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
안동일 작
‘직책의 명칭’을 정하는 일은 단순한 이름 붙이기가 아니라 그 직책이 대표하는 단체나 기구의 성격이나 위상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립국면에서 나라의 대표인 행정부 수장의 명칭을 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면서도 흥미로운 일 이었다. 입 가진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을 정도로 큰 관심사 였다. 복잡한 헌법 조항이나 분규 발생시의 조정 문제와는 달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안 이었다. 실제 1787년 헌법 제정 회의 및 1789년 상원 논쟁에서도 찬반이 갈렸던 구체적인 헌법 조항 문제 보다 이 행정부 수장의 호칭을 두고 현실파와 공화파 간에 치열한 설전이 더 오래 벌어졌다.
공화파와 현실파라고 구분을 하기는 했는데 실은 모두들 공화정에는 찬동을 하고 있었다. 호창 문제는 이 문제는 “이 나라가 왕정의 변형인가, 완전히 새로운 평등 국가인가”를 가르는 시금석 일 수 있다. 그런데 일단 평등국가 공화정에 대한 컨센서스는 독립진영에서 광범위 하게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명칭 문제에 있어서는 왕정의 영향력과 그늘이 컸다.
하긴 영국 왕정이 싫다고 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공화정 말고 어떤 체제를 원한단 말인가. 공화정(共和政, Republic )이란 제도는 특정 군주나 가문이 국가를 사유물로 지배하는 전제 군주정에 반대하여, 국가는 사적 소유가 아닌 ‘공공의 것’이며 국가의 일은 시민 모두의 공적인 일(Res publica)이라는 개념이 담긴 제도다. 공화정은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며, 권력의 독점과 부패를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을 중시한다.
아다시피 공화정의 직접적인 뿌리는 고대 로마다. 로마는 왕을 추방한 뒤 집정관(행정), 원로원(귀족/자문), 민회(시민)가 권력을 분점하는 ‘혼합정체’를 구성하여 공화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세 및 르네상스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도시공화국에서 공화주의 전통이 부활했다.
공화정 문제는 잠시후 다루기로 하고 일단 정찬 자리에서의 행정부 수장 호칭 문제 부터 매듭을 짓는다.
“그 자리를 뭐라고 불러야 격식과 평등을 동시에 지키겠습니까? 박사님.”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자 다음 문제가 한창 여기 저기서 논의 되고 있는 정부 수반의 호칭 문제 였다. 제퍼슨이 물었다.
“”호칭부터 조심하게. 수장을 ‘왕’처럼 부르는 순간 공화제는 끝일세. 거창한 관직명 대신 그저 회의를 이끄는 ‘의장(President)’쯤으로 부르며 낮춰야 하네.”
프레지던트, 올바니 선언때 나온 작책이다.
나머지 네 명의 인물이 조금씩 각기 다른 입장이기는 했다. 이 자리에서는 논쟁으로 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5인 정찬 테이블에서는 좌장인 프랭클린 노사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프래지던트(의장)로 하기로 합의 됐다. 합의 라기 보다는 다른 의견을 냈던 모리스와 제퍼슨이 승복을 했다는 편이 맞다. 모리스는 ‘유어 하이니스’를 선호 한다고 했고 제퍼슨은 ‘유나이트 이규제큐티브’를 내놓았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전하(Your Majesty)’, 귀족은 ‘각하(Your Excellency)’로 불리며 신분과 지배를 상징했다. 반면 라틴어 praesidere(앞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다)에서 온 ‘President’는 본래 대륙회의 의장처럼 ‘동등한 동료들 사이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사회자’를 뜻하는 단어였다.
굳이 결론을 내야 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노사의 말은 듣고 보니 상당한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승복을 했다. 다만 벤자민 노사는 그때 프레지던트를 여럿 두자고 했다. 한사람을 뽑아놓으면 전횡하고 독재로 흐르기 쉽다는 우려 였다.
찰스 캐럴이 나섰다.
” 박사님의 우려도 옳습니다만, 군대를 지휘하고 국가 신용을 보증하려면 결단력 있는 단 한 사람의 수장이 필수적입니다. 수장이 여럿이면 책임이 분산되어 지금의 대륙회의처럼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호칭이 아니라 ‘그 수장을 견제할 법의 틀’입니다.”
