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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8)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캐럴과 대륙회의, 그리고 뉴욕의 워싱턴

정찬 테이블의 화제는 워싱턴 부대를 비롯한 각지의 대륙군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으로 쏠렸다.
“뉴욕의 워싱턴 부대야 그렇다고 쳐도, 다른지역은 어떻습니까?”
찰스 캐럴이 밥 모리스를 쳐다 보며 물었다. 워싱턴의 뉴욕에 대해서는 조금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캐럴은 뉴욕의 사정을 듣자마자 자신이 나서야 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며칠 뒤, 그리고 또 한참 뒤의 일이지만 조급해 하는 그리고 안타까와 하는 독자들을 위해 미리 살짝 일러 둔다. 실제 그는 그날밤 적잖이 와인을 마셨음에도 숙소에 돌아가 아나폴리스의 부친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다음날 부터 메릴랜드에서는 뉴욕으로 가는 마차 행렬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식량과 의복 행렬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물품은 몇대에 나뉘어 실은 스페인 은화와 금화 궤짝이었다. 찰스의 부친 아나폴리스 캐럴이 평생을 모아온 거의 전부였다. 쓰면 돌아 온다고 했던가. 이 은화 궤짝은 후일 수천배, 수만배의 가치로 캐럴가에 돌아온다.

훗날 미 의회의사당이 들어서게 될 캐피털 힐의  늪지대가 본래 캐럴가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가문의 토지 일부가 국가의 수도로 기증된 후, 거짓말처럼 주변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캐럴가의 부는 더욱 거대해졌다. 그리고 그 막대한 부는 훗날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학이자 막강한 재정으로 순식간에 최고 명문이 된 조지타운의 초석이 되었고, 새 땅의 명물이 된 볼티모어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와 장엄한 종소리로 승화되었다.
정찬 자리에서 조지 워싱턴 대륙군의 비참한 실상을 들으면서 찰스는, 존 신부와 미친기지로 식탁 위에 놓인 흰빵이 너무도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 붉어진 눈을 비비며 그는 도허레건 농장에 있는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썼던 것이다. 아들이 보낸 진심 어린 문장에 움직인 캐럴 옹은 메릴랜드 민병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마지막 동산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금화 궤짝들을 뉴욕의 워싱턴에게 전격 이송했던 것이다.

10 여년 뒤, 포토맥 강변 부지를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삼으려 할 때, 워싱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그 곤경의 밤에 금화 궤짝을 보내왔던 캐럴가와 천주의 가호로 그들의 얼이 새겨져 있는 지금은 늪지지만  전망 밝은 그 땅 이었다. 남부와 북부 정치인들 간의 격렬한 수도 유치 대립 상황에서, 워싱턴은 캐럴가의 헌신적 기여와 그들이 소유한 포토맥 강변의 광대한 토지의 미래가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확고한 신념으로 이 부지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후일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모리스의 답변으로 돌아 온다.
“50보 100백보 입니다. 지금 우리 대륙군은 적군의 총알에 맞아 죽기전에 굶어 죽을 판입니다.”
“그렇게나 심각합니까?”

“대륙회의 금고는 비어 있고 각 식민지 주 정부들은 영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참 우리 대륙군의 전체 병력수는 얼마나 됩니까? 대외 군사비밀 사항 일테지만 어차피 제가 군사위원회 들어 갈 테니까 알려 주시지요.”

