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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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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82)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여의도에서 벨리포지 까지

 안동일 작

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소설 전개에서 잠깐 벗어나 필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물론 소설과 깊이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쩌다가 왜 이 소설이 미국 독립전쟁에 이처럼 많은 분량을 할애하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는 미리 일러두고, 필자 자신에게는 정리를 통한 구상이 되는 그런 이야기이다.

2026년 9월 2일, 필자는 독립군 삼각모자를 쓰고 밸리 포지 평원에 섰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난 뒤라 유난히도 푸르른 창공 아래, 흰 뭉게구름이 푸짐하게 떠 있는 너른 벌판을 기시감(旣視感) 속에서 걸으며 조지 워싱턴과 찰스 캐럴을 떠올렸다.

250년 세월의 격폐(隔閉)를 넘어 그들의 훈향(熏香)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벌판 저편에서 삼각모자를 쓴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도 했다. 바로 직전에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본 기록 영화의 잔상 때문이기도 했다.

20분 남짓한 영화에 찰스 캐럴은 딱히 등장하지 않았다. 의회 조사단이 도착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근엄한 중년의 의원들이 통나무 막사를 둘러보는 장면은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배우들의 생김새로 보아 내가 아는 캐럴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았다.

방문자 센터에서 상영하는 공식 오리엔테이션 영화의 제목은 《인내의 결단: 밸리 포지 주둔(Determined to Persevere: The Valley Forge Encampment)》이었다. 비교적 근래인 2008년에 제작된 것인데, 출연 배우들과 실제 역사적 인물의 싱크로율에 꽤 많은 신경을 쓴 듯했다.

내용이야 익히 아는 바였지만, 당시 대륙군의 복색과 무기, 그리고 엄혹했던 정황을 다시금 각인시켜 준 시청각 자료였기에 생생한 천연색 잔상으로 뇌리에 깊이 남았다.

영화는 독립군 병사들이 1777년 12월 19일, 밸리 포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부상당하고 병들고 지친 모습들이었다. 그해 가을, 대륙군이 영국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해 당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빼앗기기까지의 과정이 지도와 도표로 간략히 설명되었다.

워싱턴 장군이 겨울 주둔지로 밸리 포지를 선택한 까닭은, 영국군이 점령한 필라델피아를 압박하면서도 기습 공격을 막아내기에 유리한 고지(산등성이)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륙의회가 피신해 있던 펜실베이니아 내륙(요크)을 영국군으로부터 지켜내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지형적 특성도 잘 설명되었다.

이때부터 몰아친 혹독한 추위와 참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병사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주변 숲의 나무를 베어 약 2,000동에 달하는 통나무 막사(Hut)를 지어야 했다. 보급망의 붕괴로 신발도 없이 맨발에 넝마를 감은 채 눈길을 걸었고, 식량과 옷이 없어 굶주림과 저체온증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군대 내에 장티푸스, 이질, 천연두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병력의 절반 이상이 병상에 눕게 된다.

군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워싱턴 장군은 의회에 강력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영화에서는 의회 조사단이 바로 이 때문에 파견된 것으로 설명된다. 아주 잠깐 두 명의 의원이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데,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장점이 배우와 실존 인물의 높은 싱크로율임에도 아무리 뜯어보아도 찰스 캐럴의 모습은 아니었다. 영화는 찰스 캐럴보다는 워싱턴 장군의 부인에게 희망의 초점을 맞춘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 실질적인 거액의 군자금을 들고 찾아온 가톨릭 부호 찰스 캐럴의 결정적 일화는, 아직 대중적인 정사의 영역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고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1778년 2월 초 마사 워싱턴 여사가 눈길을 뚫고 밸리 포지 본부에 도착한다. 초상화속 실물과 정말 흡사한 마사 여사와 장군 및 장교 부인들이 합류해 병사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고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참혹했던 전반부의 시련을 지나  “절망’ 병영에 ‘희망’이 불어오는 전환점이 마련된다.

