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7>
안동일 작
워싱턴은 청년의 고뇌를 보듬으며, 벤자민 프랭클린이 파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궁정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프랑스 최고 명문가의 사위이자 직접 피를 흘리고 온 라파예트 본인이 직접 베르사유로 들어가 국왕 루이 16세를 설득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후작, 어려운 결심 해 주셨소, 프랭클린 박사님도 진작에 그 얘기를 전해 오셨더랬는데… 내가 정성을 다한 편지를 국왕폐하 앞으로 써 놓겠소.”
대륙회의는 워싱턴과 캐럴의 주도로 라파예트에게 무한한 신뢰를 담은 감사 결의안과 명예의 검을 헌정했고, 라파예트는 1779년 1월 11일 보스턴에서 최신예 프리깃함 ‘얼라이언스호’를 타고 조국 프랑스를 향해 닻을 올렸다.
워싱턴의 절절한 진심을 담은 신임장이 품속에 있었지만 그가 벨리포지에서 쥐어준 신뢰의 징표, 은 십자가 목걸이와 존 캐럴 신부가 도허레건 레서 건네 준 묵주가 무엇 보다 든든한 버팀목 이었다.
그런 버팀목 위에 찰스 캐럴이 적어준 프랑스 가톨릭 인맥의 소개징을 품에 안은 채, 스물한 살의 라파예트는 다시 거친 대서양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신대륙의 자유를 구원할 진짜 군대를 몰고 오기 위한 거룩한 출정이었다.
1779년 1월 11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Boston)항을 출발해 2월 6일, 프랑스 브레스트(Brest)항에 도착했다. 대서양 횡단에 26일이 걸렸다.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쾌속 항해를 기록했다. 대륙 해군의 얼라이언스호는 36문의 포를 탑재한 900톤급 최신예 쾌속 프리깃함이었다. 매사추세츠 솔즈베리(Salisbury)에서 건조되어 1778년에 막 취역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동맹을 기념해 함명을 ‘얼라이언스’로 (USS Alliance)명명했다.
라파예트는 출항 직전까지 피시킬(Fishkill)과 보스턴에서 앓았던 고열과 늑막염 후유증으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겨울 대서양의 습기 찬 선실을 견뎌야 했다.
배의 함장은 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으로 대륙 해군 대령 계급을 받은 피에르 랑데(Pierre Landais)였다. 랑데는 변덕스럽고 성격이 괴팍해 승조원들과 잦은 불화를 겪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라파예튼 아찔한 순간을 겪어야 했다. 선상 반란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얼라이언스 호는 출항 직전 보스턴에서 선원 정원을 채우지 못하자,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영국 해군 포로들과 탈영병들을 대거 사면 조건으로 보충했기레 승조원 200여 명 중 절반 가까이가 영국계 선원으로 채워진 화약고 같은 상태였다.
보스턴을 빠져나온 얼라이언스호는 북위 40도선 북대서양 편서풍대에 진입하면서 뒷바람(쿼터링 윈드)을 맞아 모든 횡범(Square sails)을 활짝 펴고 거대한 백색 파도를 가르며 질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북대서양의 겨울 바다의 살을 에는 북서풍은 얼어붙은 삭구(Rigging)로 인해 돛을 다루는 선원들의 손가락이 동상으로 굳어 떨어져 나가는 가혹한 환경을 동반했다. 반란 음모가 자라난 배경이기도 했다.
영국계 포로 출신 선원 일부가 프랑스 연안에 접근할 때 피에르 랑데 함장과 라파예트등을 기습해 , 대륙의회 외교문서 등을 장악한 뒤, 배를 돌려 영국령 항구로 끌고 가 막대한 나포 상금과 현상금을 챙긴디는 반란을 회책 했던 것이다. .
하지만 신이 도왔던지 이들의 거사를 불과 며칠 앞둔 1779년 2월 2일경, 반란 가담자 중 한 명이 아일랜드계 미국인 수병 윌리엄 맥린( William MacLean)에게 접근해 “함포를 장악할 포수로 합류하라”며 음모를 털어놓았다.
영국계로 위장하고 있던 맥린은 버지니아 어부 출신으로 한때 리파예트 사단의 병사였다. 그는 즉시 선실로 달려가 라파예트에게 음모를 알렸다.
