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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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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3)

–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천주교 영성,  캐럴과 라파예트 <1>

 안동일 작

1777년 7월 하순 어느 날, 메릴랜드 캐럴 가문의 장원 도허레건(Doughoregan Manor) 중앙 저택 현관 계단 포치 앞.

붉은 노을을 등진 채, 남루한 여행용 외투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훌쩍 큰 체구의 소년이 삼각모를 벗어 가슴에 품고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얼굴엔 긴 여정의 피로와 초조함이 역력했으나 눈빛만은 맑고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잠시 후, 찰스 캐럴이 묵직한 도허레건 저택의 목재 대문을 열고 현관 포치로 급히 걸어 나왔다. 이층 서재에 머물던 중 하인의 다급한 전갈을 받고 내려온 참이었다.

“작은 주인님, 불어를 쓰는 앳된 귀족풍의 청년이 벤저민 프랭클린 박사님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문간에 서 있습니다.”

당시 아무리 프랑스 최고 귀족이라 해도, 예고도 없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낯선 마차를 타고 불쑥 찾아온 이방인을 하인들이 안주인이나 가족이 머무는 저택 안쪽 전실(Vestibule)로 덥석 들여놓는 법은 없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낯선 외국인을 문간인 현관 기둥 앞 포치에 정중히 세워두고, 서재나 경당 쪽으로 기별하러 뛰어가는 것이 가문의 엄격한 철칙이었다.

그 전갈을 듣는 순간 찰스는 찾아온 손님이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서너 달 전, 보마르셰가 존 신부에게 보낸 비밀 서신 구석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지 않았던가.

‘…루이 르그랑의 동문이여, 요즘 파리 사교계에 모교 후배뻘 되는 열아홉 살배기 노아이유 가문의 맹랑한 후작 녀석 하나가 대륙군에 가겠다고 내 집필실 문턱이 닳도록 조르고 있네. 거물 가문의 아이라 왕실이 발칵 뒤집힐까 봐 어르고 달래 쫓아내고는 있네만, 그 눈빛만큼은 불꽃 같더군…’

당시 찰스는 그 편지를 읽고 ‘그저 파리 철부지의 치기 어린 소동이겠거니’ 하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편지 속 불꽃의 주인공이, 몇 달 뒤 남루한 옷차림으로 바다를 건너 도허레건 장원 문전 앞에 기적처럼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찰스를 마주한 소년은 반가운 기색 속에서도 타향의 긴장감에 입술을 달달 떨며, 어눌한 영어 대신 완벽한 파리식 불어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제가… 대륙회의의 찰스 캐럴 경을 뵈러 온 것이 맞습니까? 저는 오베르뉴의 질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입니다. 국왕 전하의 노아이유 기병연대 대위이기도 합니다.”

신대륙의 시골 장원에서, 유학 시절 파리 귀족들의 입에서나 듣던 가장 우아하고 격조 높은 베르사유 궁정 불어가 앳된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찰스는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게다가 소년의 손에 쥐어진 밀서의 붉은 봉랍은 분명 프랭클린 박사의 것이었다. 굳이 지금 뜯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체면이고 격식이고 따질 틈도 없이, 찰스 캐럴은 현관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타향만리에서 사지를 넘어온 이 어린 동지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오, 하느님! 바다를 건너 이 오지까지 어찌 홀로 오셨소, 후작!”

찰스는 소년의 어깨를 감아안다시피 이끌며 저택 안쪽 전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저녁 가족 기도를 앞두고 아버지 아나폴리스 찰스 캐럴 옹이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깊숙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청년은 자신의 초라한 꼴이 내심 몹시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손으로 낡은 외투깃을 만지작거리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다급히 오느라  차림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흙먼지라도 털고 들어섰어야 했는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찰스 캐럴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유려한 파리식 불어로 화답했다.