마사 여사의 등장 이후 후반부에는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장군이 병참감을 맡으며 보급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프랑스와의 동맹 소식이 날아들며, 프로이센 출신 슈토이벤 장군의 체계적인 훈련이 시행되면서 오합지졸에 가깝던 대륙군이 강력한 정규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묘사된다.

그중에서도 나를 전율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바로 헨리 녹스 장군의 포병대가 일사불란하게 대포 쏘는 연습을 하는 대목이었다. 이 이야기는 잠시 후 자세히 전하겠다. 예산 때문이었겠지만 군인 엑스트라가 매우 적었던 점은 옥의 티 였으나 훌륭한 기록물이었다.

영화는 1778년 6월, 밸리 포지를 나선 대륙군이 몬머스(Monmouth) 전투에서 영국군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 마침내 필라델피아를 수복했다는 자막과 함께 끝을 맺는다. 밸리 포지야말로 대륙군이 고난 속에서 진정한 부활을 일궈낸 요람이자, 현대 미 육군의 실질적 탄생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나는 상영관에서 나와 지하 기념품점으로 가 가죽 삼각모를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아내는 “그걸 대체 언제 쓰려고 사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적어도 오늘 밸리 포지에서 쓰고, 또 해마다 독립기념일에 쓰면 된다”며 호기롭게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 밸리 포지 동남쪽 통나무 막사 터 부터 앤서니 웨인(Anthony Wayne) 장군의 기마 동상이 우뚝 선 곳까지 드넓은 평원을 걸었다.

방문자 센터에서 받은 트레일 지도를 펼쳐 든 순간, 나는 불현듯 서울의 여의도를 떠올렸다. 밸리 포지 평원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여의도를 연상시켰다. 공원 전체를 둥글게 도는 순환 도로가 있었고, 차로 도는 데만도 30분 남짓 걸린다고 했다. 나중에 면적을 자세히 비교해 보니 여의도보다 훨씬 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지 기준의 여의도와 비교하면 거의 5배에 달하는 광활한 규모였다.

서울 여의도는 주거지와 금융·상업지구를 합쳐도 약 2.9㎢(약 88만 평 / 716에이커)이고, 한강 둔치까지 다 합쳐야 4.5㎢(약 136만 평) 수준이다. 강물 수면과 밤섬 일부를 포함하는 법정동(여의도동) 전체를 다 잡아야 8.4㎢ 남짓이다.

반면에 밸리 포지 국립역사공원은 약 14㎢(약 5.4 sq mi / 3,500에이커 / 423만 평)에 이른다. 여의도 실제 육지 면적의 무려 4.8배에 달하는 크기다. 미국인들의 스케일답게 널찍하게도 보존해 놓았다.

밸리 포지는 조지 워싱턴 장군의 대륙군 1만 2천여 명이 혹한의 겨울 동안 실제로 주둔하고 참호를 팠던 광활한 구릉지대 전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에, 외곽 투어 도로(Outer Line Drive 등)를 차로 한 바퀴 도는 데만도 30분이 꼬박 걸린다. 벨리포지가 처음부터 이런 평원은 아니었다.

1777년 당시 밸리 포지(Valley Forge)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농촌이자 번창하던 제철 마을이었다. 오늘날 처럼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로 변한 것은 대륙군 1만 2천여 명이 들어와 겨울을 나면서 비롯된 일이다.

본래 이곳은 18세기 초부터 웨일스계 퀘이커(Quaker) 교도 농민들이 정착했던 곡창지대였다. 완만한 언덕마다 밀과 호밀, 옥수수를 재배하는 비옥한 밭과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고, 반경 몇 마일 안팎으로 튼튼한 2층 석조 농가와 육중한 헛간들이 흩어져 있었다.