라파예트와 함장은 신뢰할 수 있는 미국인 수병들을 동원해 갑판을 장악하고 주동자 30~4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저들을 쇠사슬로 묶어 선창에 감금하면서 반란은 유혈 충돌 직전에 무산되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브레스트에 닻을 내린 즉시 반란 주동자들은 프랑스 당국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라파예트는 1779년 2월 6일 프랑스 서부 브레스트(Brest) 항에 상륙했다. 2월 11일마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 처가인 생토노레가의 노아이유 저택(Hôtel de Noailles)으로 들어 아내 아드리엔과 가족들을 2년 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했다.
루이 16세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국왕의 출국 금지령을 어기고 도망쳤던 죄를 처벌해야 했지만 그는 동맹국의 신임장을 지니고 있는 사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밀항했던 죄를 묻는 형식적 조치로 국왕의 체면을 위해 처가인 파리의 노아이유 저택(Hôtel de Noailles)에서 8일간 근신(연금)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노아이유 공작이 즉각 입궁해 신임장을 국왕에게 전했다. 노아이유 공작은 바다 건너 전해오는 사위의 무용담에 진작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 그 근신기간에도 파리의 유력 귀족들과 사교계 인사들이 저택으로 줄을 지어 찾아 오며 저택은 축제 분위기였다.

근신이 풀리자마자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려갔다. 국왕 루이 16세로부터 가벼운 구두 훈계를 받은 뒤 전격 사면되었고 국왕 부부는 연일 라파예트를 호출 했다. 동맹국 최고 사령관의 워싱턴의 진심이 담긴 신임장(편지)의 영향이 컸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라파예트의 대담한 무용담에 매료되어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고, 루이 16세 역시 그를 왕실 근위 기병대(드라군) 연대장으로 임명하는 전폭적인 호의를 보였다.
파리 시내는 그야말로 라파예트 신드롬에 휩싸였다. 이런 경우 대개 그렇듯이 그의 무공은 과장되고 각색되어 알려져 있었다. 워싱턴 대신 총탄을 맞아 그를 살렸고, 패전의 전투는 한번도 없었으며 최소한 무승부였고 필라델피아 수복의 일등 공신 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사라토가의 대승도 그의 공훈이었다.
극장이나 사교계에 그가 나타나면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쳤고, 오페라 극장에서는 배우들이 그를 칭송하는 즉흥 대사를 읊었다.
하지만 라파예트의 진짜 목적은 사교계의 환호가 아닌 베르사유 내각 설득이었다.
그는 국왕과 왕비의 성화에 따른 며찰간의 베르사이유 궁전 출입이 있은 후 그는 즉각 파리 교외 파시에 머물던 벤저민 프랭클린을 찾아갔다.
1777년 봄, 국왕의 출국 금지령을 피해 스페인 국경으로 내달리기 직전 마레 지구 보마르셰의 비밀 방에서 촛불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마주했던 그 백발의 노인.
그때 프랭클린은 낡은 털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혈기만 믿고 신대륙의 눈밭으로 뛰어가겠다는 스무 살 소년 후작의 손을 지그시 쥐어주며 워싱턴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1779년, 이제는 온몸에 브랜디와인의 흉터를 훈장처럼 새긴 대륙군의 소장이 되어 파시의 저택 문을 박차고 들어섰을 때, 노인은 2년 전 그 비밀 방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호탕한 웃음으로 두 팔을 벌렸다.
두 사람은 프랑스 궁정을 설득하기 위한 역할을 분담했다. 프랭클린은 재정과 명분, 라파예트는 군사 작전과 왕실 로비.
라파예트가 베르사유와 파시를 오갈 때, 프랭클린과 나눈 기막힌 합작품 중 하나가 ‘신대륙 군대를 위한 파리 귀부인 모금 작전’이었다.
라파예트의 아내 아드리엔과 어머니 노아이유 공작부인, 그리고 프랭클린의 살롱 친구인 브리용 부인(Madame Brillon), 엘베시우스 부인(Madame Helvétius) 등 파리 사교계의 최상류층 여인들이 모였다.
라파예트는 밸리 포지에서 병사들이 살이 찢겨나간 채 눈밭을 걷던 참상을 전했고, 프랭클린은 짐짓 눈물을 글썽이며 낡은 대륙군 헌 옷 조각을 보여주었다.