“천만에요, 후작. 자유를 위해 바다를 건너온 젊은 기사의 옷에 묻은 흙먼지는, 베르사유 무도회의 그 어떤 비단옷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잘 오셨소, 도허레건에.”

찰스가 의자의 노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우리 아버님이십니다. 인사하시지요. 아버지, 우리 독립군을 돕겠다며 파리에서 온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라파예트는 18세기 프랑스 베르사유의 최고급 궁정 예절을 뼈에 새긴 청년이었다. 남의 장원에 불쑥 찾아왔을 때 허락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간에서 예를 갖추는 것은 물론, 첫 대면에서는 상대를 한껏 높인 뒤 자신의 출신 영지와 작위, 직책을 정중히 밝히는 것이 당대 신사의 몸가짐이었다. 라파예트는 한쪽 무릎을 굽혀 정중히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

“유서 깊은 메릴랜드 캐럴 가문의 어르신을 이렇게 뵙습니다. 저는 오베르뉴의 질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국왕 전하의 노아이유 기병연대 대위이기도 합니다.”

노인은 “잘 오셨소” 하고 영어로 짧게 답하며 손을 내밀기는 했으나,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라파예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노인의 눈가에는 ‘또 베르사유의 허파에 바람 든 모험가가 한자리 꿰차러 왔군’ 하는 싸늘한 경계심이 역력했다. 게다가 유난히 시장기를 참지 못하는 노인은 이날 저녁 가족 미사가 예정되어 있어 점심을 물렸던 터라 특유의 짜증까지 섞여 있었다.

노인이 대뜸 아들에게 퉁명스러운 영어로 한마디를 던졌다.

“찰스야, 저 파리 도련님이 대체 뭐라 지껄이는 게냐? 대륙회의에 빌붙어 한자리 해 먹으려는 또 다른 건달 놈 아니냐?”

그 무렵 사일러스 딘이 파리에서 무분별하게 계약해 보낸 외국인 무관들이 물밀듯 밀려들어, 옥석을 가릴 수 없던 대륙회의와 지역 유지들에게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아버지, 이 청년 후작은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여기 아버지가 그리 신임하시는 벤저민 박사님의 추천장도 가지고 왔습니다.”

찰스는 아버지에게 편지 봉투를 들어 보여준 뒤, 프랭클린과 보마르셰의 소개장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벤자민은 청년의 어린 신부 까지 남편의 미국행에 적극적이어서 너무도 놀랍다고 적고 있었다.

노인의 눈초리가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라파예트를 살피고 있었다.

노인 맞은편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던 라파예트는 흙먼지 묻은 소맷자락을 매만지다 벽난로 위 어둑한 벽면에 걸린 성화를 발견하고는 불현듯 눈빛을 빛내며 탄성을 뱉었다.

“아니, 저 그림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달빛처럼 빛나는 성모의 순백 드레스와 푸른 망토, 그리고 그 발치를 감싼 어린 천사들의 깃털. 소년의 젖은 눈동자가 경건하게 떨렸다.

“세비야의 무리요(Murillo) 화백께서 붓을 든 거룩한 성모님이 아니십니까? 파리의 저희 처가 회랑에도 꼭 같은 성모님이 모셔져 있어, 아침기도를 올릴 때마다 무릎을 꿇곤 했습니다. 이 머나먼 신대륙의 장원에서 어머님의 같은 자애로운 눈빛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소년은 감격에 젖어 자리에서 일어나 성화 앞으로 다가갔다. 편지를 읽다 만 젊은 찰스와 안락의자의 아버지, 두 찰스가 경이로운 눈으로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망토의 유려한 곡선과 천사들의 명암 처리가 아주 빼어납니다. 노아이유 저택 회랑에 걸려 있던 그림보다 오히려 색감이 더 따뜻하고 생생합니다. 천사들의 표정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하군요. 어쩌면 무리요 화백의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를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다니요……”

소년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모자를 품에 안은 채 성모화를 우러러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지막한 성모송(Ave Maria)이었다.