‘포지(Forge)’란 골프를 치는 이들에게 ‘포지드 아이언(단조 채)’이라는 단어로 익숙하듯 쇠를 달구고 두드리는 대장간이나 제철소를 뜻한다. 이곳 계곡에 제철 공장(Mount Joy Forge)이 있었기에, 밸리 크릭(Valley Creek)의 ‘밸리’와 제철소의 ‘포지’가 합쳐져 ‘밸리 포지’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대륙군이 도착했을 당시 마을 중심부는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대륙군이 주둔지로 찾아오기 불과 석 달 전인 1777년 9월, 영국군이 이곳에 있던 대륙군 군수 창고를 급습해 약탈하고 제철소와 주요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역사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독립군이 주둔했던 참호선과 대연병장(Grand Parade)의 웅장한 지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후대에 지어진 공장과 민가를 철거하고 거대한 구릉 초원 형태로 복원·보존해 두었기에 오늘날의 대평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반면 서울의 여의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모래벌판 황무지에서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최심장부로 탈바꿈했다. 구릉 산이었던 양발산은 동양 최대 규모의 석조 의사당으로  둔갑했고,  갈대밭 자리에는 거대한 마천루들이 숲을 이루었고, 강변은 정비되어 사시사철 불야성을 이루는 도심 공원이 되었다.

한쪽이 역사적 기억을 지키기 위한 ‘보존과 회고’의 공간으로 남았다면, 다른 한쪽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눈부신 압축 성장을 웅변하는 공간이 된 셈이다. 바로 내가 온몸으로 겪었던  모국 한국과 지금 살고 있는 미국 상황의 한 오마쥬다.

아무튼 그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가슴 밑바닥에서 묘한 데자뷔(기시감)가  용솟음쳤다. 바로 소년 시절 여의도 모래벌판을 걷던 그때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반세기도 더 전인, 정확히 52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유년의 기억이 기록 영화 속 대포 쏘는 장면을 계기로 문득 깨어나더니, 밸리 포지의 광활한 평원에 서자 비로소 “아, 그랬었구나!” 하는 깊은 탄식과 함께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에 매혹되어 탐구하며 친미파, 지미파(知美派)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50여 년 전 여의도 벌판에서 비롯되었다. 밸리 포지를 빼닮았던 그 황량한 벌판을 쏘다니던 10대 소년 시절, 길가 헌병부대 막사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대포 모형을 마주한 뒤로 독립전쟁사를 그 시절 나이로서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파고들었던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74년, 나는 여의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고 고교평준화(속칭 뺑뺑이 1기) 추첨으로 배정받은 학교였다. 그 시절 여의도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이름도 찬란(?)했던 거대한 아스팔트의 ‘5·16 광장’이 막 닦여 버스 정류장이 들어서 있긴 했으나, 동쪽 끝에는 시범아파트와 우리 학교만 덩그러니 서 있었고 서쪽 에는 국회의사당 돔이 한창 올라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두 지점 사이는 온통 잡초와 갈대가 무성한 모래벌판이었고, 저 멀리 몇몇 아파트 단지가 뼈대를 올리던 황량한 풍경이었다.

방과 후면 콩나물시루처럼 미어터지는 학교 앞 정류장을 피해, 우리는 광장 쪽 버스 정류장까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터덜터덜 걸어가곤 했다. 족히 20분은 걸리는 모래바람 이는 길이었다.

그 길을 언제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단짝 친구가 바로 민철이었다. 1학년과 2학년 때 내리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얼마나 붙어 다녔던지, 2학년 무렵부터는 아예 ‘용돈 공동체’를 결성했다. 각자 집에서 받아오는 한 달 용돈을 한 주머니에 털어 넣고 한 녀석이 번갈아 관리하면서, 하굣길에는 주머니에서 버스 토큰 딱 두 개만 꺼내 쥐고 나란히 버스에 오르곤 했다. 혼자 몰래 빵을 사 먹거나 딴짓을 하며 쏘다니는 건 우리 사이의 불문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집안이 꽤 넉넉했던 민철이가 나보다 두 배나 많은 용돈을 내놓으면서도 군말 없이 그렇게 지냈다.

