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은 (수필가,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1> 지친 영혼의 벗, 소주와 영화 ‘세 자매’
정상가족 안에서도 가부장적 남성(남편,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이야기는 슬프게도 지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가장의 폭력은 ‘가장’이라는 이유로 자주 면피가 되어왔고, 폭력의 시간을 겪은 이들은 육신과 영혼을 갉아내는 듯한 피해의식을 꽁꽁 숨긴 채, 공포의 기억을 두덕두덕 묻은 채, 딴은 좋은 인간으로 혹은 더 강한 인간으로 살아가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희숙, 미연, 미옥, 세 자매가 격은 유년의 가정폭력은 원인과 결과가 되어, 삶 곳곳에 도사린 부조리에 맞서려는 자신만의 방식에 대한 이유로 삼았고, 유감스럽게도 누군가에겐 대물림 되었다. 영화는 특히 그녀들의 ‘먹는 일’을 향한 시선에 주목하고 있는데, 첫째 희숙은 유년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가장 빈번하게 노출된 피해자로, 성인이 되어서조차 남편과 딸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희숙은 피해자임에도 늘 남편과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마치 속죄라도 하듯 먹는 즐거움을 일체 배제하고 살아간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던 첫째는 어느 날 암을 선고 받는다. 사사건건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세상에 미안해해야만 삶이 허락된다고 여기는 듯 하다.
그 시절 아무 것도 듣지 못(안) 했으며, 세 자매 중 그나마 가장 많이 누리며 자란 듯 보이는 둘째 미연은 식(食)을 향한 집념이 대단한 인물이다. 훌륭한 엄마, 완벽한 아내, 그 누구보다 신심이 깊은 신자인 미연은 자신이 구축한 돈으로 가족애와 자매애가 돈독해진다 믿고 있으며, 그녀가 이룩해낸 명예로운 사회적 이름으로 품과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들인 상차림을 구현해낸다. 그러므로 그녀가 남편-그녀가 손수 차려주는 먹고 살던 반려존재-를 앗아간 젊은 내연녀를 향해 내뿜는 분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녀는 대화의 말미에 반드시 ‘밥을 잘 먹어야 해’라는 문장을 덧붙이고, 밥 먹듯이 기도를 한다. 미연에게는 밥도 기도도 그토록 특별한 무엇이기에 지옥과 같았던 유년을 겪으며 그녀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책임감까지 떠안긴 뻔뻔한 생부의 생일에도 거금을 들여 호사스러운 잔치를 벌인다. 또, 그녀가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날은 수도권 요지에 51평 신축 아파트 마련을 축하하는 집들이 자리였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장만하고 교회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에 그녀의 교수 남편, 그날을 완벽하게 빛내주어야 할 남편은 학교 제자 효정과의 외도로 늦은 귀가를 한다. 미연은 그런 효정을 폭력으로 응징한다. 게다가 자기가 지금껏 양육해온 남편에게 자유를 선사할 마음이 없다. 오직 기도하며 아버지를 부른다. 그녀가 자신이 믿는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독교에 그토록 깊이 빠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아버지만이 나를 기르시고 나를 먹이시는 존재여야 하므로.
막내 미옥은 술과 과자로 연명하는 존재다.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그녀는 너무 어리고 해맑아 어린 시절 목격한 폭력의 기억이 소거되었다. 그런 막내의 남자 고르는 기준은 그저 하나뿐이다. 아내와 자식을 패지 않는 착한 남자. 그녀에게 밥이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존재로 어른이 된 지금도 밥이 아닌 것들만 먹으며 산다. 오바이트와 육두문자를 상시로 뱉어내는 미옥의 입은 섭취의 입구이자 배설의 출구다. 그녀가 비로소 남편의 아내로, 남편의 아들에게 엄마로 다가가고자 결심했을 때 미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엌에 서서 밥을 차리는 것이었다. 고봉밥 위에 달걀을 얹어주며 이제는 ‘같이’ 먹자고 선언한다. 그녀에게 밥은 가족(함께)의 증명이었다.
희숙, 미연, 미옥, 세 자매는 쓰레기마냥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자아를 건지려, 어떻게 해서든 부여잡고 놓치지 않으려, 스스로에게 상처를 긋거나 종교에 집착하거나 술과 욕에 절은 일상을 살아왔다. 암에 걸린 희숙,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미연, 다른 이가 낳은 자식을 키워야 하는 미옥의 삶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고, 어쩌면 그 후의 삶도 지금까지의 시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셋이서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웃으며 ‘셀카’를 남기는 마음의 공간 정도는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만이 따스하게 다가올 뿐. 어른이란 무엇일까? 첫째 희숙의 딸 보미가 할아버지 생일 잔치에서 ‘어른이면서 왜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 씨발!’ 이라 외치던 장면이 맴돈다. 어른이 되면 어째서 미안한 짓을 하고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걸 패배라 여기는 걸까? 사과 받지 못 한 피해자의 삶은 정작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 삶이 엉망으로 망가질지도 모르는데도. 미안이라는 두 음절이 그리 어려운 일이었나 싶어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술이 존재하지만, 한국인의 고단한 역사 곳곳에는 언제나 ‘소주’가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던 날, 얼굴의 근육이 죄다 오그라들 것만 같은 독한 맛과 알코올 향에 진저리를 쳤다. 도무지 이런 걸 ‘왜’ 마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덧 나이를 먹고, 고단한 하루 끝 나도 모르게 찾는 술이 소주임을 자각한 어느 날, 그 ‘왜’를 발견했던 날, 내가 소주 맛을 달게 느끼고 있음 또한 알게 되었다. 소주의 맛은 쓴가? 아니면 단가? 글쎄다. 그 하루 내가 겪은 일상이라는 안주에 따라 소주 맛도 달라지지 않으려나. 내 마음이 자글자글 짜글이 찌개마냥 끓는 날이면 소주가 달게 넘어갈 테고,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잔을 채워 톡 털어 넣는 날엔 누군가의 쓴 감정도 함께 비우고 싶을 테니 쓴 맛이 날 거라고. 영화 <세 자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도 <세 자매>가 있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을 희숙, 미연, 미옥에게 소주를 한 잔씩 따라주며 읊어주고 싶다.
“네, 잊히겠지요,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으며,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세월이 지나면 잊히거나 하찮은 일이 돼버립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일들을 하찮은 것으로 삼아 끝내 잊혀져야지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자그마하고 투명한 글라스에 채운 소주를 쭉 들이키며 더 없이 맑아 보이는 그 액체 안에 담긴 쓴 맛을 어느 순간 달게 받아들이는 스스로를 기특하게, 혹은 안쓰럽게 여기듯이. 소주는 축하보다는 위로의 자리에 걸 맞는 술로 우리 곁을 오래 지켜왔다. 하여, 삶의 악의에 내가 진 날, 초록색 병을 떠올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뚜껑을 열 때 나는 콰지직 하는 음향, 잔에 채울 때 들리는 꼴꼴꼴 소리까지, 돌아보면 그 작은 한 병에 오감을 위로하는 액체가 담긴 술은 소주가 유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지은 작가 소개
ㅡ서지은은 걷고 말하고 듣고 읽고, 특히 쓰는 걸 좋아한다. 많은 페친을 둔 페이스북의 인플루언서다. 여러 직업을 가진 싱글워킹맘으로 최장수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의 꿈을 꾼다. 나이 마흔 다섯인 2020년, 첫 에세이집 ‘내가 이토록 평범하게 살 줄이야’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