“그래 나도 정확히는 모르고 있는데 얼마나 되나?’ 벤지민 노사도 나섰다.
“ 실은 매우 지지부진 합니다. “
‘5만 대군이다.’ ’10만이 모였다’ 설왕 설래가 많은 사안이었다. 당연한 과장이었다. 특히 독립파 신문들이 상황을 부풀렸다.
“서류상 기록된 숫자는 4만 7천 명에 달하지만 질병, 미복귀 등으로 인해 실제로 단일 전장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은 2만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담당관 모리스의  솔직한 설명이 이어졌다.
1776년 7월 말, 독립선언이 선포된 직후 대륙군은 조지 워싱턴의 뉴욕 주력군 외에도 북부, 남부, 뉴저지 예비대, 서부 국경 지대 등에 약 1만~1만 5천 명 규모의 정규군 및 지원 부대가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1776년 7월 말 대륙군의 실제 총 병력은 정규군과 단기 소집 민병대를 합쳐 약 3만~3만 5천 명 안팎이었다.  이 중 약  60%인 2만 명이 워싱턴과 함께 뉴욕에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40%가 북부(타이콘데로가), 남부(찰스턴), 중부 예비대(뉴저지)로 나뉘어 힘겹게 영국군의 다각도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북부부대 (Northern Department) 는 뉴욕주 챔플레인 호수 및 타이콘데로가 일대에 주둔해 있었는데 1775년 겨울에 감행했던 캐나다 원정(퀘벡 침공)이 참패로 끝난 후, 6~7월에 걸쳐 참담하게 남쪽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필립 스카일러(Philip Schuyler)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소장,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준장이 이끌고 있는데 병력 규모는 약 5천에서 7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전염병 및 탈영으로 실질 전투력은 극심하게 하락한 상태 였다.

남부부대 (Southern Department)는 찰스턴 등 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에 대륙군 정규연대와 각 주 민병대를 햡쳐 3천~ 5천 정도가 있었다. 찰스 리(Charles Lee) 소장, 로버트 하우(Robert Howe) 준장,이 지휘관이었다.
7월 말 기준으로 사기 및 전과가 가장 드높았던 부대다. 1776년 6월 28일, 찰스턴 길목의 설리번 섬 전투(Battle of Sullivan’s Island)에서 야자나무 방어벽을 구축한 물트리 대령의 부대가 영국 해군과 헨리 클린턴의 영국 상륙군을 완벽히 격퇴했다. 7월 말에는 영국 함대가 남부 해안에서 철수하면서 남부 연안의 위협이 해소되었고, 찰스 리 장군은 남부 내륙 방어와 영국의 공작을 받아 은 체로키 인디언 세력 대응에 집중하고 있었다.

또 중부인 뉴저지 지역에는 휴 머서(Hugh Mercer) 준장이 이끄는 병력 규모  2,000 ~ 3,000명의 기동 예비대 ‘플라잉 캠프’ (Flying Camp) 부대가 있었다. 대륙회의가 워싱턴의 뉴욕 주력군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뉴저지 해안선을 보호하기 위해 6월에 신설을 의결한 모바일 예비대(Strategic Reserve)였다.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등에서 소집된 기동 민병대와 정규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퍼스 앰보이(Perth Amboy) 등 뉴저지 해안 거점에 주둔하며 영국군의 기습 측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서부 국경 및 기타 지역 (Frontier & Coastal Garrisons)에도 각 수백 명 규모의 부대가 대륙군의 이름으로 펜실베이니아 피트 요새(Fort Pitt) 등에 배치되어, 영국과 결탁한 원주민 부족들의 내륙 습격을 견제 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연안에는 3월 보스턴 포위전 승리 후 주력은 뉴욕으로 빠져나갔으나, 해안 포대와 최소한의 정규군 및 주 방위대가 남아 해안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 워싱턴의 뉴욕 부대 뿐만 아니라 다른 전선의 대륙군 역시 심각한 보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보급의 총 책임은 당연히 대튝회의 이지만 아시다 시피 대륙회의는 행정력과 과세권이 전혀 없고, 권한이래야 각 주(State, Colony)에 물자 할당을 ‘요청’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저들이 나몰라라하면 끝 입니다.. 여기에 대륙노트의  가치 폭락과 화물 수송 체계의 부재가 더해져 전선의 보급선은 사실상 마비 상태입니다.”