그 녀석이야말로 어려서부터 뼛속까지 ‘친미’ ‘미국통’이었다. 의대 졸업하자 마자 미국으로 가 전문의를 딴  누나의 초청으로 온 가족이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1학년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기는 머지않아 미국으로 떠난다고 입버릇 처럼 떠벌리곤 했다. 머리도 영특했던 녀석은 일찍부터 ‘미국 바람’이 들어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했고, 입만 열면 미국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누나가 바다 건너 부쳐준 비틀즈, 키스(KISS), 제스로 털(Jethro Tull)의 LP 원판(Original Press)을 애지중지 자랑하곤 했다. 나중에는 내 몫까지 챙겨 공수해 주던 착한 녀석이었다.

1974년 여름방학 때, 우리는 웅장한 윤곽을 드러내던 국회의사당 신축 현장에 사흘간 학생 동원으로 차출되었다. 교련복을 입고 교련 선생님의 감시 아래 뙤약볕이 내리쬐는 의사당 앞마당에서 온종일 굵은 자갈을 골라내는 중노동이었다. 비 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자갈을 주워 담던 민철이가 이마를 훔치며 불쑥 내뱉었다.

“야,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대한민국 고등학교 하루빨리 뜬다. 코리안 하이스쿨, 썩(Korean high school sucks)!”

등 뒤에서 교련 선생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건지 아니면 기가 차서였는지 못 들은 척 묵묵히 지나갔다. 훗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권상우가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 하고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30년 전 여의도 의사당 바닥에서 거친 영어를 내뱉던 민철이 녀석이 떠올라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방과 후, 여느 때처럼 재잘거리며 광장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벌판 중간쯤 자리 잡은 헌병부대 막사 앞에 난데없이 낯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야포였다. 그 부대는 중대 규모의 헌병대였는데, 군 주요 행사에 동원되거나 각급 부대 조경용으로 쓰이던 물품들의 중간 집하장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6·25 때 쓰였다는 훈련기가 마당 한구석에 세워져 있더니, 훗날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전시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철조망 너머로 까치발을 딛고 들여다보며 “야, 저 대포는 대체 어떻게 쏘는 걸까?” 하고 웅성거리고 있는데, 철망 안쪽에서 한 헌병 형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야, 이민철! 너 들어와서 구경하고 싶어?”

“네! 들어가서 보고 싶어요!”

명찰에 적힌 녀석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우리는 형이 열어준 철조망 사립문을 통해 신나게 부대 안으로 들어가 대포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헌병 형은 씩 웃으며 자신 가슴의 명찰을 톡톡 쳤다. 말년 병장이었던 그의 이름은 ‘이철민’이었다. 대낮이라 부대 안이 한산하기도 했거니와, 거꾸로 뒤집힌 이름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철민이 형이 위병 근무를 서거나 마음씨 좋은 장교들이 있는 날이면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영내에 들어가 이것저것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곤 했다.

대포 곁에는 큼지막한 볼링공만 한 쇳덩이 탄환도 함께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얕은 지식으로는 그 거친 포신으로 포탄을 어떻게 장전하고 쏘아 올리는지 요령부득이었다. 그런데 이번 밸리 포지 기록 영화 속에서 병사들이 화약을 다져 넣고 뇌관을 점화하는 훈련 장면을 지켜보며, 실로 50년 만에 유년의 호기심을 완벽하게 풀어낸 것이다.

그 시절 어린 소견에는 제아무리 무거운 쇳덩이라 한들, 흙바닥에 떨어져 쾅 하고 터질 것 같지도 않은 쇠공 하나 날아간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살상력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민철이가 신이 나서 두꺼운 백과사전을 뒤져 알아낸 지식을 내게 털어놓았다.