“그를 왕이 아닌 행정부를 이끌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합하는 의장(프레지던트)이자 ‘국민의 첫 번째 봉사자(First Servant of the Republic)’*로 묶어둘 헌법이 있다면, 1인 행정관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캐럴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정통 법학과 고전 철학을 공부한 엘리트로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사상과 영국 의회정치의 장단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카톨릭 신자로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권력의 균형과 법치주의에 매우 예민했다.
그는 밥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국가 신용(Credit)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중앙 정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1인 수장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 수장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통치하는 절제된 행정관’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모처럼 존 캐롤이 한마디 거들었다.
“왕이나 총독이 아니라, 원탁의 가운데에 앉아 토론을 이끄는 ‘의장(President)’의 자리”라는 점은 군주제를 거부하고 ‘섬기는 지도자’를 세우겠다는 공화정의 본질과 복음서의 평등관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 그렇습니다. 저도 적극 찬성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대로 만든 공화국 헌법이 있다는 전제 하에 행정부 수장은 프레지던트 한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가 그 얘기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세, 낳지도 않은 아기 이름 놓고이러쿵 저러쿵 하는 꼴 아닌가. 아무튼 현명하게 중의를 따르는 법의 틀이 제대로 갖춰져야 하네. 찰스 몽쉐르는 앞으로 대륙회의 내 헌법 논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실제 헌법 논의는 내밀하게 계속 진행 됐지만 세간에서의 행정수반, 후일에는 국가 원수가 되는 프레지던트 호칭과 관련된 이러쿵 저러쿵은 계속 이어졌다. 권위와 품격을 따지는 이들은 “유럽 강대국들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전하(His Highness)’나 ‘선출된 국왕(His Elective Majesty)’ 수준의 무게감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 독립의 기관차 존 애덤스가 밀었던 방향이다.
이에 반해 절제, 실용파들은 “왕의 냄새, 왕정의 잔재를 완전히 빼야 한다. 그저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의장 (President)’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프랭클린의 선창으로 제퍼슨, 매디슨 등 대다수 온건 공화파 건국 주역들의 방향 이엇다. 개중에 프레지던트가 너무 평이 하면 ‘각하(His Excellency) 정도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급진·평등파들은 “어떠한 거창한 수식어도 권위주의의 싹이 된다. 그냥 ‘아무개 시민(Citizen)’이나 직무 그 자체로만 불러야 한다.” 고 했고 “이름을 무엇이라 붙이든 결국 한 사람에게 군대와 행정을 맡기면 왕과 다를 게 무엇인가?”라며 호칭 논의 자체의 허위성을 꼬집는 관조·회의파 인물들도 있었다.
” 새로운 나라 이름은 유나니트 스테이트로 가는 분위기 인데 박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가?”
“자네들이 벌써 독립선언서에 그렇게 써 놓지 않았는가, 나로선 거기엔 별 이견 없다네”
그랬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수반 호칭과는 달리 미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국명은 어느 한순간에 투표등의 절차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독립 혁명의 긴박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안되고 문서화되며 정착되었다.
이 국명 탄생의 주역은 토머스 페인과 토머스 제퍼슨 두 토마스였다. 페인은 1776년 초, 베스트셀러인 혁명 팜플렛 ‘상식’ (Common Sense)과 언론 기고문 등을 통해 흩어져 있던 13개 식민지가 하나의 연합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명칭으로 ‘Free and Independent States of America’, ‘United States of America’ 등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각인시켰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에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등장시켰다. 그때 원문에는 식민지 (Colonies)로 되어 있었으나 존 아담스가 스테이트로 수정 했다고 알려져 있다.
1777년 11월 15일 대륙회의에서 통과된 미국의 첫 헌법인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 제1조에 “이 연방의 명칭은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로 한다”고 못 박으면서 비교적 일찌감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 이전에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다양한 대안 표현들이 쓰이고는 있었다. 위에 언급한 대로 United Colonies (연합 식민지)가 독립 선언 이전 대륙회의에서 주로 쓰이던 명칭이었다.