모리스가 마데이라 잔을 벌컥 비운 뒤  지역별 사정을 이어갔고 다른 이들은 경청 했다. .
찰스 형제와 프랭클린 노사가 만났던 뉴욕 타이콘데로가 일대 북부부대가 가장 보급 상황이 처참했다. 캐나다 원정 참패 후 후퇴한 이 북부부대는 보급선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기본 식량이 부족하여 병사들은 야생 풀이나 겨우 연명할 정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천막, 피복, 신발이 없어 수천 명이 맨발과 누더기 차림으로 지냈다. 보급품 중 가장 부족했던 것이 의약품과 위생 용품이다. 천연두에 이어 , 이질, 말라리아 까지 퍼지면서  7월 말 기준 타이콘데로가 부대 병력의 절반 가량이 전투 불능 상태 였다.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군대가 아니라 병원과 시체 안치소에 가깝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남부부대는 찰스턴 전투 승리 직후라 사기는 높았으나, 군수 물자의 질적 보급은 역시 극히 부실했다. 농경지인 남부 특성상 쌀과 현지 축산물 등 기본적인 식량 수급, 현지 조달은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했지만 대륙회의가 보내줘야 하는 는 화약과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찰스턴 방어 당시 병사들은 총알 하나하나를 아껴 쏴야 했다.
또 꽤 많았던 이부대 뉴잉글랜드며 중부 출신  병사들은 남부의 습하고 무더운 여름 기후에 맞는 옷이나 모기장, 의약품을 전혀 공급받지 못해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려야 했다.

뉴저지 플라잉 캠프(New Jersey)는 급히 각 주에서 소집된 민병대 중심이다 보니 대륙회의의 정규 보급 목록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병사들은 개인 총기와 옷을 직접 가져와야 했고, 군용 천막이 없어 야외나 나무 밑에서 노숙하기 일쑤였다. 장교들은 “총도, 탄약도 없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무슨 방어를 하란 말이냐”며 항의했다.

서부 국경  요새와 내륙 거점들은 수송로가 험준하여 보급품 전달이 가장 늦었다. 특히 인디언 부족들과의 교전에 필수적인 화약과 납(총알 재료) 공급이 늘 바닥나 있어 현지 사냥꾼들이나 주민들의 물자에 의존해야 했다.

헌머디로 1776년 7월의 대륙군 보급은 “중앙의 지원은 거의 없고, 각 지역 장군들이 주 정부나 현지 주민들에게 구걸하거나 빚을 얻어 겨우 연명하던 구조”였던 것이다.

“참 큰일이구요, 무슨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겠군요.”

“정말 미쳐버릴 지경입니다.내가 무슨 팔자에…”

모리스가 마데이라 한잔을 벌컥 마셨다.

각 주(State)에 “돈 좀 내달라”고 구걸해야 하는 처지의 실무자인 그는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대륙군이 창설된지 이제 1년이 넘었지요?”
모처럼 제퍼슨이 입을 열었다.
“정확이 1년 하고도 40일 입니다. 그런데도 자리를 영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뉴일글랜드 사람들이 비협조적입니다. 자신들이 나서서 군을 만들어 놓고는…”

“그럴리가 아담스 형제가 건재 한데…”

“아닙니다 사무엘, 존 두분 형제 의장 빼면 특히 식민정부 의원들과 관리들은 온통 적군입니다.”