“야, 그 대포알은 날아가서 공중에서 터지는 게 아니래. 진짜 볼링공처럼 적군 대열 앞 땅바닥을 향해 낮게 쏘는 거야! 그럼 그 무거운 쇳덩이가 땅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면서 적군 보병들의 발목과 정강이를 모조리 부러뜨리고 지나가는 거래. 밀집 방진을 짠 군대에는 그게 제일 무서운 무기였대!”

듣고 보니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한 이치였다. 녀석은 대포 모형이 여의도 헌병대에 서 있게 된 내력까지 조사해 들려주었다. 미국은 1976년 독립 200주년(Bicentennial)을 앞두고 197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 미군 주둔지와 우호 동맹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펼쳤는데, 주한미군(USFK)과 한국군 지휘부 간의 군사 외교 및 친선 교류 차원에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주력 야포 축소 모형과 실물 크기 복제품(Replica)을 한국군 주요 헌병·의장 부대에 우정의 상징으로 기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료를 추적해 보니 당시의 대포는 미 육군 조병창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상징물이었다. 포신은 주철이나 청동 주물로 뜨고, 포가(포대 마차)는 단단한 참나무로 제작된 이 야포들은 미국 버지니아주 포트 리(Fort Lee)나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의 조병창 등에서 정밀하게 복원·제작하여 보급하던 것이었다. 겉 모습만큼은 밸리 포지에서 실제로 쓰였던 그 야포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실제로 1777년 밸리 포지의 혹한을 견뎌내던 바로 그 무렵,  피에르 보마르셰가 세운 위장 회사 ‘로드리그 오르탈레즈(Rodrigue Hortalez et Cie)’를 통해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프랑스의 그리보발(Gribeauval) 청동 야포들이 보스턴과 포츠머스 항으로 대거 반입되었고, 이것이 각 전선의 대륙군 포병대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은 공인된 역사적 기록이다.

민철이와 나는 그날 이후 미국 독립전쟁사에 흠뻑 빠져들었다. 녀석은 누나를 졸라 공수한 『The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두툼한 영문 원서를 끼고 다니며 읽었고,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대계』전집의 해당 단원만 달달 외우다시피 하던 내게 한껏 으스대곤 했다.

“거기엔 이런 생생한 디테일은 안 나오지?”

녀석은 잘난 체를 하며 원서 속 독립전쟁 비화들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당시 미국은 건국 2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온 나라가 독립 혁명의 회고 열기로 들끓던 시기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서점가에서 대중과 독서광들의 손에 가장 널리 들려 있던 대표적 개설서로는 존 R. 올든(John R. Alden)의 명저 『A History of the American Revolution』(1969)이 있었는데, 아마도 민철이 누나가 서점에서 골라 보내준 책이 바로 그것 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자랑 같지만 반에서 가장 머리가 트였던 축에 속했던 민철이와 나는 마냥 어울려 다니며 분식집과 미니 당구장만 전전하던 철부지들은 아니었다. 둘 다 지적 허영심과 활자 중독으로 똘똘 뭉친 독서광들이었다. “공부는 대체 언제 하느냐?”는 부모님과 어른들의 매서운 눈총 속에서도, 우리는 일본 역사를 다룬 방대한 대하소설 『대망(大望)』과 『료마가 간다』를 탐독하며 전국시대와 메이지 유신의 흑막에 대해 아는 체를 꽤나 하고 다녔다. 지금도 가토 기요마사, 다테 마사무네, 이시다 미쓰나리 등 전국시대 장수들의 이름을 한자로 줄줄 적어낼 수 있고, 사카모토 료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풍운아적 행적을 훤히 꿸 정도다.

그러던 차에 여의도 벌판에서 미국 독립군의 대포를 마주하고는, “야, 일본 역사보다 미국 역사가 우리 민족의 운명에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냐!” 하며 미국 독립사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 다져진 지적 편력과 사유의 축적이, 반세기가 흐른 지금 대하역사소설 『순명』을 집필하는 펜 끝에서 도도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셈이다.

