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2>
안동일 작
세상사, 사람의 일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일의 만남, 그리고 사람과 사물·음식의 만남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 무수한 만남 사이에서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을 바르게 하느냐 그르치느냐에 따라 한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 그러나 정작 운명적인 만남이란 인간의 얄팍한 의지와 계산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지혜와 세속의 셈법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역사의 깊은 이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섭리의 손길과 그 뜻에 오롯이 자신을 내맡긴 영혼들의 ‘순명(順命)’이 있었다. 찰스 캐럴과 질베르 라파예트의 만남, 그리고 마침내 성사될 조지 워싱턴과 라파예트의 만남이야말로 바로 그 섭리의 증좌(證左)라고 나는 믿는다.
라파예트와 찰스 캐럴은 1777년 7월 말, 볼티모어 서남쪽 도허레건 장원에서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마차 여정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도허레건 장원에서 필라델피아까지는 ‘한나절이나 하루면 갈 수 있을까’ 싶지만, 18세기 도로 사정으로는 어림없는 꼬박 이틀 반(최소 1박 2일의 강행군)의 길이었다. 장원에서 볼티모어를 거쳐 필라델피아까지는 대략 120마일(약 190km)에 달했다.
포장도로는커녕 진흙과 돌멩이가 가득했던 당시, 귀족들의 4륜 마차는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려도 하루 평균 30~40마일을 주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길목에는 거대한 서스쿼해나강이 버티고 있어, 다리도 없는 넓은 강을 마차째 나룻배(Ferry)에 싣고 건너는 데만 반나절 가까이 지체되곤 했다. 찰스 일행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쥐어짜듯 달리는 특급 강행군을 택했다. 첫날 새벽에 출발해 헤이버디그레이스(Havre de Grace) 부근 여관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밤늦게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사람이란 함께 먼 길을 여행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릇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법이다.
마차가 도허레건 장원의 거대한 참나무 숲길을 벗어나 북동쪽을 향한 거친 흙길로 접어들었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덜컹거리는 차체의 진동 속에서, 마차 안은 기이할 정도로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탑승한 세 사내 모두가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라파예트가 묵주를 꺼내 쥐자, 찰스와 드 칼브도 자연스레 묵주를 손에 쥐었다. 라파예트의 손에 들린 것은 전날 존 캐럴 신부가 축복해 건네준 묵주였고, 드 칼브의 손에 들린 것은 아나폴리스 찰스 옹이 노병에게 새로이 쥐여준 묵주였다.
꽤 긴 시간 이어진 침묵의 기도가 끝나자, 찰스 캐럴이 먼저 완벽한 파리식 프랑스어로 부드럽게 침묵을 깼다.
“후작, 존 형님(존 캐럴 신부)께 영성체를 모시고 나니 마음의 무거운 짐이 조금은 덜어지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캐럴 의원님. 프랑스를 떠나온 후 제 영혼이 이토록 온전히 안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국왕의 금지령을 어겼다는 죄책감도, 임신한 어린 아내를 두고 왔다는 번민도… 신부님의 강복과 제단 앞 성모님의 자애로운 눈빛을 마주하며 비로소 천주의 섭리임을 확신했습니다. 지난 사흘간 장원에서 홀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청년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채 맑게 정화되어 있었다. 찰스는 신앙의 동반자로서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대륙에 온 것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질베르 형제. 성모님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따뜻한 인도자이시며,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 주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마차 밖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이 땅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은 프랑스가 로마 교황의 마술에 놀아난다며 본능적인 경계심을 품고 있지요. 보마르셰의 화약과 프랭클린의 외교는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그 바다를 건너온 후작의 신앙은 끊임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이제 곧 도착할 시티 태번(City Tavern)에서 장군들과 의원들을 마주하면 그 차가운 불신과 마주하게 될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라파예트가 결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가슴팍의 묵주와 성패를 굳게 쥐었다.
“두렵지 않습니다. 성모께서 밤마다 환시 속에서 보여주셨던 저 핍박받는 신대륙 백성들의 피눈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들을 구하는 것이 저와 제 아내 아드리엔이 함께 받은 부르심입니다. 다만… 제 일천한 무용(武勇)으로 이 거친 대륙군 사이에서 과연 그 숭고한 사명을 다해낼 수 있을지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찰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양손으로 라파예트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메릴랜드의 오랜 종교적 박해를 온몸으로 버텨낸 가톨릭 거인 특유의 엄숙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기억하십시오, 후작. 천주께서는 사명을 맡기실 때 결코 당신의 기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예비하신 이 전쟁의 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을 만나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비록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나,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과 고결함이 무엇인지 아는 이 대륙의 참된 아비입니다. 후작이 그에게 순명(Obedience)하고 그의 든든한 칼이 되어줄 때, 프랑스의 군대와 아메리카의 자유는 비로소 하나의 거룩한 뜻 안에서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의원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원시림 풍경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면서도, 소년 후작은 조심스럽게 가슴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도허레건에 머무는 동안 찰스 옹의 말벗을 해드리느라, 정작 젊은 찰스와는 깊은 사담을 나눌 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757년 프랑스 오베르뉴의 유력한 무관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기사도(Chivalry)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뼛속 깊이 새기며 자란 청년이었다. 대대로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고 교회를 수호해 온 골수 가톨릭 무인 가문의 후예에게, 명예와 자유를 위해 칼을 뽑는 것은 신앙의 순결함을 증명하는 성스러운 의무였다.