사실 대륙군은 뉴잉글랜드 지역이 주도 했다. 아는 대로 대륙군은 1775년 6월 14일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의 결의를 통해 창설되었다. 그런데 그 창설을 공식 거론 하고 성사시킨 측이 매사추세츠와 뉴 햄프셔 의회 였다. 그해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을 때 그 민병대는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개별 민병대 연합체(New England Army of Observation)였다. 그때 매사추세츠 지방의회는 이 부대를 13개 식민지 전체를 대표하는 부대로 추인 해 달라고 뉴 햄프셔 의회와 함께 연명으로  대륙회의에 공식 요청했다. 사무엘 아담스 등 그곳 지도자들의 결단 이자 원려었다.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 모인 제2차 대륙회의는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민병대를 식민지 전체의 공동 방위를 위한 ‘대륙군’으로 공식 공인하고 전역에서 대대적인 추가 모집을 하겠다고 선언 했다. 이 날짜는 현재까지도 미국 육군의 창설 기념일(U.S. Army Birthday)로 기념된다.
대륙회의는 우선 펜실베이니아에서 6개 중대,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각각 2개 중대의 전문 소총병(Riflemen)을 즉시 모집하여 보스턴으로 파병하도록 조치했다.
6월 15일 군대를 창설한 바로 다음 날,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 으로 만장일치 형식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전한 바 있다..
병력은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충원됐다. 초기에는 애국심에 기반한 자원입대가 주를 이루었다. 애국 신문들이 이 분위기를 주도 했다. 모병이었기에 월급제 계약이 있었다. 하지만 복무 기간이 1년 미만이었고 남부 병사들은 바쁜 농사철이면 대거 귀향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후 워싱턴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후 복무 기간이 3년 또는 ‘전쟁 종료 시까지’로 연장되기는 했지만 모병제의 한계는 내내 따라다녔다.
자원입대자가 줄어들자 대륙회의는 각 주(State)의 인구 비례에 맞춰 병력 할당량을 부과했다. (Drafts and Quotas): 각 주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민병대원 중 제비뽑기로 대륙군에 입대시켰고, 부유층은 대리인을 돈으로 사서 대신 입대시키기도 했다.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자유 흑인 및 노예(일부 주는 군 복무의 대가로 해방을 약속), 프랑스·독일 등 유럽 출신의 직업 군인 및 자원봉사자들도 대륙군에 포함되었다.
대륙군의 서류상 최대 규모는 1776년 무렵 서류상 기록된 약 47,000명에 달했지만 질병, 보급 부족, 미복귀 등으로 인해 실제로 단일 전장에 동원할 수 있었던 어느정도라도 무장을 갖춘 최대 병력은 모리스가 말한대로 약2만명 수준을 넘지 못했다. 실은 그당시 식민 대륙 전체에 주준하고 있는 영국군을 모두 합쳐도 1만 5천이 넘지 않았기에 병력으로는 그케 열세는 아니었다. 물론 영국은 군함을 동원 정규군을 계속 대륙으로 대량 보내 왔다.
후일의 통계지만 전쟁 전체 기간(1775~1783년) 동안 대륙군에 한 번이라도 적을 두고 복무한 총인원은 약 23 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식민지 개별 민병대까지 합치면 약 39만 5천 으로 집계 된다.

대륙회의가 군의 통수권을 가졌고, 조지 워싱턴 총사령관(Commander-in-Chief)이 현장 지휘를 전담했다. 지휘 계통은 총사령관 아래로 소장(Major General), 준장(Brigadier General), 대령(Colonel, 연대장) 순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명령 체계를 민들었지만 아는대로 통솔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에 대한 불신과 의혹은 팽배 했기 때문이다. .

당시 대륙회의는 겉으로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역 갈등과 불신으로 가득 찬 화약고였다. 남부 대 북부의 뿌리 깊은 불신이 문제 였다.  버지니아 중심의 남부와 매사추세츠 중심의 북부 뉴잉글랜드 세력은 늘 으르렁댔다. 북부는 남부가 “말만 번지르르하고 군대나 군자금은 안 보낸다”고 비난했고, 남부는 북부를 “과격한 선동가들”이라며 경계했다.
거기다  회의 일각(특히 뉴잉글랜드 의원들)에서는 “왜 우리가 어쩌다 무능한 버지니아인에게 지휘권을 주었나?”하면서 걔속 총사령관 직책 결정을  번복 하려 했다.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장군이나 찰스 리(Charles Lee)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밀었던 파벌들이 워싱턴의 계속 목을 조르고 있었다.