원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과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에 얽힌 문학사적 맥락과 당대 한국 지식인 사회에 미친 파장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굴뚝같지만, 오늘은 지면 관계상 아껴두려 한다.

다만 일본에서 우리의 김구 선생 못지않은 존경을 받는 사카모토 료마의 ‘자유롭고 호방하며 미래를 먼저 내다본 혁신가’의 이미지가 실은 시바 료타로의 유려한 필력이 빚어낸 문학적 창조물에 가깝다는 후대의 평가는 소설가인 내게 큰 용기를 주고 있다. 이 사실과  장수를 지장(智將)·용장(勇將)·덕장(德將)으로 나눌 때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인내하는 덕장이라는 『대망』식 인간학의 도그마가, 조지 워싱턴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를 바라보는 내 시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겠다.

민철이는  80년 봄이 돼서야 몽매에도 그리던 미국 행에 올랐다. 그땐 초청 이민 참 오래 걸렸다.   나는 81년 가을에 뉴욕에 도착 했다.  오자 마자 민철이가 살고 있던 덴버 오로라로 날아가 한달 쯤 미국을 속속들이 알겠다며 같이 쏘다녔다. 덴버대학 도서관을 제일  많이 갔지만 영화관에 가서 처음 나온 수퍼트랙 돌비 영상 음악을 만끽 했고 러브힐이던가, 스키장도 처음 갔고 민철이 여자 미국 클라스 메이트 집에서 멋진 크리스 미스 파티도 하고 그랬다. 참 내 미국 운전 면허증도  태초 발행주는 콜로라도다. 녀석은 명문 대에서 MBA를 하고  몇년 전 까지 다국적 미국회사 도꾜  지사장을 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소식이 끊겼다. 마지막 으로 본게 2018년 서울에서 인데 그때 종교 문제로 한참 어색한 일이 생긴 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있으면 하기로 한다. 종교가 뭔지.

아무튼  모래바람 날리던 여의도 벌판에서 마주했던 그 묵직한 목재 포차와 푸르스름한 포신은, 실상 250년 전 대륙군이 혹한의 밸리 포지에서 자유를 벼려내던 독립전쟁의 거대한 불씨가 머나먼 동방 한강변 소년의 가슴에 가 닿았던 기적 같은 역사적 파편이었다.  땀범벅이 된 채 국회의사당 신축 현장에서 자갈을 줍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훗날 태평양을 건너 그 역사의 주 무대 곁에서 반평생을 살아가게 될 줄이야, 헌병대 마당의 대포도, 어린 소년도 꿈엔들 알았겠는가.

일본의 전국시대 영웅담과 메이지 유신의 낭만성에 심취했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과 현대 문명에 실질적 좌표가 된 것은 영미권의 민주공화정 및 독립의 역사”라는 각성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그 시절의 경험은, 한 지식인이 거쳐온 시대적·정신사적 성장을 웅변하는 흥미진진한 궤적이기도 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천주교의 묵직한 영성을 다루는 소설 『순명』에서 미국 독립전쟁사에 찰스 캐럴이라는 걸출한 가톨릭 지식인이 바친 헌신과 위대한 공헌을 정당하게 조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독립전쟁의 격랑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독자들, 특히 미주 한인 동포들이 이 숨겨진 역사적 연결 고리에 뜨거운 찬사를 보내주셨고, 그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필라델피아의 ‘시티 태번(City Tavern)’에서부터 밸리 포지의 참호에 이르기까지 지면 속 시공간을 숨 가쁘게 넘나들게 된 것이다.