감동한 파리의 귀부인들은 보석과 은식기를 내놓았고, 직접 바늘을 잡아 대륙군 장병들에게 보낼 셔츠와 외투 수천 채를 짓는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때 애덤스는 이 광경을 보며 “철딱서니 없는 귀족 놀음”이라고 혀를 찼지만, 이 모금을 통해 실질적인 방한복 수천 벌이 대서양을 건너게 된다. 이 중심에 이드레안이 있었다.
두 사람의 결연은 18세기 프랑스 최고 귀족 가문들의 철저한 정략적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1771년 라파예트가 14세, 아드리엔 드 노아이유(Adrienne de Noailles)가 12세 되던 해였다.
아드리엔은 훗날 회고록에서 열두 살 무렵 라파예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적었다.
“그는 붉은 머리에 키가 훌쩍 크고, 시골(오베르뉴) 티를 벗지 못해 궁정 예법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하던 수줍은 소년 귀족이었다. 화려하고 능글맞은 파리 귀족 소년들과 달리, 조금은 투박하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라파예트의 눈빛에 열두 살의 나는 첫눈에 깊은 호감을 품었다.”
신랑 라파예트 16세, 신부 아드리엔 14세 때 노아이유 저택의 개인 예배당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장모의 약조대로 결혼 후에도 둘은 처가 저택에 머물며 당부간 합아하지 않은 채 가정교사에게 학문과 교양을 더 배웠다. 그때 신앙심도 키워졌다.
정략결혼이 으레 쇼윈도 부부나 외도로 이어지던 당대 베르사유 풍조와 달리, 아드리엔은 라파예트의 ‘자유를 향한 순수한 열망’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라파예트가 미국으로 밀항했을 때도 처가의 비난 속에서 묵묵히 남편을 변호했고, 훗날 프랑스 혁명기 남편이 오스트리아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는 두 딸을 데리고 제 발로 적국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 옥바라지를 함께 한 위대한 여성이었다.
아드리엔은 남편의 목숨을 지켜준 성모께 감사하며 매일 미사를 봉헌했고, 남편이 다시 사지로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그의 파병 사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일마다 그녀는 남편 편이었다.
1779년 12월 24일 파리에서 두사람 사이의 아들이 태어났다. 라파예트는 워싱턴에 대한 헌정으로 아이의 이름을 ‘조지 워싱턴(Georges Washington de La Fayette)’으로 세례받게 했다. 12월 말 출생, 역산하면 1779년 3월 중순~하순경 임신된 것.
1777년 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난 뒤 2년 만에 살아서 돌아온 남편을 맞아 부부가 눈물의 재회를 나누고, 그 격정의 재회 직후(2~3월) 잉태되어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낳은 아들이 바로 조지 워싱턴 라파예트였다. 프랑스 가톨릭 귀족 가문에서 신대륙 프로테스탄트 장군의 이름을 세례명에 올린 것은 엄청난 파격이었다. 그만큼 라파예트의 워싱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두터웠던 것이다.
77년 라파예트가 미국으로 첫 출항할 당시 아드리엔이 임신 중이었던 아이는 둘째 딸 아나스타시였다. 첫째 딸은 라파예트가 미국에 있을 때 홍역으로 사망했다.
라파예트가 귀환했을 때 파리 시민들은 환호했지만, 베르젠 외무장관과 군부 수뇌부의 속내는 냉랭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의 보수적인 장군들과 귀족들은 “남의 나라 독립을 위해 왜 우리 정규군 피를 흘리냐”며 미 대륙 파병에 회의적이었다. 7년 전쟁의 패배로 영국에 대한 복수심은 불타는데, 먼 신대륙은 피부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 무용담은 훌륭하나, 신대륙에 프랑스 정규 육군을 보낸다고? 제정신인가? 해군 몇 척 띄워 영국 흔드는 걸로 충분하네. 남의 나라 독립에 우리 귀한 육군 피를 흘릴 이유가 없네.”
이때 라파예트는 벽에 부딪혀 피를 토할 것 같은 답답함을 겪고, 파시의 벤저민 프랭클린을 찾아가 머리를 맞댄다.
파시(Passy)의 르 레 드 쇼몽(Le Ray de Chaumont)의 저택 별채에 기거하던 73세의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22세의 라파예트는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이자 ‘베르사유 궁정의 문을 따주는 마스터키’였다.