“총이 없어 대륙군에게 중세 시대의 창을 쥐여주어야 할 판 입니다. 북부주 의원들은 여전히 버지니아 촌뜨기 장군이라며 손가락질만 하고 자신들 민병대도 총이 없다고 딱 잡아 댑니다.”

“워싱턴 장군이 군수품을 달라고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온다고 호소하면 군사위원회 소속 의원들 까지도 능력이 없어서 보급 탓만 하는 것 아니냐 고 쏘아붙이곤 하는 형편 입니다.”
” 말씀 드린 대로 대로 이대로는 워싱턴 장군과 군대가 총에 맞아 죽기 전에 굶어 죽습니다. 강제력 있는 중앙 정부와 일사 분란하게 통솔할 그 수장이 당장 필요합니다. 지금의 대륙회의 구조로는 이 전쟁 수행 못합니다.”

실무자인 모리스는 전쟁 물자와 자금을 대느라 속이 타들어 가는 상황에서 강력한 연합 정부의 필요성을 궤변 없이 설파했다.   당시로서 그 만큼 자신있게 소극적인 주정부나 의원들을 큐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펜주 필라 최고 부자였던  모리스는 군사위원회 재정관이기도 했고 대륙회의 전체의 재정관이기도 했기에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대륙회의와 대륙군에 쏟아 붓고 있었다.  ‘독립전쟁의 금융가’로 불리는 그는 대륙회의 재정이 완전히 파탄 났을 때, 개인 자산을 털어 국가를 구한 이 가운데  한명이었다.  국가 신용이 바닥나자 자신의 개인 신용으로 보증을 서서 대륙군에 식량과 탄약을 댔다. 그는 요크타운 전투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지막 사재 까지  쏟아부었고, 훗날 전쟁 이후 개인 사업 실패로 채무자 감옥에 갇히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공공을 위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다. 대륙회의  위원회가 너무 느리고  비효율이 극에 달하자, 대륙회의 의원이 아닌 단독 장관(Secretary/Superintendent) 체제로 행정 부서를 개편했을 때 그는 재무장관인 재무총감(Superintendent of Finance)을 맡아 파산 직전의 재정을 회생 시켰고 구조조정 및 대륙화폐 정리를 단행하는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대륙회의 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고 국제사회에서 승인받기 어렵다는 인식 아래 “하나의 연합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은 1776년 6월 7일,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가 제2차 대륙회의에서 공식 안건으로 발의했다. 이를 역사적으로 ‘리 결의안(Lee Resolution)’이라고 부른다.
매사추세츠 대표 존 애덤스(John Adams)가 이 안건에 재청(Seconded)하며 적극 지원했다. 리 결의안과 아담스의 동의안은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 수립을 위한 3가지 필수 과제를 동시에 제시했다.
독립 선언과 외국과의 동맹을 맺기 위한 가장 실효성 있는 조치, 그리고 연합 정부 수립 이 세가지 였다.
이처럼 연합정부 수립  얘기는 그 당시 부터 나왔던 것이다.  아담스는 “각 주들의 검토와 승인을 위해 연합 계획(Plan of Confederation)을 조속히 작성해야한다.” 고 첫날 회의부터 강조 했다.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대륙회의 전체위원회(Committee of the Whole)에서는 이 결의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신중파들은 즉각적인 독립과 국가 선포에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등 일부 주의 대표들은 아직 본국(각 주 의회)으로부터 독립이나 새로운 연합체 창설에 동의해도 좋다는 공식 승인 지침을 받지 못한 상태라며 미온적이었다.
신중파들은 “집을 짓기도 전에 지붕부터 얹을 수 없다”면서 독립 선언이나 연합체 결성 선언을 하기 전에 “외국(프랑스 등)과의 동맹 약속을 확실히 받아내고, 각 주를 하나로 묶을 헌법 체계부터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존 애덤스 등 강경파는 독립 선언이 선행되어야 외국도 동맹 협상에 응할 것이라고 맞섰다.