안락의자의 아나폴리스 찰스 옹이 곰방대를 뻐끔거리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허어… 저 녀석 보게? 저 그림이 스페인에서 건너온 무리요의 작품임을 단박에 알아본단 말인가? 저게 우리 집안 3대가 모셔온 보물인 줄을? 눈치로 보아하니 게다가 속 깊은 녀석이 혹여 모작일지도 모를 그림을 두고,   처가의 진품보다 오히려 뛰어나다며 집안의 체면을 한껏 세워주고 있구나……’

당시 식민지의 신흥 부호들은 대개 유명 조상이나 국왕의 초상화를 걸어 과시했으나, 가톨릭 명문인 캐럴 가문은 유럽 거장들의 성화를 모셔 가문의 영적 정체성을 드러내곤 했다. 18세기 중후반 유럽과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칭송받던 가톨릭 화가가 바로 스페인의 무리요였다. 벨라스케스나 미켈란젤로의 대작들은 왕궁과 교황청에 묶여 있어 부호들이 모작조차 구하기 어려웠지만, 무리요의 성모화는 가톨릭 귀족들의 수집 1순위였다. 특히 라파예트의 처가인 노아이유 가문은 파리 대주교를 지낸 노아이유 추기경 저택에 무리요와 르 브룅의 걸작들을 수두룩하게 소장한 예술품의 보고였다.

캐럴 옹은 선친인 개척자 찰스 캐럴이 도허레건을 세우며 스페인 상인을 통해 전실에 걸어둔 저 작품이 훌륭한 모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왔다. 유럽 귀족들이 이런 명화를 식민지 촌구석에 순순히 넘겼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리 최고 명문가의 청년이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 짧은 순간은 라파예트가 철부지 건달이 아니라, 유럽 최고 명문가의 안목과 성모를 향한 깊은 신심을 겸비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한 방이 되었다. 완고한 노인의 의심이 단숨에 호기심과 호감으로 돌아섰다.

그때 복도 회랑 쪽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존 캐럴 신부가 전실로 들어섰다. 저택 안쪽 경당(Chapel)에서 제의를 갖춰 입고 분향을 준비하던 중 하인의 전갈을 받고 급히 걸어온 길이었다. 그날은 마침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나 축일(7월 26일) 무렵이었기에, 존 신부는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일가를 위한 ‘가족 평화와 순명을 위한 봉헌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제의 로만 칼라를 본 라파예트는 급히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존 신부가 감탄하며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자네가… 몇 달 전 보마르셰가 편지에서 말하던 그 불꽃 같은 눈빛의 청년이란 말인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파예트는 사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아 입을 맞추었다.

“오베르뉴의 질베르가 존 캐럴 신부님을 뵙습니다.”

소개는 아까와 달리 간략했으나 목소리에는 깊은 감격이 묻어났다.

“평화가 함께하기를(Pax vobiscum). 메릴랜드에 잘 오셨소, 질베르 형제여.”

존 신부는 라파예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강복했다. 나지막하고 유려한 라틴어와 프랑스어였다.

존 신부는 프랑스 생토메르(St. Omer)와 리에주에서 예수회 사제로 20년 가까이 생활하다 귀국한 당대 최고의 가톨릭 지성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상륙한 이래 거친 황야와 음산한 여관을 전전하며, 영국계 개신교도들의 싸늘한 시선과 언어의 장벽에 극도로 지쳐 있던 열아홉 소년 라파예트에게, 완벽한 모국어로 축복을 내리는 사제의 손길은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거룩한 위로 그 자체였다. 낯선 신대륙에서 온갖 의심과 경계에 주눅 들어 있던 소년 귀족은 존 신부의 온화한 눈빛 앞에서 마침내 모든 긴장의 빗장을 풀었다.