프랭클린의 친손자이자 비서였던 템플 프랭클린(William Temple Franklin)이 라파예트와 거의 또래(당시 19세)였고 유난히 잘 어울렸다. 라파예트가 화려한 기병대 제복을 입고 마차를 몰아 파시로 들이닥치면, 점잖은 저택이 순식간에 활기로 뒤집혔다.
하지만 파시의 사정도 프랭클린의 처지도 만만치 않았다. 재정도 재정이었지만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그 무렵, 사일러스 딘의 후임으로 파리에 와 있던 존 애덤스(John Adams)가 프랭클린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다. 청교도적 원칙주의자 애덤스가 프랭클린의 능구렁이 같은 처세와 방탕해 보이는 프랑스 귀족 문화를 보며 “저 노친네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앙앙불락하던 바로 그 시점이다.
매사추세츠 출신의 엄격한 청교도 변호사 존 애덤스는 1778년 4월 딘의 후임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3인 전권공사의 한사람인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장부를 정리하고 서류를 검토하는 근면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런데 동료 공사인 프랭클린은 아무리 연장자고 선임 이라지만 정오가 다 되어서야 슬금슬금 기어 나와, 프랑스 귀부인들이 보낸 연애편지를 읽고, 체스를 두며, 오후 내내 살롱에서 와인과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애덤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으며 격분 했다.
“프랭클린 저 늙은이는 게으름과 쾌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온 파리의 계집들과 철학자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드니, 제정신이 아니다!”
프랭클린과 라파예트가 프랑스어로 농담을 주고받고, 베르젠 외무장관과의 비밀 회동을 속닥거릴 때, 불어가 서툴렀던 애덤스는 구석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찻잔만 덜그럭거렸다.
애덤스는 라파예트의 순수한 헌신을 인정하면서도, 특유의 의심증이 도져 일기에 툴툴거렸다. “저 어린 프랑스 후작의 머릿속엔 오직 ‘영광(Glory)’이라는 허영심뿐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프랑스 궁정 놈들은 오직 저 혈기 넘치는 귀족 녀석의 말만 듣는구나.”
라파예트가 1779년 2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또한살의 전권 공사 아서 리도 파리에 버티고 있었다. 그는 프랭클린이 프랑스인들과 희희낙락하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다며 파시의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인근 샤이오 마을에 따로 집을 얻어 살았다.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 사일러스 딘, 그리고 보마르셰를 “국고를 빼돌리는 도둑놈이자 배신자들”이라며 필라델피아 의회로 모함 편지를 매주 수십 통씩 보내고 있었다.
아서 리의 비뚤어진 렌즈로 볼 때, 스물두 살에 금의환향한 프랑스 대귀족 라파예트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센강 건너 샤이오의 음산한 방구석에서는 아서 리가 독사 같은 눈을 번뜩이며 깃펜에 독을 묻히고 있었다.
“늙은 호색한 프랭클린, 사기꾼 보마르셰, 그리고 워싱턴의 애완견 노릇을 하는 저 어린 라파예트 놈까지… 네놈들이 프랑스 국왕의 돈을 빼돌려 식민지를 가톨릭 제국에 팔아넘기려는 반역의 증거를 내 반드시 찾아내 탄핵하리라.”
존 애덤스가 청교도적 원칙과 고결한 고집 때문에 툴툴거렸다면, 아서 리는 질투와 피해망상이라는 사탄의 독기에 사로잡혀 동맹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시의 서재 한편에는 늘 메릴랜드에서 찰스 캐럴이 보낸 서신들이 놓여 있었다.
당시 프랑스 재정총괄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돈줄을 죄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노회한 외교관이었지만 금융 수치에는 어두웠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젊은 라파예트는 저돌적이었기에 성과를 냈다.
라파예트는 찰스 캐럴이 메릴랜드에서 보낸 ‘담배 담보 차관 계획서’와 도허레건 장원의 신용 구조를 네케르와 베르젠의 들고 가 코앞에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신대륙은 빈털터리가 아닙니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의 최고급 담배 수만 파운드가 프랑스 왕립 전매청으로 직송될 것입니다. 찰스 캐럴과 로버트 모리스가 보증하고 있습니다!”
얘기를 들은 프랭클린은 껄껄 웃으며 라파예트의 등을 두드렸다. “길베르, 자네가 칼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메릴랜드의 가톨릭 신사(찰스 캐럴)에게 아주 단단한 주판알을 배워왔구먼!”