또 하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문명사적 관점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눈부신 근대화의 이면에 ‘예수회의 선교 모델을 체화한 미국 주류 개신교’의 결정적 역할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이다. 마침 현재 연재 중인 순명 소설의 중제목도 「미국의 선교 본부」이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등 구한말 한반도에 첫발을 디딘 초기 선교사들이 감정적 열광주의에 기운 오순절파가 아닌, 정통 청교도적 지성주의를 간직한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성령의 신비적 불꽃만을 앞세우다 지성적 토착화에 실패했던 일본, 필리핀, 중국의 사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예수회적 적응주의(Accommodation)’와 ‘영미 청교도 지성주의’의 절묘한 만남이었다. 마테오 리치 이래 가톨릭 예수회가 동아시아에서 실천했던 방식은 맹목적인 교리 주입이 아니었다. 현지 언어와 문화를 깊이 존중하고, 서구의 첨단 과학기술과 근대 학문을 매개로 최고 엘리트층과 지적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한말 한반도를 찾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노방전도나 감정적인 개종 강요 대신, 배재학당·이화학당·연희전문 같은 근대 학교와 광혜원(세브란스) 같은 병원을 세워 인재를 길러내고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제도적·문명사적 착근’을 선택했다.

이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의 감정적 부흥 운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만약 방언이나 축사(Exorcism) 같은 감정적 열광주의가 선교의 전면에 섰다면, 근대적 합리성과 주권 의식, 헌법적 자유와 권리 개념을 싹틔워야 했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토착 샤머니즘의 또 다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었을 위험이 컸다. 실은 그 류의 병폐가 작금 나타나기는 하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겪었던 선교의 한계와 달리, 한국에서는 성경의 한글 번역을 통한 문해율 혁명,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이어진 민주공화정 담론, 그리고 여성 인권의 자각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대전환으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는 역설처럼, 종교개혁의 대척점에 섰던 개신교가 가장 강성 이었던 예수회의 유서 깊은 교육·문명화 선교 방식을 흡수해 한반도의 근대적 기틀을 세웠다는 사실을 소설 속에서 깊이 있게 짚어내고 싶었다.

이 거대한 문명사적 맥락 속에서 찰스 캐럴의 생애는 미국 독립사와 가톨릭 교회사 양쪽에서 독보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당대 식민지 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가톨릭 차별법(Test Acts)으로 온전한 시민권조차 누리지 못하던 메릴랜드의 가혹한 현실을 딛고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투신한 결단은, ‘자유와 공화정’이라는 대의가 종파의 담을 넘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웅변한다.

그가 사촌 존 캐럴(미국 초대 대주교) 및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목숨을 걸고 캐나다 외교 사절단으로 떠났던 여정과 식민연합 지도부를 프랑스 정 재개와 연결 시켜준 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종교적 관용과 공화주의가 하나로 결합하는 찬란한 순간이었다. 미주 동포 독자들이 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까닭 역시 박제된 교과서식 건국 신화 너머에 살아 숨 쉬는 이처럼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역사의 진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밸리 포지 평원에서 내 생애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극적인 인연과 마주쳤다. 참으로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영혼이 찬양하네”이자, “그대의 축복을 온 누리에,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펼치라”고 노래한 거룩한 섭리의 순간이었다.

개신교 찬송가 중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을 꼽으라면 단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일 것이다. 나는  여의도의 고교 시절, 하굣길 5·16 광장에 운집한 수만 명의 인파가 노을 속에서 그 찬송가를 떼창 하던 웅장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 때 100만 한국인 신도의 유려한 떼창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 인데 그 집회는 당연 아니었고 어느 대형 기독교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민철이와 나는 주말이면 간헐적으로  절에 나갔던 불교 학생회원들이었지만, 그 장엄한 멜로디에 깊이 매료되어 하굣길마다 둘이서 곧잘 흥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반세기가 흐른 바로 이날, 그 아련한 노래를 머나먼 미국의 밸리 포지 평원에서 다시 듣게 된 것이다.