“후작, 참으로 수고 많으셨소. 그 험난한 대서양과 황야를 헤쳐 오느라 얼마나 고단했겠소. 자, 차차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앉읍시다.”

타향만리에서 고향 오베르뉴의 사제관을 마주한 듯 울컥한 소년은, 품속에서 낡은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꺼내 쥐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부님, 어르신… 실은 국왕 전하의 출국 금지령을 어기고 변장을 한 채 스페인 항구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세상의 법으로 따지자면 저는 탈영병이 맞습니다.”

비로소 가장 깊은 속내가 터져 나왔다. 보마르셰의 편지대로 참으로 무모하고도 거침없는 청년이구나 싶어 찰스가 존 신부를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라파예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캐럴 의원님, 그리고 신부님. 보마르셰 경의 서신과 프랭클린 박사의 소개장은 그저 제 육신을 이곳으로 이끈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지독한 체포령을 뚫고, 어린 아내를 뒤로한 채 이 거친 바다를 건넌 진짜 이유는…….”

청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왈칵 쏟아져 흙먼지 묻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

“신부님, 사람들은 저를 철없는 도련님의 치기나 영달을 좇는 모험가로 봅니다. 파리의 장인어른과 베르사유의 귀족들은 저를 미치광이라 손가락질하며 국왕을 배신한 역적이라 부르고, 처자식을 버린 파렴치한이라 수군댑니다. 하지만 신부님… 저는 헛된 명예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바다를 건너라 명하셨습니다. 제 영혼은 오직 그분의 부르심에 ‘순명(順命)’했을 뿐입니다! 이곳에 제 뼈를 묻어도 좋습니다. 부디 제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이 거룩한 전장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모님의 명이라 하셨소, 후작?”

존 신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단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오베르뉴의 성당에서 감실의 붉은 등불 아래 밤샘 기도를 드리던 중, 바다 건너 피눈물 흘리는 백성들을 구하라는 성모님의 음성이 제 심장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파리 처가인 노아이유 가문의 경당에서 신혼인 아내 아드리엔과 함께 엎드려 기도할 때도 성모님께서는 같은 계시를 주셨습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바다를 건너 신대륙의 백성들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으니 기쁘게 내조하라는 당부까지 내리셨습니다.”

찰스 캐럴과 존 신부는 깊은 침묵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 소년의 불가해한 광기가 이해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대귀족이 막대한 유산과 임신 중인 아내, 베르사유의 안락함을 팽개치고 국왕의 금령까지 어겨가며 사비를 털어 대서양을 건넌 사건은 당대인들에게도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속적인 계몽주의 사상이나 군공(軍功)에 대한 야심만으로는 그 처절한 투신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존 신부는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 통달한 예수회 사제였다. 거짓된 충동과 참된 성령의 감화를 분별할 줄 알았던 사제는, 소년의 결연한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단순한 치기가 아니라 거룩한 소명(Vocation)의 징표임을 꿰뚫어 보았다.

“질베르, 그대는 미친 것이 아니오. 하느님께서 광야의 다윗을 부르셨듯, 바다 건너 그대를 이 메마른 대륙의 방패로 부르신 것이오.”

곁에서 지켜보던 찰스 캐럴 역시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이 소년은 단순한 지원병이 아니라, 하늘이 대륙의 자유를 위해 베르사유의 심장에서 빼내어 보낸 섭리(Providence)의 도구였다. 대륙회의의 냉대와 외국인에 대한 불신을 뚫고, 찰스 캐럴이 자신의 모든 정치적 명운을 걸어 라파예트를 워싱턴의 품에 안겨주어야 할 내적 당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영국과의 7년 전쟁에서 잃고 고아로 자라며 기사도의 신앙을 뼈에 새겼던 오베르뉴의 후예, 그리고 콜레주 뒤 플레시를 거치며 루이 르그랑의 예수회 학풍을 호흡했던 소년 라파예트는 그렇게 메릴랜드의 가톨릭 거인들과 영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었다.