정오의 햇살 아래 벤저민 프랭클린이 두툼한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홍차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서는 존 애덤스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깃펜을 사납게 놀리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눈부신 청색 기병 제복을 입은 라파예트가 성큼성큼 들어섰다.
“박사님, 찰스 캐럴 의원이 보낸 군수품 상환 보증서입니다. 네케르 재무관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게 됐습니다.”
프랭클린이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라파예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프랑스어 환호성이 서재를 가득 채우자, 구석에 앉아 있던 애덤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저 늙은 여우와 애송이 귀족 녀석이 또 궁정 여인들과 작당을 해 일을 꾸몄군. 하나님 맙소사, 청교도의 순수한 피로 세워야 할 공화국이 저 가톨릭 왕국의 은화와 비단옷에 빚을 지고 있으니…’
애덤스의 속 좁은 독백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파예트는 품속에서 찰스 캐럴의 인장이 찍힌 비밀 서한을 꺼내 프랭클린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프랭클린이 번뜩이는 눈으로 편지를 훑어보더니 벽에 걸린 십자가와 성조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묘하구려. 매사추세츠의 엄격한 칼뱅파(애덤스)는 구석에서 불평만 터뜨리고 있는데, 신대륙을 구원할 금화와 군대는 메릴랜드의 천주교도와 베르사유의 가톨릭 기사가 손을 맞잡고 끌어오고 있으니 말이오.”
스페인과 프랑스의 비밀 무기 공급 통로였던 로드리그 오르탈레즈 상사의 보마르셰와도 자주 만나 얽히며, 정규군 파병 전 대규모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막후 조율이 긴박하게 돌아갔고 소기의 성과를 오리고 있었다.

하지만 79년 여름 이 되도록 정규군 파병의 일은 전혀 진전 되지 않았다.
실은 프랑스 정부에게는 그보다 더 큰 일이 있어 도무지 그쪽으로 눈을 돌릴 형편이 아니었다.
바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이었다.
1779년 여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 66척이 영국 해협에 나타나고 3만 대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집결하자 영국 본토는 패닉에 빠졌다.
후대의 호사가들이나 전기 작가들이 라파예트를 영웅시하느라 “스물두 살 청년 장군이 런던 침공을 단독으로 기획해 궁정을 흔들었다”고 흔히 과장해 적지만, 실제 역사적 진실은 다르다. 영국 본토 침공은 라파예트 머리에서 뚝 떨어진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프랑스 왕실과 외무성이 7년 전쟁 패배 직후부터 15년 넘게 벼르고 벼르며 다듬어온 국가 차원의 ‘오랜 숙원 프로젝트’였다.
1763년 7년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직후, 프랑스의 재상이자 해군·육군 대신이었던 쇼아죌 공작(Duc de Choiseul)은 이미 1760년대 중반부터 치밀하게 영국 해안 정찰을 지시하고 ‘도버해협 기습 상륙 작전서’를 비밀리에 만들어 두었다. 드칼브가 영국에 간 것도 이 일환 이었다.
영국 본토 침공은 라파예트가 태어나 자라기도 전부터 베르젠 외무장관과 프랑스 군부 수뇌부 서랍 속에 들어가 있던 ‘국가 전략 매뉴얼’이었던 것이다. 진짜 불을 붙인 방아쇠는 스페인과 영국과의 해전 이었다. 프랑스 단독으로는 영국 해군(로열 네이비)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침공 작전이 구체화된 진짜 결정적 계기는 라파예트의 입담이 아니라 스페인의 참전이었다.
1779년 4월, 프랑스와 스페인의 ‘아랑후에스 밀약(Treaty of Aranjuez)’으로 스페인이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섬을 되찾는 대가로 영국에 선전포고하 면서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두 나라의 해군을 합치니 전열함만 66척에 달해, 영국 본토 함대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역사상 초유의 ‘연합 무적함대(Armada of 1779)’가 편성됐다.
프랑스 내각은 이때다 싶어 서랍 속에 묵혀두었던 ‘영국 상륙 작전(보보 원수 총사령관, 3만 육군 동원)’을 꺼내 들었다.
라파예트가 이 작전의 ‘발안자(Planner)’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에 가장 요란하고 매력적인 ‘선전 나팔수이자 행동대장’으로 뛰어들어 기름을 부은 인물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도 밴자민과 보마르세의 역할도 지대했다.