또 아메리카가 어차피 사람의 이름일 바에는 최초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 유나이트 스테이트 뒤를 Columbia (컬럼비아) 로 하자는 의견과 대륙 고유의 지형(산맥) 이름을 따서 Appalachia (애팔래치아), Alleghania (알레게니아) 붙이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또 아예 대륙 이름을 ‘자유(Freedom)’에서 파생된 Fredonia / Fredon (프레도니아, 프레돈)으로 바꾸고 국호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 의견을 따라 19세기 초까지도 미국인을 ‘아메리칸’ 대신 독창적인 고유명사인 ‘프레도니안’으로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결국 개별 주들의 ‘독립성과 연합(United States)’이라는 정치적 현실과 대륙의 이름(America)을 결합한 실용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이 최종 국명으로 굳어졌다.
그날 1776년 7월 27일 필라델피아 시티 터반 에서 찰스 캐럴 형제와 벤자민 플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로바트 모리스다섯 사람이 모인 정찬 자리는 후일 따져보면 엄청난 자리였다. 가볍게 스쳐 가는 말 중에서 중요한 정보와 방침이 나왔고 매우 중요한 사항이 다섯 사람 사이에 공유되고 결의 되었다. 대륙회의의 무기력함과 보급 대란을 겪으며 “이대로는 전쟁에서 이겨도 나라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통찰에 도달한 정찬 자리의 대화는 당시 미국 혁명의 가장 뜨겁고도 현실적인 고민이 드러났고 그 해법이 제시된 대화였다.
대륙회의를 발전시켜 정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다시 이루어 졌고, 그 정부는 공화제 ,삼권분립의 정부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수장을 전하가 아닌 프레지던트 (의장)으로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고, 화약 한줌 생산 못하는현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것이 프랑스의 도움이기에 벤자민이 프랑스에 빨리 건너가기로 결정 했고, 조지 워싱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확인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를 지킨다고 결의 했던 것이다. 이날 정찬자리는 미국 독립 전쟁 국면 초기 답답하다 못해 참담한 상황의 극복 방안이 제시된 가장 중요한 자리로 자리매김 해도 손색이 없다.

“ 공화국 헌법 얘기를 나누기 전에 나는 우리 찰스 몽쉐르야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공화제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황과 가톨릭 교리를 따라야 하는 성직자인 존 신부님이 어떻게 공화제를 찬동하는지 궁금하네 그려”
벤자민 노사가 화살을 존캐럴 신부쪽으로 날렸다. 원려가 담긴 화살이었다.
“천주교는 개신교 보다더 강력하게 교황의 권위와 국왕들의 권위를 인정 하는 편 아닌가?”
신부가 즉각 대답했다.
” 프로테스탄트들이 17~18세기 존 로크를 인용하기 훨씬 전부터, 가톨릭 신학은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체계화해 두었습니다.”
“그런가? 가톨릭 신학에 저항권이 있다는 말인가?”
그랬다. 찰스 캐럴과 존 캐럴 신부가 혁명에 주저 없이 투신한 배경에는 당대 가톨릭 소수파로서 마주했던 처절한 현실적 법적 억압과 함께, 가톨릭 내부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두터운 신학적 저항 이론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레 성서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중세·근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과 복음서의 박애·평등 정신을 연결한 존 신부의 기톨릭(에수회)저항전신 신학소개가 이어졌다. 짧지만 설득력과 서사의 깊이가 뛰어난 강의 였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폭정론이 대표적 입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연법에 어긋나는 법은 “법이 아니라 폭력(corruptio legis)”이라 규정했습니다. 공동선의 목적을 상실한 폭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정당방위라는 논리입니다.”
모두 눈이 동그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와 제가 공부한 프랑스 예수회교육은 살라망카 학파의 학풍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살라망카 학파는 ‘권력의 인민 수탁설’을 가르쳤습니다. 신(God)은 통치 권력을 특정 왕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인민(Community)’에게 주며, 인민이 통치자에게 이를 위임한다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통치자가 계약을 깨면 권력은 인민에게 환원됩니다.”
찰스와 존 캐럴에게 혁명은 세속적 반란이 아니라 이 유서 깊은 스콜라 자연법 전통의 복원이었던 것이다. 좁게는 두 사람의 향리 메릴랜드의 복원이기도 했다.
메릴랜드 식민지는 본래 가톨릭 영주(볼티모어 경)가 세운 종교적 관용의 땅이었으나,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메릴랜드에서도 가톨릭교도는 투표권 박탈, 공직 진출 금지, 이중 과세, 미사 봉헌 금지 등 심각한 차별을 받았다.
이들에게 영국의 억압은 ‘세금 문제’ 이전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문제였다. 국교가 없는 세속 공화정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이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는 확신이 있었다.