이어 찰스가 노인에게 프랑스어로 오간 대화의 전말을 나지막이 영어로 전했다.

“아버지, 이 젊은이는 성모님의 계시를 보았다고 합니다. 신대륙의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에 오직 순명하기 위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온 것입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아나폴리스 찰스 옹의 돋보기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부를 일구고 교회를 수호해 온 노부호의 심장에 ‘계시’와 ‘순명’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노인은 말없이 곰방대를 내려놓고, 청년을 향해 깊은 경의의 눈빛을 보냈다.

“숙부님, 오늘 저녁 가족 미사에 이 젊은 후작을 함께 참례시키시지요.”

존 신부의 제안에 아나폴리스 옹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여부가 있겠나! 내 처음 문간에 들어설 때부터 저 청년이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미카엘 대천사인 줄 진작에 알아채고 있었지. 천사가 미사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조금 전까지 불란서 건달이라 혀를 차던 노인의 천연덕스러운 호통에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전실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저택 깊숙한 비밀 사설 경당의 문이 열렸다.
존 신부가 제대를 향해 서서 묵직하고 신비로운 라틴어로 기도를 시작했다.

“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흙먼지 묻은 여행복 차림의 라파예트는 그 장엄한 라틴어의 울림 속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격을 맛보았다. 성경 봉독의 순간, 존 신부는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따뜻하고 명징한 영어로 말씀을 선포했다.

라파예트는 묘한 경이로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제대 위에서 존 신부는 로마 교회가 천년 넘게 지켜온 가죽 장정의 라틴어 불가타(Vulgate) 성경을 펼쳐두고 거룩한 제례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 아래 무릎을 꿇은 아나폴리스 옹과 영지의 일꾼들이 쥐고 있는 책은 놀랍게도 런던에서 인쇄된 개신교도들의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이었다.

‘가톨릭의 제대 앞에서 적들의 성경을 쥐고 기도한단 말인가?’

청년 후작의 당혹감을 눈치챈 찰스 캐럴이 나직한 불어로 귓가에 속삭였다.

“후작, 놀라지 마십시오. 신대륙 식민지에서 로마의 영어 성경을 구하기란 바다에서 황금을 낚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껍데기가 누구의 손을 탔든, 천주의 말씀이 백성들의 귓가에 먼저 닿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 믿으시는 분입니다.”

교리의 엄격한 형식보다 영혼의 구원을 앞세우는 거친 황야의 신앙. 라파예트는 촛불 아래 빛나는 투박한 성경책을 보며, 자신이 구하러 온 이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모진 고난 속에서 믿음의 불씨를 지켜왔는지를 가슴 저리게 깨달았다.

영성체의 시간, 라파예트는 홀린 듯 제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었다.
“Corpus Christi (그리스도의 몸).”
사제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성체가 입안에 닿는 순간, 소년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입을 벌리자 “그리스도의 몸” 하는 소리와 함께 정말 천주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 왔다. 얼마만인지 몰랐다. 뜨끈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순간 리피예트의 몸에서 광채가 났다.
그를 바라보며 찰스 캐럴은 눈앞의 청년은 천상의 불꽃에 온몸이 타오르는 ‘천주의 기사’ 그 자체라고 확신했다.
창밖으로 메릴랜드의 거친 바람이 불어닥쳤지만, 경당 안의 촛불은 라파예트의 머리 위를 푸르스름하고 거룩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사가 끝난 뒤, 일동은 중앙 식당의 정찬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또 한 사람의 묵직한 손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로 쉰여섯 살의 백전노장, 요한 드 칼브(Johann de Kalb) 남작이었다.