처음에 선봉 연대장으로 참전 하라는 명령이 나왔을 때 라파에트는 당황해야 했고 어찌하나 싶어 두 사람 멘토에게 상의 했다. 런던 침공은 라파예트도 구상했던 작전이기는 해도 자신이 미대륙의 독립전쟁이 아닌 큰 전쟁의 선봉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파예트는 1779년 5월, 베르젠 외무장관에게 긴 장문의 의견서(Memoir)를 올리며, 대규모 상륙 외에도 “아일랜드를 먼저 뒤흔들어 봉기를 유도하자”, “와이트섬이나 브리스톨, 리버풀 같은 항구 도시에 소규모 기습 특공대를 상륙시켜 도시를 불태우고 거액의 몸값을 뜯어내자” 같은 게릴라식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박사님, 보마르셰 경.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 그리고 몬머스에서 겪은 영국 놈들은 ‘신사도’와 ‘의전’이라는 가식적인 격식에 얽매여 움직임이 굼뜨기 짝이 없습니다. 저들은 늘 자신들의 앞마당은 절대 침범당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환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허장성세의 뒤통수를 치려면, 저들의 안방인 영국 해안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공포를 심어줘야 합니다!”
“훌륭해, 길베르! 루이 16세 폐하와 베르젠 장관은 체면을 중시하네. 그들에게 ‘워싱턴을 도웁시다’라고 빌면 푼돈이나 던져주겠지만, ‘선왕의 원수를 갚고 런던을 굴복시킵시다’라고 하면 국고를 열고 대군을 움직일 걸세. 본토 침공이라는 거대한 헛기침으로 영국 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프랑스 궁정의 피를 끓게 만든 다음… 판이 무르익었을 때 그 대군을 슬그머니 대서양 너머 워싱턴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걸세!”
이랬는데 얼마 뒤 정부 차원에서 3만 대군을 모으자, 명문가 출신이자 신대륙의 무용담으로 파리의 아이돌이 된 라파예트에게 “상륙 제1파를 이끄는 용기병(기병) 선봉대”라는 가장 눈부신 완장을 채워주어 전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던 것이다.
벤자민 라파예트에게 적극 참여하라고 추동했다.
“어쨌든 영국과의 전쟁 아닌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표정은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예트가 망설임을 떨치고 적극 참여 한것은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 결과가 그렇게 증명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편제를 보면 역사 속 주인공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육군 총사령관 보보 백작(Comte de Vaux)은 코르시카를 정복(1769년)하여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킨 공로로 이름을 떨친 백전노장이자, 이 침공 작전의 성공을 조건으로 ‘프랑스 원수(Maréchal de France)’ 칭호를 약속받았던 인물이다.
해군 연합함대 총사령관 도르빌리에 백작(Comte d’Orvilliers)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 66척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장악하려 했던 제독이다.
야전 사단장(중장)이 바로 로샹보 백작(Comte de Rochambeau)이었다. 육군의 실질적인 주력 공격부대인 사단을 이끌며 노르망디 르아브르(Le Havre)와 생말로 일대에서 상륙 훈련과 부대 정비를 총괄하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국왕으로부터 드라군(용기병) 기병 연대장 직위를 받아, 로샹보의 지휘권 아래이자 보보 원수 직속의 ‘영국 해안 기습 상륙 선봉대(Vanguard)’ 지휘관으로 르아브르 군영에 배치되어 있었다.
아무튼 로샹보와 라파예트는 바로 이 1779년 여름, 르아브르 군영에서 로샹보와 라파예트가 상관과 부하로 매일 얼굴을 맞대며 호흡을 맞추었다.
라파예트는 혈기만 앞선 파리의 다른 귀족 장교들과 달리, 로샹보가 얼마나 철저하게 병사들의 위생과 보급, 규율을 챙기는 진짜 군인인지를 현장에서 똑똑히 보았다. 로샹보 역시 스물두 살 라파예트가 신대륙 전장에서 겪은 숲속 기동전의 경험과 지형 지식을 겸허히 경청하며, 그가 단순한 철부지 귀족 도련님이 아님을 눈여겨 보았다.