그의 신앙적 뿌리는 화려한 세례명(본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리 조제프 폴 이브 로슈 질베르 뒤 모티에(Marie-Joseph-Paul-Yves-Roch-Gilbert du Motier).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사도 바오로, 브르타뉴의 수호성인 이브, 흑사병 환자를 돌본 성 로코의 이름을 겹겹이 두른 이 세례명 자체가 그가 호흡했던 유서 깊은 신앙의 토양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뒤 모티에는 라파예트가 갓난아기였을 때 7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1759년 8월 민덴 전투에서 영국군의 포탄을 맞고 스물여섯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충격 속에 어린 라파예트를 시골 영지에 둔 채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과 친정 리비에르 가문에 머물렀기에, 소년은 기사도에 엄격했던 할아버지의 훈육 아래 성장했다. 그가 유독 찰스 옹이나 드 칼브 같은 노장들을 깍듯하게 따르고 존경하는 깊은 심리적 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열세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몇 달 간격으로 잇달아 여의면서 소년은 졸지에 홀혈단신 고아가 되었다. 막대한 유산과 오베르뉴의 ‘후작’ 작위가 어린 어깨 위에 쏟아졌다. 사고무친이 된 오베르뉴의 귀족 소년들이 대개 그러했듯, 그는 열네 살에 기댈 언덕을 찾아 프랑스군에 장교로 입대했다. 국왕 근위연대(머스킷티어)에 적을 두면서도, 열한 살 때 입학했던 예수회 학풍의 명문 콜레주 뒤 플레시(Collège du Plessis, 훗날의 루이 르그랑)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의 올곧은 성품과 당당한 기품은 궁정 최고의 실력자인 장 드 노아이유 공작의 눈에 띄었다. 공작은 소년을 자신의 직속 기병연대에 배속시켰고, 이내 맏딸 아드리엔과의 혼담을 추진했다. 처음엔 장모의 반대로 혼기가 찰 때까지 미뤄졌으나, 마침내 1774년 4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열일곱, 신부 열다섯 살 때였다.
“처음 파리 저택의 경당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저는 이 여인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영혼으로 직감했습니다.”
라파예트는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도 아내 아드리엔에게 매일같이 사랑과 고백이 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도허레건을 떠나올 때도 장원의 집사장에게 프랑스로 가는 인편에 부쳐달라며 세 통의 두툼한 서신을 맡겨둔 터였다.
노아이유 가문의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시작한 것은 청년의 신앙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노아이유 가문은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최측근이자 프랑스 교회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파리 대주교를 지낸 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 추기경을 비롯해 고위 성직자들을 대대로 배출한 성골 집안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근처에 자리한 거대한 노아이유 저택(Hôtel de Noailles)은 궁정의 사치와 허영 대신 엄격한 수도원의 침묵과 기도가 흐르는 곳이었다. 저택 내 전용 경당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라파예트는 그 거룩한 일상 속에서 영혼의 눈을 떴다.
특히 장모인 앙리에트 다게소(Henriette d’Aguesseau) 공작부인은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베르사유에 숨어 사는 성녀’로 추앙받던 여인이었다. 명망 높은 대법관 앙리 프랑수아 다게소의 손녀로서 엄격한 절제와 자선을 실천했던 그녀는, 매일 새벽 미사로 하루를 시작했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수수한 옷을 걸친 채 파리의 빈민들을 돌보는 데 지참금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딸 아드리엔에게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명(Obedience)’의 영성을 뼈에 새겨주었다.
그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아드리엔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맺어진 정략결혼을 숭고한 영적 결속으로 승화시켰다. 남편이 열아홉 살 나이에 국왕의 금령을 어기고, 임신 중인 자신을 남겨둔 채 대서양을 건너겠다고 결단했을 때도 아내는 원망 대신 기도로 축복해 주었다. 남편의 심장에 타오르는 불꽃이 세속의 야망이 아닌 ‘하늘의 소명’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1779년 라파예트가 잠시 귀국해 프랑스 정규군 파병이라는 거대한 결실을 이끌어낼 때, 궁정 막후에서 가장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어준 이 역시 아내 아드리엔이었다.