대륙회의는 표결을 3주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휴회 기간 동안 3가지 과제를 전담할 3개 위원회를 동시에 구성하여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독립선언서 작성 위원회와 외교 조약 모범안 작성 위원회, 연합 정부 체제(헌법) 작성 위원회가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선언서 작성 위원회에 대해서는 잘알고 있는데 나머지 두 위원회에 대헤서는 모르고 있다. 외교 조약 위원회는 벤저민 프랭클린 중심으로 꾸려가기로 했고  정부 체제 적성위는 신중파였던 존 딕킨슨을 위원장으로 해서 각 주에서 1명씩 선출된 13인 위원회로 꾸려 가기로 했다.
독립선언서 작성위원회의 활동과 실적은 이미 전한 바 있기에 또 언급 하지 않는다. 존 딕킨슨 위원회는 1776년 7월 12일 미국 최초의 성문 헌법안 이라고 할 수 있는  ‘연합조항(Articles of Confederation)’ 초안을 제출했다. 매우 발빠른 행보였다. (실은 각주에거 대표를 보내지 않아 존 디킨스 등 몇 사람의 견해 였다.)
디킨슨 초안의 핵심 내용은 강력한 중앙정부(연방) 권한 부여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3권 분립이 이루지지 않았다. 초안은 대륙회의(연방)에 전쟁 선포 및 평화 협정, 외교 조약 체결, 통화 발행, 군대 창설, 주 간의 국경 분쟁 중재 권한을 독점적으로 부여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사법부나 행정부 없이, 각 주에서 파견한 대표들로 구성된 단원제 대륙회의가 입법 및 국가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상설 행정기구: 국가위원회 (Council of State) 디킨슨 초안은 대륙회의가 휴회 중일 때 국정을 운영하고 대륙회의의 결정 사항을 집행할 상설 행정위원회(Council of State)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 위원회는 각 주에서 1명씩 선출된 대표(총 13명)로 구성되도록 했다.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행정권을 가진 영구적인 국가 수반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륙회의 의장 (President of Congress) 대륙회의 내부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문서에 서명하는 중재자 역할로 ‘의장(President)’을 두었다. 이는 삼권분립의 행정부 수반이 아니라, 의회의 의장에 불과했다.의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인물도 3년 기간 중 1년을 초과하여 의장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임기 제한을 두었다.

각 주가 주장하던 미개척 서부 영토의 소유권을 제한하고, 이를 연방정부 관할의 공공 토지로 지정하여 신규 주 창설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연방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각 주의 전체 인구수(노예 포함)에 비례하여 할당하도록 제안했다.
개별 주의 독자적인 외교나 무역 협정을 금지하고, 연방 법률이 각 주의 법보다 우선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다. 의결 방식은 각 주마다 1표의 투표권을 부여하되, 중요 사안(전쟁, 조약, 자금 조달 등)은 13개 중 9개 주의 찬성을 얻어야 결정되도록 했다.

그러나 대륙회의 내부의 갈등과 전시 상황 때문에 이 연합 안건은 계속 수정되다가 “각 주는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유지한다”는 점이 강조된 약한 형태의 연합정부안으로 바뀌어 1777년 11월에야 최종 통과된다.

77년 11월에야 대륙회의를 통과했지만 그후에도  서부 영토권을 둘러싼 주간 갈등으로 인해 계속 실행이 미뤄지다가 1781년 3월(메릴랜드주의 최종 비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정식 연합 정부가 출범에 착수하게 되었다.   결국 대륙회의 시절 체결된 이 느슨한 ‘연합조항’ 체제 역시 전쟁 수행 및 국정 운영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훗날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를 통해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U.S. Constitution)과 강력한 연방정부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76년 7월말 당시에도 윤곽은 나와 있는 셈이었다.

“연합 정부 구성 논의는 어느 정도 진전 돼가고 있습니까?”
회의 내 사정에 아직은 어두운 찰스 캐럴이 물었다.

“지지부진 입니다. 딕킨슨안에 대해 반론이 많아요.”