프랭클린이 의뢰한 ‘다이아몬드 황금 의전검’이 손자 템플 프랭클린을 통해 르아브르 진영으로 전달되었을 때, 이를 지켜보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던 선배 장군이 바로 로샹보였다. 의전검은 그해 1월에 대륙회의에 의해 헌정이 결정 되었지만 파리에서 제작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전쟁이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연극입니다! 제가 파리의 살롱과 런던의 주식시장에 소문을 퍼뜨리겠습니다. ‘프랑스의 불사조 라파예트가 이끄는 정예 선봉대가 잉글랜드 해변에 닻을 내릴 것이다!’라고요. 영국 놈들은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이고, 폐하께서는 후작에게 전권을 맡기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보마르세는 이 작전의 무모함과 그 성사를 간파 했는지 요란한 연극과같은 선전전을 벌이겠다고 했다.
“주님, 저 오만한 자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얼어붙은 신대륙에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낼 진짜 구원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책이오니, 저의 이 꾀가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고 오직 평화와 자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1779년 늦여름, 실제로 영국 침공 연합 함대에 이질과 열병이 돌고 가을 폭풍이 불어 상륙 작전이 취소된다. 여름 내내 좁은 수송선과 축축한 해안 캠프에 수만 명이 갇혀 있는 사이, 함대와 진영에 치명적인 장티푸스와 천연두가 번졌고 가을 폭풍이 불어닥치면서 총사령관 보보 백작은 1779년 10월 결국 작전 취소와 군대 해산을 선언했다.
군대가 뿔뿔이 흩어질 때, 보보 백작과 파리 귀족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낭패감에 빠져 궁정으로 돌아갔고, 로샹보 역시 탄식하며 “이제 내 군인 인생도 끝이 났구나” 하고 통풍을 앓는 몸을 이끌고 고향 방돔의 영지로 낙향해 은퇴를 준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쾌재를 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세속의 눈에는 ‘작전 실패’였으나, 라파예트와 프랭클린, 보마르셰에게는 “불필요한 유럽의 피바다를 막으시고, 그 칼날을 오직 신대륙의 독립, 원정군 파병)으로 온전히 돌려놓으신 천주의 기묘한 섭리”로 읽혔던 것이다. 세 사내에게는 기다리던 ‘외통수의 순간’이었다. 이미 영국은 본토를 지키느라 대서양 건너편에 신경 쓸 여력을 잃었고, 프랑스 궁정은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도 아무런 성과 없이 군대를 해산해야 할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침공 작전의 선봉을 자처하며 판을 최대한 요란하게 키워 영국의 발을 묶어두고, 만약 저 무모한 상륙이 바다에서 삐끗하는 순간, 그 거대한 불길과 군대를 통째로 대서양 너머 워싱턴의 품으로 돌려놓는 외통수로 삼자!”는 속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가을과 겨울 내내 대륙 파병에 매달렸고 마침내 성사 시켰다.
라파예트는 베르사유로 달려가 목소리를 높였다.”본토를 치지 못했다면, 이미 집결된 이 막강한 군대를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영국 놈들이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대서양 너머 워싱턴의 군대와 합류하여 신대륙에서 영국의 팔다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군부와 국왕은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을 잃었다. 영국 침공에 쏟아부었던 에너지가 그대로 특무 원정군(Expédition Particulière)’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라파예트의 그 1년을 화려한 개선 장군의 귀족적 휴가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보다 더 잔인하게 뼈를 깎는 시간이었고 신에게 더욱 매달려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루이 16세가 마침내 정규 육군 파병 작전인 ‘특무 작전’을 승인했을 때, 프랑스 궁정의 내로라하는 귀족 장군들이 앞다퉈 지휘권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내심 스물두 살 라파예트는 자신이 프랑스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금의환향하기를 원했으나 베르젠 외무장관과 몽바레(Montbarrey) 육군경은 단칼에 잘랐다.
“자네는 대륙군에선 소장이지만 프랑스군에선 갓 대령일 뿐이네. 백전노장 귀족 연대장들이 스물두 살 애송이의 지휘를 받겠는가? 군대가 출발하기도 전에 하극상이 날 걸세.”