존 신부는 성서를 원용해 사람들에게 더 확신을 던져 줬다.
“ 성서 텍스트가 왕정을 긍정하는 듯 보이는 대목,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공화정의 가치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구약 사무엘기 상 8장 에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야훼는 “왕은 너희 아들딸을 징발하고 십일조를 거두며 결국 너희를 노예로 만들 것이다”라고 왕정의 폭력성을 강력히 경고합니다. 성서에서 왕정은 하느님의 본래 뜻이 아닌 ‘백성의 나약함에 대한 양보’로 묘사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철저한 평등은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서(3:28)에서 선포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선언과, 마태오 복음(23:8~11)의 “너희는 지도자라 불리지 마라. 너희 중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육성은 신분제와 세습 군주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신앙적 선언입니다.”
“원시 교회의 코이노니아: 사도행전의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는 권력의 위계가 아닌 형제적 나눔과 박애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예수회 교육을 받은 존 캐럴과 찰스 캐럴은 수아레스와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을 통해 “폭군에 저항하여 인민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자연법 질서의 명령”임을 지적으로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찰스 캐럴이 대지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고 처벌(교수형)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군주가 신민을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모두가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는 공화정(Res Publica)”이야말로 복음서의 참된 실천이라 믿는 신앙적 결단이야 말로 내족 영성 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내적 영성은 나머지 세사람에게 커다란 위안과 확신을 던져 주었다. 특히 벤자민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왕과 대신들 상대가 해볼만 하겠다는 자신감을 얻으면서 빨리 건너가도 승산이 있겠다는 확신을 었었던 것이다.
이날 정찬에서 워싱턴에 대한 무한 신뢰를 확인하고 그를 보위 하기로 다짐한것은 역시 벤자민 프랭클린의 당부에 따른 일이었다.
사나이의 첫정은 8초안에 가름 된다고 했던가.
벤자민은 첫눈에 워싱턴을 알아 보았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조지 워싱턴이 본격적으로 마주한 것은 1775년 5월, 필라델피아 제2차 대륙회의의 웅성거리는 의사당 안에서 였다. 산전수전 다 겪고 일흔을 바라보던 노련한 계몽주의자 벤자민의 눈에 비친 마흔셋의 버지니아 촌뜨기 거한 워싱턴의 ‘첫 8초’는 아마도 숨 막히는 침묵과 직관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귀국한 직후 대륙회의에 합류했다. 도착 바로 다음 날,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의회에 의해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공식 선출됐고 5월 10일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스테이트 하우스에서 개최회된 제2차 대륙회의 첫 공식 회기에 대표 자격으로 정식 참석했다.
의사당 문이 열리고, 그 거대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순간 벤자민의 반달안경 너머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첫 3초는 압도적인 육체적 위압감이었다. 당시 성인 남성의 머리 하나는 족히 솟아 있는 6피트 2인치의 거구, 대장간 모루처럼 벌어진 어깨, 꼿꼿하게 곧추세운 척추. 그는 유럽의 기름진 귀족들이나 필라델피아의 약삭빠른 법률가들과는 태생부터 달랐습니다. 서부 개척지의 진흙탕과 버지니아 황무지에서 말안장 위에 얹혀 단련된 ‘야성의 뼈대’가 제복 너머로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다음 3초, 벤자민의 시선은 그가 입고 온 푸른색과 담황색의 버지니아 민병대 군복에 멎었다. 모두가 점잖은 프록코트를 입고 펜대와 웅변으로 주판알을 튕기던 그 위선적인 회의장에, 홀로 칼을 찰 수 있는 군복을 입고 나타난 침묵의 선전포고. 프랭클린은 굳이 그 사내의 입을 열어보지 않고도 단박에 읽어냈다.
‘이 자는 떠들어 온 것이 아니구나. 피를 흘릴 각오를 온몸에 두르고 왔구나.’
그리고 마지막 2초, 벤자민은 워싱턴의 눈빛과 다문 입술을 포착했다. 천연두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굳은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그 아래 억눌린 채 타오르는 차갑고 위험한 불꽃. 사내의 첫정을 가늠한다는 찰나의 8초가 끝나는 순간, 프랭클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화려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는 선동가는 넘쳐나지만, 온몸의 무게로 침묵하며 역사의 벼락을 혼자 받아낼 바위 같은 사내는 오직 저자뿐이다.’
