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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뉴스

이번 낙태 문제 대법원 판결의 정밀 분석

이상돈 (전 중앙대교수, 전 국회의원)

 이번 대법원 판결(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은 정확히 말하면 5대 1대 3 판결이다

 

미국에선 낙태자유론자들이 대법관을 탄핵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낙태를 여성의 권리라고 판시한 Roe v. Wade 판결을 번복한 이번 대법원 판결(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은 정확히 말하면 5대 1대 3 판결이다. 새무얼 얼리토 등 대법관 5명이 Roe v. Wade를 완전히 폐기한데 비해 스티븐 브라이어 등 3명은 유지하자고 했다. 문제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낸 별개 의견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에 결과적으로만 찬성했다. 그래서 5대 1대 3 판결이 된 것이다.

이번처럼 중요한 사건에선 대법원장이 의견을 조율해서 가급적 많은 대법관들이 참여하는 판결을 내렸어야 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그런 노력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견해를 5명의 보수 대법관이 받아 주면 Roe v. Wade를 전면적으로 파기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번 Dobbs 판결은 임신 15주를 넘기면 임신한 여성의 건강이 위급하거나 태아가 심각하게 비정상이지 않는 한 낙태를 할 수 없다고 한 미시시피 주법에 관한 것이다. 얼리토 등 대법관 5명은 Roe v. Wade 판결이 낙태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고 판결한 자체가 잘못이라면서 번복하고 이 문제는 주 의회의 정치과정이 결정할 일이라고 판시했다.

반면에 로버츠 대법원장은 Roe 판결이 임신 기간을 3등분해서 첫 13주는 완전한 낙태 자유, 두 번째 13주는 임산부 건강에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주 정부가 규제할 수 있고, 마지막 13주에는 임산부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낙태를 금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기 때문에, 문제의 미시시피 주법은 이러한 판례와 충돌한다고 판결하면 된다는 논지를 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사법자제(judicial restraint)가 덕목임을 상기시키면서 대법원이 필요 이상으로 헌법 룰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는데, Roe 판결도 그러했다고 주장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논리는 그가 대법원장이 된 후 P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알렉산더 비켈(Alexander M. Bickel 1924~1974)을 연상시킨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인 비켈은 부모를 따라서 미국에 건너와서 뉴욕시에 정착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버드라고 불리던 뉴욕시립대학(CUNY)을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역시 CUNY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오고 하버드 교수를 하다가 대법관이 된 펠릭스 프랑크퍼터의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젊은 나이에 예일대 교수가 된 비켈은 탁월한 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1962년에 나온 <The Least Dangersous Branch>(TLDB)는 헌법해석과 사법심사에 관한 불후의 명저로 평가된다. 비켈은 의회가 만든 법률을 선출되지 않은 법관들이 위헌으로 판시하는 사법심사는 본질적으로 ‘반다수적 어려움'(counter-majoritarian difficulty)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켈은 선거라는 정치과정에서 차단돼 있는 연방법관은 ‘냉철한 재고'(sober second thought)를 통해 미국 사회의 ’항구적 가치‘(enduring value)를 구현시킬 수 있으며 구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비켈은 민권을 신장시킨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어 놓은 워렌 대법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결과적으로는 옳다고 하더라도 워렌 대법원은 진보라는 이름하에 원칙에서 벗어난 판결 논리를 구사함으로써 법원으로서의 정당한 역할에서 이탈했다고 비판해서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비켈은 사법자제론(judicial restraint), 또는 사법소극론(judicial passivism)에 서있다는 평을 들었다.

진보적인 대법원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비켈은 흔히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1971년 6월, 펜타곤 페이퍼를 게재한 뉴욕타임스에 대해 법무부가 보도 금지명령을 내려서 대법원이 언론자유의 한계를 다루게 된 NYT v. U.S. 사건에서 비켈은 뉴욕타임스를 대리해서 대법원에서 승리했다. (영화 <The Post>에 이 판결을 듣고 신문사 간부들이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켈이 NYT를 대리했기에 중간적 입장에 있던 대법관 2명(포터 스튜어트, 바이런 화이트)이 NYT를 지지해서 6대 3으로 NYT가 승리했다고도 평가된다.

비켈은 1974년 11월, 뇌종양으로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미국 법학계와 법조계에 큰 충격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비켈이 빨리 죽지 않았더라면 로버트 보크가 헌법의 원래 의도(Origin)를 강조하는 새로운 해석론을 내어 놓을 수 없었고, 또한 그 같은 헌법해석론에 따라서 Roe 판결을 번복하기도 어렵지 않았을까 한다.

– 사진 (1) 비켈의 저서. 출판 년도는 왼쪽부터 1970년, 1962년, 1975년(사후 출판). 가운데 있는 TLDB는 비켈이 37세 때 펴냈다. 오리지널은 모두 절판됐고, TLDB는 1980년대에 리프린트로 나왔다. 나는 1974~75년 서울대 대학원 시절에 이 책들을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작년에 나온 책 <시대를 걷다>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법률가는 비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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