베르사유 사교계를 주무르던 대귀족 가문의 장군들이 물망에 올랐다. 특히 7년 전쟁의 명망가였던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이(Broglie) 공작이며 앙투아넷 왕비의 친척 에스타앵 백작(Comte d’Estaing), 샤스텔뤼 후작(Marquis de Chastellux) 마유보 백작(Comte de Maillebois)등이 사령관 자리를 차지해 가문의 영광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형적인 안하무인 귀족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사령관이 되었다면, 식민지 촌뜨기 출신인 조지 워싱턴 밑으로 들어가는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로드아일랜드의 에스탱 제독처럼 사사건건 명령에 불복했을 것이 뻔했다.
숨 막히는 지휘관 낙점의 배후에는 당시 프랑스 군부의 실세였던 몽바레 육군경(Prince de Montbarrey), 그리고 외무장관 베르젠(Vergennes)의 번쩍 깨인 듯한 현명한 수 싸움이 있었다.
“이 작전은 영국과의 전면전이다. 군사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식민지 대륙군 워싱턴의 지휘를 군소리 없이 받들 수 있을 만큼 자존심을 죽일 줄 아는 지휘관이어야 한다.”
파리의 잘나가는 귀족 장군 중 ‘워싱턴 밑으로 들어 가라’는 조건에 고개를 숙일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도 생각을 해 볼테니 지네도 숙고해 보도록 하게”
파리의 겨울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노아이유 저택의 깊숙한 사설 경당.
화려한 샹들리에와 무도회의 소음이 차단된 그 침묵의 공간에서, 라파예트는 화려한 기병대 군복 대신 소박한 모직 옷을 입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곁에는 갓 태어난 아들 조지 워싱턴을 품에 안고 산후의 핼쑥한 얼굴로 묵주를 쥐고 있는 아내 아드리엔이 함께였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부부의 나직한 라틴어 성모송이 제단 위 촛불을 가늘게 흔들었다.
베르사유에서는 귀족들이 서로 사령관 완장을 차겠다고 추잡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고, 샤이오의 음산한 방에서는 아서 리가 독을 품은 깃펜을 놀리고 있었다. 정작 신대륙의 눈밭으로 보낼 정규 육군을 이끌 지휘관의 자리.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백전노장이어야 하고, 촌뜨기 대륙군 총사령관 워싱턴의 발아래 기꺼이 자신의 계급장을 꺾어 넣을 ‘순명의 사자’는 베르사유 궁정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연약한 당신의 기사에게 길을 보여주소서. 워싱턴 각하의 군대는 지금도 얼어붙은 진흙탕에서 피를 토하고 있습니다.’
피로와 중압감에 짓눌린 라파예트가 제단 십자가 아래 이마를 대고 깊은 신음을 삼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촛불이 일순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가슴속을 서늘하게 관통하는 나직하고도 또렷한 영적 음성이 청년의 귓전을 때렸다.
‘길베르야, 궁정의 화려한 회랑을 보지 마라. 서쪽 바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낭트와 루아르 강변을 주시해 보아라. 그곳에 세상의 영예를 버리고 침묵 속에 발톱을 숨긴 채 나의 뜻을 기다리는 늙은 사자가 누워 있느니라.’
번쩍 눈을 뜬 라파예트의 숨이 턱 멎었다.
‘낭트… 서쪽 바다… 루아르?’
라파예트는 제단 곁에 무릎 꿇은 아드리엔을 바라보았다. 성모상을 우러러보던 아드리엔의 맑은 눈동자에도 말할 수 없는 영적 전율이 스치고 있었다. 부부의 손끝에 걸린 묵주알이 바르르 떨렸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번개가 내리쳤다.
베르사유의 간신배들이 권력 다툼에 눈이 멀어 잊고 있던 이름, 7년 전쟁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클로스터 캄펜의 백전노장! 화려한 살롱 정치가 역겨워 군복을 벗고 고향 루아르 강변 방돔(Vendôme)의 영지에서 통풍과 관절염을 달래며 은퇴를 기도하고 있던 노장, 로샹보 백작이었다.
서쪽 바다로 출항할 대서양 함대의 기지이자 루아르강의 물길이 닿는 그 곁에서, 세속의 탐욕을 비우고 홀로 침묵을 지키던 그 늙은 장군이야말로 워싱턴의 겸손과 짝을 이룰 하늘이 숨겨둔 유일한 거목이었던 것이다.
라파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슴속에 차갑게 박혀 있던 성패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드리엔, 주님께서 길을 여셨소!”
라파예트는 망설임 없이 외투를 걸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베르젠 외무장관과 몽바레 육군경에게로 달려갈 참이었다. (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