마차 안에서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요한 드 칼브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처음 파리에서 브로이 공작의 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저 역시 후작께서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늙은 군인이야 화약 연기 맡으며 용병으로 구르는 게 천직이라지만, 이 안락한 베르사유의 귀공자가 사서 고생길로 뛰어든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보마르셰 경의 몽마르트르 집필실에서 후작과 부인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털어놓던 성모님의 환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낡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보마르셰 역시 처음에는 학교 후배의 무모한 객기를 극구 말렸으나, 부부가 증언한 성모의 계시 앞에 고개를 숙였고, 비밀리에 빅투아르호를 수배하며 믿음직한 호위역으로 드 칼브를 천거했던 것이다.
드 칼브의 존재는 이 은밀한 도미 작전의 핵심 기둥이었다. 바이에른 남부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나 프랑스군 장교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거듭했던 쉰여섯의 노장. 1768년 프랑스 외무장관 쇼아죌 공작의 밀명을 받고 아메리카 식민지 구석구석을 상인으로 위장해 정찰했던 그는, 대륙의 지리와 사정에 훤한 당대 최고의 ‘아메리카통’이자 영어가 완벽한 백전노장이었다. 1776년 말 사일러스 딘과 미 대륙군 소장 계약을 맺은 뒤, 브로이 공작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라파예트의 사실상 보호자이자 스승이 되어 대서양의 험난한 항해와 900마일의 남부 황야를 건너왔던 것이다.
1777년 4월 말, 루이 16세의 체포조를 따돌리고 스페인 로사헤스(Los Pasajes) 항구에서 닻을 올린 빅투아르호가 거친 대서양의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 위험천만한 항해 전체를 진두지휘한 실질적인 사령관이자 길잡이는 바로 드 칼브였다.
좁고 습한 선실 안에서 덜컹거리는 등불을 켜두고 보낸 두 달 가까운 항해 기간은, 라파예트에게는 군사 아카데미의 그 어떤 강의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하고 거룩한 수련장이었다.
라파예트는 드 칼브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혀끝이 굳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던 투박한 영어를 알파벳 기초부터 회화까지 밤마다 익혀 나갔고, 베르사유 궁정의 장식용 검술이 아닌 적의 심장을 찌르는 실전 사격술과 보병 진형 구축, 포병 화력의 집중 원리, 험준한 산악과 늪지대에서의 유격 전술학 개요까지 백전노장의 피와 땀이 밴 군사학의 정수를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혈기만 앞서던 베르사유의 소년 기사가 대양(大洋)의 한가운데서 신대륙의 흙먼지를 버텨낼 진짜 야전 지휘관으로 담금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의 독립을 위해 이 노련한 지략가를 소년의 길잡이로 예비해 두신 것 역시, 하늘의 치밀한 안배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역사는 이 위대한 노장 드 칼브의 충직한 순명을 기막힌 비극과 영광으로 증명하게 된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대륙회의 의원들은 외국인 용병들에게 질려 드 칼브를 문전박대했고, 모욕을 느낀 그는 짐을 싸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무보수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의회를 감동시키자, 드 칼브는 소년의 방패가 되어주기 위해 미련 없이 짐을 풀었다. 이내 의회도 노장의 진가를 알아보고 정식 소장 계급을 부여했다. 혹한의 밸리 포지에서 슈토이벤과 함께 군대의 뼈대를 잡았고, ‘콘웨이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라파예트의 곁을 우직하게 지켰다.
그리고 운명의 1780년 8월, 캄덴 전투.
캐럴 가문의 자제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던 ‘메릴랜드 사단과 델라웨어 연대’를 지휘하던 드 칼브는, 총사령관 게이츠가 도망친 절망적인 포위망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열한 발의 총탄과 총검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메릴랜드의 병사들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했다.
“내 용감한 메릴랜드 병사들에게 감사를 전해주시오.”
적장 콘월리스마저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던 그의 유언은, 도허레건 장원에서 맺어진 메릴랜드와 노장의 인연이 피로 맺은 언약이었음을 영원히 증명했다. 40여 년 뒤인 1825년, 노구가 되어 미국을 다시 찾은 라파예트가 당시까지 유일한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살아남아 있던 늙은 찰스 캐럴의 손을 잡고 캄덴의 드 칼브 묘역을 찾아가 머릿돌을 놓으며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씨앗이, 바로 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간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찰스 캐럴은 라파예트가 뼛속까지 진정한 기사의 품격을 지닌 청년임을 거듭 확인했다.
