의 전쟁 때문에 수배 중에 있던 인물 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지난 사건과 관련해 이가영이 직접 쓴 메모가 녀석의 차에서 나왔기에 사건이 커져 버렸다.
새로 뉴욕으로 부임해 가뜩이나 공명심에 가득차 있던 연방 검사는 아시안 갱단 조직을 일소 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공표 했었기에 가영의 처지가 딱 해졌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윌리는 카니의 건도 있고 또 가영 개인에 대한 호감도 있었기에 연방검사와 동창이며 막역한 친구라는 브렌든에게 싫은 감정을 꾹 누르고 부탁을 넣었다.
회사에서는 연방검사와의 관계를 생각해 브렌든을 로컬 형사사건 책임자로 발령 했었다. 그는 윌리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 법을 다루는 법조인이 어떻게 그런 불법적인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나왔다. 윌리는 그의 지난 비리를 들어 은근한 협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국제부에 있을때 그는 회사 고객인 워싱턴의 군수산업체가 중동 어느나라의 고위 관리에게 제공하는 뇌물의 일부를 중간에서 쓱싹한 일이 있었는데 윌리는 그때 그를 동행 했었기에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 하고 있었다.
퇴근 무렵 막무가내로 그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책상에 무심한듯 걸터 앉아 “압둘이 요즘에도 미국에 오면 전화 하는데 다이나믹스가 너무 인색하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나라 신문기자 기억 나죠? 카림이라는 호색한 말이에요. 그 친구도 자주 뉴욕에 오던데…” 했을때 그의 똥씹은 듯한 표정이란…
그런일이 있고 나서야 브렌든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사건이 가영에게 까지 확대되지 않게 되었다. 윌리는 가영에게 진 빛을 얼만큼 갚았다는 심정이 될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브렌든은 유례없이 윌리에게 친근하게 나왔지만 속에 비수를 품고 있다는 것, 윌리도 모를 리 없었다.

“직장 다니는게 이렇게 그지 같애서야 원.”
윌리는 운전석에 앉아 중얼거렸다. 거지 같다는 말 자기 입으론 처음 내뱉어 보는 말이었다. 승혜의 18번이었다. 승혜는 얺짠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거지같다고 했다. 그게 그녀의 최대의 욕이었다.
‘그 순둥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나’
최소한 미 국무장관은 하겠다고 큰소리 치던 자신의 모습을 존경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오늘의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 잘난 연봉에 묶여 이 눈치 저눈치 봐야 하고 경과야 어쨌건 직장 상사 협박이나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에헴 해야 하는 자신의 꼴이란 정말 거지 같이 한심한 것이었다.
일단 회사에 들어 왔으니 실력을 인정 받아 파트너까지는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 이었다. 파트너가 되려면 앞으로 적어도 5-6년은 더 죽어 지내야 했다. 윌리의 직급은 이제 시니어 어소세이트에 불과 했다. 유니트 메니져, 디비젼 메니져, 어소세이트 파트너를 거쳐 시니어 파트너 까지 오르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긴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 나가고 웃 사람들에게 아부 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일 테지만, 그런 실력 자신에게는 없었다. 또 정작 파트너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무얼까 싶다.
다른 한인 변호사들 처럼 로칼에 나가 개인 법률사무소를 개업해 볼까 생각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또 이제 와서 건물이나 점포 매매 계약서나 작성해 주고 음주운전 피의자나 빼주러 유치장으로 뛰어 다닌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일에도 관록과 요령이 필요한 법인데 자신은 그 방면에 문외한 이었다.
한인사회를 발판으로 정치에 입문 하려면 한인들을 상대로한 로컬 프랙티스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건 박광식 선배의 예를 보아서도 요원한 일이었다. 중국인 까지 한데 엮을 수 있다면 또 몰라도 한인들만으로는 연방의회는 커녕 시 의회, 아니 교육위원 되기도 어렵다는 결론이 이미 나와 있었다.대학 시절 부터 그처럼 노력 했던 대학생회 결성의 주역 박변호사는 지난번 시의원 선거에서 겨우 2천표 남짓을 얻어 창피만 톡톡히 당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가영과 친하게 지내고 중국인 사회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윌리는 자위 하고 있었다. 비록 이가영이 밤의 세계에서 활약 하는 인물이고 또 자신과 그는 만나면 음탕하고 퇴폐적인 일을 서슴없이 하지만 그건 남자들이 성장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승혜의 눈을 생각하자니 그건 모두 거지같은 합리화 일 뿐이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윌리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자신이 추한 속물 같이 느껴 졌다.
그래도 이가영과 만나는 일은 즐거웠고 흥분되는 일 이었다. 그의 레파토리는 너무도 다양했다.
오늘만해도 전설적인 홍콩의 재벌이라는 왕상문옹을 소개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브루스는 왕대인에 대해 자주 언급 했었다. 홍콩 최고의 숨은 갑부인 그가 홍콩 반환에 앞서 미국으로 대거 진출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홍콩과 중국대륙을 주름잡고 있는 트라이어드 조직의 숨은 대부이며 비룡파며 뉴욕의 조직들의 후원자 이기도 했다.
윌리가 자신의 일에 대한 불만과 회의를 표시 할때면 브루스는 때려치우고 자신과 함께 비지니스를 하자고 말하곤 했었다. 그쪽으로 눈을 돌리면 할일이 산더미 같이 많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말하는 비지니스가 꼭 폭력 조직의 불법적인 일은 아니라고 그는 여러차례 강조 하고 있었다. 실제 이가영네 조직서는 봉제업, 나이트 클럽, 생선가게, 사우나, 골동품점등의 사업을 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곧이 곧대로 법을 지키며 하는 비지니스는 아닐 것이다. 세상에 곧이 곧대로 법을 지키며 사업을 하고 있는 업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윌리가 보기에 그건 요원한 요망 사항이었다. 어차피 최소의 희생,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이 체제에서 자본을 더 많이 가진 측이 그런 불법 탈법을 더 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법의 규제를 빠져나가려 몸부림 치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약자를 잡아 먹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누가 뭐래도 세상은 돈이 움직이고 있었다. 적어도 그 무렵 윌리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솔직한 생각은 그랬다.

윌리의 회사가 있는 월가에서 차이나 타운은 멀지 않았다. 브로드웨이를 타고 12블록 쯤 올라가 캔널가를 만나 좌회전을 한뒤 다시 몇 블럭만 더 가면 거기서 부터 차이나 타운이었다.
세기 초 대륙횡단 철도를 깔때 잡역부로 동원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원성을 달래기 위해 맨해턴 한 구석을 할애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뉴욕 차이나 타운, 그곳은 애환과 사연이 어우러져 있는 미국 속의 중국이었다. 윌리는 이곳에 오면 웬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지저분한 거리, 어깨를 부딛는 사람들의 물결, 상인들의 악다구니, 생선 비린내, 쓰레기 냄새, 어린시절 엄마를 따라 여러 차례 가 봤던 서울 남대문 시장이며 동대문 시장의 모습을 연상 하면서 인간의 생존력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곤 했다. 다만 거리 상점들의 간판이 온통 붉은 한자 투성이 였고 노랑머리의 물결이 그곳 보다 많다는 점을 제외 하면…
윌리는 공자 동상 앞 공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상하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모트가의 상하이 클럽은 브루스를 찾아 수도 없이 와본 적이 있는 곳이기에 눈을 감고도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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