런던 궁정의 온갖 모략과 음모를 꿰뚫어 보던 늙은 현자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이 바다 건너에서 화약과 총을 구해오면 이 대륙의 맨 앞에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설 ‘유일한 기둥’을 직감했을 것이다.
의사당 구석, 담배 연기와 잉크 냄새가 밴 창가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을 때의 광경.
마흔셋의 워싱턴에게 일흔의 벤자민 프랭클린은 런던의 추밀원을 쥐락펴락하고 번개를 병에 담았다는 전설 속의 현자였고, 벤자민에게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결혼해 거대한 농장을 일군 뒤 군복을 입고 나타난 ‘말수 적은 버지니아 거한’이었다.
워싱턴이 먼저 허리를 굽혀 묵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장갑을 벗은 거친 손이 벤자민의 주름진 손을 감쌌다.
“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버지니아의 촌부가 필라델피아의 지혜를 배우러 왔습니다.”
화려한 수사도, 정치적인 칭찬도 없는 뼈마디 굵은 목소리였습니다.
벤자민은 반달안경 너머로 푸른 제복의 가슴팍에 달린 황동 단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특유의 능청스럽고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워싱턴 대령, , 다들 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말(言)로 제국을 이겨보겠다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데…… 대령께서는 아예 관(棺)을 짤 치수를 재고 오셨소 그려.”
워싱턴의 굳은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벤자민은 상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덧붙였다.
“군복이 아주 잘 맞으시오. 런던 놈들이 총칼을 들고 올 때, 펜대 뒤로 숨지 않을 사내가 이 방에 적어도 한 사람 있어 다행이오.”
그 말에 워싱턴의 굳게 다물렸던 입술 사이로 깊고 무거운 숨과 나직한 목소리가 나왔다.
“박사님, 저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다만 맡겨진 자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킬 뿐입니다.”
“그거면 족하오. 말은 이 늙은이가 바다 건너가서 얼마든지 지껄여줄 테니…… 장군은 그저 쓰러지지 말고 버티시오.”
세련된 말재주 뒤에 숨은 필라델피아의 엘리트들 틈에서, 번지르르한 칭찬 대신 자신의 ‘군복’이 품은 비장한 각오를 단 한마디로 꿰뚫어 본 노학자. 그리고 그 노학자의 유머 섞인 독설을 묵묵한 결의로 받아낸 무인.
‘부자 과부 덕을 본 농장주’라는 세상의 평판 뒤에 숨겨진 거인의 그릇을 벤자민이 알아본, 짧지만 뼈가 굵은 첫 대화였던 것이다.
워싱턴의 결의는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영웅적 충동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굴욕과 환멸이 ‘렉싱턴의 핏자국’을 만나 응고된 것이었다. 청년 워싱턴은 영국 국왕의 정규군 장교가 되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습니다. 영국을 위해 황무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1758) 브래독 원정 때는 옷에 총구멍 네 개가 뚫리는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런던의 귀족 장교들은 그를 그저 ‘식민지의 측량기사 출신 촌놈’ 취급하며 정규군 장교 임관을 거부했다. 그때 워싱턴은 뼛속 깊이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피를 흘려도, 저들에게 우리는 결코 대등한 신민이 아니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마사와 결혼하고 대농장을 일궜지만, 런던의 무역상들은 담배 가격을 후려치고 형편없는 영국산 공산품을 강매하며 그를 부채의 덫에 가두었다. 워싱턴에게 영국의 인지세와 관세는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 ‘독립된 자유인을 노예나 소작농 취급하는 오만한 횡포’였다.
의회에서 점잖게 청원서나 쓰던 타협의 시간은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외곽에서 끝났다. 식민지 민병대의 피가 땅에 뿌려진 순간, 워싱턴은 타협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한번 피를 흘린 이상, 이제 남은 길은 반역자로 목을 매달리거나, 아니면 끝까지 싸워 자유인이 되는 것뿐이다.’
“박사님, 20년 전 오하이오 황무지에서 영국 장교 놈들의 비웃음을 살 때부터 알았습니다. 저들은 결코 우리를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렉싱턴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피가 흐른 이상 타협이란 없습니다. 목을 내놓고 반역자가 되든, 칼을 쥐고 자유인이 되든 둘 중 하나뿐입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