헤이버디그레이스의 허름한 여관에 묵을 때였다. 방이 모자라 침대가 단 두 개뿐인 좁은 방에 들어서자, 열아홉의 대귀족 후작은 주저 없이 자신이 삐걱거리는 간이침대에서 자겠노라 고집을 부려 두 연장자에게 온전한 침대를 양보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가장 먼저 일어나 자신의 침구를 반듯하게 정돈해 두었고, 식탁에서는 마부나 하인들을 대할 때처럼 시골 여관의 종업원들에게도 더없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배우겠다며 서툰 발음으로 손수 주문을 도맡았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찰스가 극구 말리는데도 묵직한 스페인 은화(종업원의 한 달 치 품삯에 달하는 거금)를 팁으로 테이블 위에 슬며시 얹어놓았다. 여관 주인과 하인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청년은 찰스를 향해 붉어진 얼굴로 나직이 속삭였다.
“찰스 의원님의 단골 여관이라 들었습니다. 의원님과 도허레건의 어르신께 입은 거룩한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는 처지인데, 이 정도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 겸손하고 속 깊은 배려에 찰스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튿날 해 질 녘, 마차는 필라델피아 도심의 북적이는 자갈길을 지나 혁명의 심장부인 시티 태번(City Tavern) 앞 광장에 멈춰 섰다. 붉은 벽돌 건물 주변으로 대륙군 장교들의 투박한 고함과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마차 문이 열리자 필라델피아의 붉은 석양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프랑스 최고 명문가의 소년 기사와 신대륙 신앙의 거인이, 마침내 독립전쟁의 거대한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오후.
시티 태번 2층, 밀실의 묵직한 오크나무 문이 열리는 순간 라파예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방 한가운데,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나이가 빛바랜 대륙군 제복을 입은 채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조지 워싱턴. 신대륙의 모든 고뇌와 운명을 양어깨에 짊어진 고독한 사령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나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사나이들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는 ‘척정(隻情)’이란 결코 길고 지루한 탐색 끝에 오는 것이 아니다. 찰나의 눈빛,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영혼의 무게를 직감하는 데는 단 8초면 충분했다.
워싱턴의 깊고 엄숙한 눈동자 속으로 무수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청년을 이끌고 문을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찰스 캐럴이었다. 몇 년 전, 개신교도들의 편견에 맞서 필라델피아 성당의 제단 앞으로 자신과 함께 나란히 걸어가 주었던 의리의 정치가. 그리고 불과 얼마 전, 참혹했던 롱아일랜드 전투의 핏빛 진흙 구덩이에서 총사령관인 자신과 주력군을 탈출시키기 위해 영국군의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온몸을 던져 산화해 간 캐럴 영지의 자제들—‘메릴랜드 400인(Maryland 400)’의 거룩한 피……! 그 붉은 피의 부채감이 워싱턴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찰스 캐럴이 보증하고 데려온 청년이라면, 목숨을 걸고 신뢰할 수 있었다.
라파예트 역시 그 거인의 눈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그럼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대리석 같은 의지를 보았다. 그것은 도허레건의 사설 경당에서 존 캐럴 신부가, 그리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찰스가 누누이 말했던 ‘신의 의인(義人)’의 눈빛이었으며, 환시 속에서 성모께서 손짓하며 가리키셨던 바로 그 ‘대륙의 아비’였다.
청년 후작의 가슴속에서 오만했던 베르사유 귀족의 자존심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오직 섭리를 향한 거룩한 순명의 불꽃만이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운명의 시계추가 8초를 가리키는 순간, 두 사나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영혼의 동반자임을 직감했다. 장내를 지배하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워싱턴이 먼저 커다란 손을 내밀며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로 침묵을 갈랐다.
“후작, 먼 길을 오셨소. 찰스 캐럴 의원이 당신을 내게 데려왔을 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내어줄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소.”
라파예트는 망설임 없이 워싱턴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스무 살 청년의 손아귀에 굳은 힘이 들어갔다.
“장군님, 저는 프랑스 가문의 영광이나 위세를 뽐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찰스 캐럴 의원께서 제게 말씀하셨듯, 저는 그저 장군님의 충직한 칼이 되어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순명하러 왔을 뿐입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두 사나이의 손이 단단히 얽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뒤편에 서 있던 찰스 캐럴은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롱아일랜드에서 피 흘린 메릴랜드 400인의 영혼이, 그리고 천상의 모후께서 엮어주신 거룩한 인연이 마침내 신대륙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실제 그날 이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조지 워싱턴은 젊고 이상주의적인 라파예트를 친아들처럼 아꼈고, 라파예트 역시 워싱턴을 평생의 아버지이자 멘토로 모셨다. 훗날 프랑스로 돌아간 라파예트가 자신의 외아들 이름을 ‘조지 워싱턴 라파예트(Georges Washington de La Fayette)’로 명명한 것은, 바로 이 8초의 눈빛 교환에서 시작된 거룩한 언약의 결실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