찰스 캐럴은 미사가 시작되기 전, 소년이 간략히 털어놓은 험난한 여정을 듣자마자 “그런 귀한 어른을 어찌 볼티모어 여관방에 홀로 둘 수 있겠는가”라며 곧장 도허레건의 든든한 마차를 볼티모어로 급파했던 것이다. 여관에서 “도련님이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았나” 초조하게 파이프를 태우던 드 칼브는 짐 속에 아껴두었던 단정한 프랑스군 정복으로 갈아입고 찰스의 정중한 마차를 타고 장원에 도착해, 식탁에 합석한 참이었다.

드 칼브는 첫 대면에서부터 자신에게 붙은 ‘남작’이라는 칭호가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사일러스 딘과 브로이 공작이 주선한 명예상의 직함일 뿐, 실은 바이에른 농가 출신의 투박한 군인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아 캐럴 가문 사람들의 깊은 호감을 샀다.

자리가 무르익자 드 칼브는 메릴랜드산 구운 고기와 마데이라 와인을 들이켠 뒤, 와인잔을 쥔 채 라파예트를 바라보며 진솔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찰스 경, 사일러스 딘의 임관장을 품에 넣고 파리를 떠날 때만 해도, 제 임무는 그저 브로이 공작의 당부대로 베르사유의 젊은 귀족 한 분을 안전하게 필라델피아 의회까지 호위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서양의 거친 풍랑 속에서,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늪지대를 함께 걸으며 저는 보았습니다. 라파예트 후작은 안락한 궁정으로 돌아갈 다리를 스스로 불살라버린 참된 기사(Chevalier)였습니다. 그 불꽃 같은 헌신을 목도한 순간, 쉰을 넘긴 늙은 군인인 저 역시 이 젊은 후작의 뒤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 거룩한 전장에서 그분의 곁을 지키는 것이, 이제는 제 마지막 군무이자 하늘이 제게 내린 소명이라 믿고 있습니다.”

식탁 건너편에서 라파예트가 얼굴을 붉히며 “장군님, 그만하십시오”라며 어쩔 줄 몰라 손사래를 쳤다.

존 신부가 묵직한 미소를 띠며 드 칼브에게 물었다.

“바이에른 출신이시라 들었는데, 그렇다면 고향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셨겠군요?”

쉰여섯의 노장이 투박한 손으로 군복 옷깃 안쪽에서 낡은 묵주 하나를 슬며시 꺼내 매만졌다.

“신부님, 저는 평생 전장을 떠돈 거친 군인이라 후작처럼 거룩한 환시를 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시골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던 날 어머니가 쥐여주신 이 묵주만큼은, 화약 연기 자욱한 전장을 구르면서도 단 한 번도 품에서 뺀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 늙은 군인을 이곳 신대륙까지 끌고 오신 데도 분명 깊은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모의 불꽃을 품은 소년 기사와, 어머니의 낡은 묵주를 품고 전장을 버텨온 독일 노장. 식탁에 마주 앉은 이들의 영적 깊이에 아나폴리스 찰스 옹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술잔을 채워주었다.

더욱이 드 칼브는 과거 아메리카 대륙을 정찰했던 경험 덕에 영어가 대단히 유창했다. 젊은 찰스와 존 신부가 라파예트와 프랑스어로 영적 담론을 나누는 동안, 드 칼브는 그 내용의 요지를 구수한 영어로 통역하며 아나폴리스 옹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소외될 뻔했던 노인은 마음에 쏙 드는 노병 통역관을 얻어 신바람이 났다.

라파예트와 드 칼브는 사흘간 도허레건 장원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의 여독을 온전히 풀었다.

처음엔 “저 불란서 건달 놈”이라 혀를 차던 완고한 노(老) 찰스 캐럴 옹은, 사흘 동안 군더더기 없이 예의 바른 소년의 성품과 제 친손자뻘 되는 아이가 처자식과 대궐을 버리고 대서양을 건너온 기막힌 사연을 곱씹으며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천주와 성모를 향한 소년의 순수한 ‘순명’이, 평생 박해의 풍파를 견뎌온 늙은 부호의 메마른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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