메릴랜드 민병대 동판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통나무 막사 앞을 지날 때였다. 뒤편 언덕길 저만치에서 빨간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차가 가까워지자 창밖으로 낭랑한 노랫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바로 그 곡조였다. 운전대를 잡은 금발의 미국인 남성이 창문을 활짝 열고 천천히 차를 몰며 라디오 씨디 반주에 맞춰 목청껏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유려한 영어 가사였다.

“세상에,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까. 그 옛날 여의도에서 소년의 가슴을 울렸던 저 찬양을, 50년이 지나 이 밸리 포지 한복판에서 이렇게 듣다니….”

가슴이 멍해진 채 다시  차를 타고 밸리 포지 순환로를 시계 방향으로 돌아  웨인 부대며 코네테컷 부대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내가 찾는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포 전시는 가운데 길로 가야만 하는 녹스 부대 앞에 있었다.

워싱턴 사령부 북쪽에 자리한 워싱턴 기념 예배당(Washington Memorial Chapel) 앞을 지날 때였다. 교회 안쪽에서 아까 들었던 바로 그 찬송가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개인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 성가대의 장엄한 합창 연습이었다.

아내와 나는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교회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주차장 한구석에는 방금 전 길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빨간 승용차가 다소곳이 주차되어 있었다.

옆문으로 돌아가면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연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내와 나는 교회 앞 돌계단에 가만히 멈춰 서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성가대 연습이었기에 아름다운 화음의 후렴구가 몇 차례고 은은하게 반복되었다. 밸리 포지 기념 교회는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소속인데, 성공회 전례에서도 이 복음성가를 장엄하게 부르는구나 싶어 까닭 모를 위로와 온기가 가슴에 번졌다. 하긴 내가 적을 두고 있는 펠팍의 마이클 성당이나 가끔 출석하는 우리 동네 레오니아 성당에서도 이 찬송가는 가끔 부른다. 물론 펠팍은 한국어, 레오니아는 영어,   그런데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는 안 부른단다.  교회 밖 수련회나 레지오 모임에서나 부를 뿐…

그 멜로디를 가만히 입속으로 따라 부르며 다시 차에 오르려던 찰나, 교회 예배당 안에서 또 다른 새로운 노래가 장엄하게 흘러나왔다.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애국 찬가인 「아메리카 더 뷰티풀(America the Beautiful)」이었다. 교회에서 이 웅장한 곡을 찬송가로 부른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울려 퍼지는 그 거룩한 선율을 듣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내 몰래 소매로 눈가를 훔쳐내야 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삶의 굽이마다 은총의 표식들을 수없이 새겨놓으셨건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 길을 지나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뒤를 돌아보며 “아, 하느님께서 이미 그때 그곳에 섭리의 표징을 심어두셨던 것이구나!” 하고 그 데자뷔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다.

52년 전 여의도 모래벌판의 헌병대 마당에서 마주했던 차가운 쇠 대포, 어른들의 눈총 속에서도 독립전쟁 원서를 읽으며 가슴 뛰었던 소년의 지적 열망, 그리고 오늘날 태평양을 건너와 펜실베이니아의 거룩한 평원에서 독립의 역사를 복원해 내는 소설가의 소명까지… 내가 걸어온 그 모든 우연의 길목마다 하느님의 자애로운 손길이 섭리의 복선으로 촘촘히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축복받은 이 미국이 자신의 축복을  감사히 여기며 딴 길로 새지 않고 그 축복을 나눌 때 세상이 편해 진다는 표식을 신은 나에게 진작 부터 보여 왔던 것이다.

밸리 포지의 초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흰 뭉게구름은 내 가슴속에 차오르는 벅찬 감동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America! America!
God shed His grace on thee,
And crown thy good with brotherhood
From sea to shining sea!”

(미국이여, 미국이여!
주님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리사,
저 바다에서 빛나는 저 바다 끝까지
그대의 선함 위에 형제애의 관을 씌워주시기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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