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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컬럼> 투표의 룰을 둘러싼 분열, 민주주의의 기원을 묻다

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센터 대표) 

가문의 역사를 기억하고 나라의 순국선열을 기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무엇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곧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 내부에서 이 공유된 기억과 규범이 흔들릴 때, 공동체는 분열과 충돌이라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사회가 유지되려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단 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모리스 알바크(Maurice Halbwachs) 역시 기억은 개인의 머리가 아니라 사회적 틀(Social Framework) 속에서 공동으로 구축되는 사회적 기억임을 강조했다. 즉,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는 곧 국가와 공동체의 생존을 결정하는 뼈대인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문명사적 대전환기(예: 디지털 혁명, AI 시대)에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해체되면서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파편화된 기억과 이해관계에 갇히게 된다. 이 공백을 메울 새로운 통합의 서사가 부재할 때, 공동체는 양극화와 극단적 갈등이라는 내부 붕괴를 겪게 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투표 방식과 선거 제도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은 바로 이 원칙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작동해 오던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이 어째서 난생처음 보는 극심한 분열의 진앙지가 된 것일까.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혈연이나 단일 민족의 유대가 아니라 모두 이민자이거나 그들의 후손으로서, 그들이 어떤 인종인지, 어디에서 왔던지, 부자이던지 가난한 자이던지 상관 하지 않고 미국의 시민으로서 모;모든 구성원은 평등하며 투표를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공화국의 기본 서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서사의 주인공이 특정 인종이어야만  한다는 인종우월주의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국이 공동으로 기억하고 잊지않아야 할 서사를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인공지능의 대두와 급격한 디지털 전환, 그리고
사회·경제적 격변기를 지나며 미국인들이 공유하던 이 거대한 약속은 희석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역사적 승리와 전통이 지켜야 할 가치인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그 역사가 배제와 불평등의 산물로 기억된다. 이처럼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무너지면서, 민주주의의 공정한 심판대여야 할 선거 규칙 그 자체마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정파적 유불리에 따라 해석되기 시작했다.

투표 방식(우편 투표 확대, 유권자 신원 확인 강화, 선거구 재획정 등)을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단순한 기술적 실무 논쟁이 아니다. 이는 누가 이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며, 누구의 목소리가 정당하게 기억되어야 하는가를 가르는 정체성의 전쟁이다.
보수 진영은 전통적인 질서와 제도의 무결성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길이라 믿는 반면, 진보 진영은 변화된 인구 구성과 소외된 계층의 권리를 반영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정의라고 주장한다. 규칙을 지키고 만드는 방식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원리가 오히려 사회를 쪼개는 쐐기가 된 것이다.

이 분열을 방치한다면, 미국은 거대한 문명적 격변 속에서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기억과 불신을 넘어설 새로운 포용적 대서사를 다시 써내려가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기억을 가진 구성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투표의 공정성과 접근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제도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만 매몰되거나 상처만을 부각하는 대신, ‘우리는 앞으로 어떤 미래를 함께 기억할 것인가’ 에 대한 국가적 프로젝트와 합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미주 한인사회도 이번 선거를 결코 남의 일처럼 바라봐서는 안 된다. 2020년 기준 한국계  미국인은 약 150만 명에 이르고, 주요 경합주에서는 한국계 유권자가 아시아계 유권자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숫자는 크지 않지만 선거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동체다.  특히 한인 유권자들에게 우편투표는 중요한 선거 참여 수단이다.

그런데 선거 규칙이 바뀌거나  절차가 복잡해지면 익숙했던 투표 방식이 불편해지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혼란이 투표에 대한 피로감과 불신으로 이어져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걱정이 아니다. 지금부터 정확한 선거 정보를 확인하고, 달라지는 투표 절차를 알리고, 유권자들이 실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정치적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투표할 권리를 행사하고, 그 투표가 공정하게 집계되는 절차를 지키는 일은 모두의 몫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인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후보가 이기는가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한 표를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다. 그것이 미국 민주주의 안에서 한인사회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8/31 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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