“그래요, 삼권 분립이야 말로 공화국의 근간인데 딕킨슨 초안에는  그게 완전히 빠져 있어요.”

“디킨슨이 초안을 재출 하기전에 나에게 가져 왔었어요, 그때대 나도 그점을 지적했는데 딕킨슨은 어차피 초안이니 논의를 촉발하는 것으로 충분 하다고 하더군.”

벤자민이 나섰다. 존 딕킨스 역시 필라 출신이었다.  딕킨스는 토마스 제퍼슨이 자신과 같은 신중파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행정부가 번듯해야 합니다. 대륙의 산하 행정위원회로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읍니다. 대륙회의 의장이 아니라 행정 수반이 나라의 대표자가 돼서 나라일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대륙회의은 의회, 입법부의 역할을 맡으면 됩니다. ”

“맞는 말일세, 모리스 자네 말대로 각 주(State)들이 각자 잇속만 차리는 이 무정부 상태를 끝내려면 하나의 집(행정부)을 지어야 하네. 하지만 고려 할게 있어요. 그 집의 주인을 한 명만 두면, 결국 우리는 영국 왕 자리를 없애고 우리 손으로 새로운 왕을 만드는 꼴이 될 걸세. 수장은 그저 위원회의 ‘의장(President)’ 정도로 족하지, 결코 ‘군주’나 ‘각하’가 되어서는 안 되네.”

“연합 정부 구성이야 말로 박사님 지론 아니십니까? 20년 전에 벌써 그 수장을 제네럴 프레지던트라고 명명 하셨지요?”
“엣날 얘기는 쓸데 없이…그때는 영국왕이 임명하는 자리였거 지금은 달라요.”

프랭클린은 이미 1754년 올버니 회의(Albany Congress) 때부터 ’13개 주 연합체(Albany Plan of Union)’를 주장했던 연합 정부의 원조 설계자였다.

1754년 올버니 회의(Albany Congress)는 북미의 7개 영국 식민지 대표들과 원주민들이 결성했던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  지도자들이 뉴욕주 올버니에 모여 개최한 역사적인 연합회의다.  독립 전쟁 이전 식민지들이 최초로 연합 연대를 도모하고 중앙 정부의 기틀을 논의한 핵심적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1750년대 초 오하이오 계곡권의 영토 소유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영국왕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식민지 간 방어 체계를 공동 구축하고, 전통적 우방이었던 이로쿼이 연맹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코네티컷,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등 7개 식민지가  대표단을 파견 했다.  버지니아 등 일부 주요 식민지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식민지 간 공식 협의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펜주의 벤저민 프랭클린과 매사추세츠의 토머스 허친슨 등이 주도해 올버니 연합안이 제시됐다.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1인과 각 식민지 의회에서 선출한 대의원들로 구성된 연합 정부 수립안이었다.
인디언과의 조약 체결, 영토 확장 및 관리, 방어용 군대 창설 및 이를 위한 세금 부과 권한을 연합 정부에 부여하고자 했다.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연합 총독을 (  Govrernor General) 혹은 ( President-General )로 명여했고 식민지 의회에서 선출한 대의원회를 (Grand Council)로 부르자고 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연합안을 채택했으나, 각 식민지 의회와 영국 국왕 모두 이를 최종 거부했다. 식민지 의회들은 자치권과 과세권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고 영국 국왕은 식민지들이 단결하여 중앙 권력에 저항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올버니 연합안은 비록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20년 뒤 1차 륙회의(First Continental Congress)와 독립 선언, 그리고 연방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는 미국 연방주의(Federalism)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강력한 중앙 행정부의 필요성에는 100% 동의했지만 행정부 수장에 대한 프랭클린의 생각은 매우 신중했다. 단일 수장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훗날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서도 그는 1인 의장(대통령) 대신 ‘3~5인으로 구성된 행정위원회(Executive Council)’ 형태를 선호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면 그가 아무리 워싱턴 같은 성인(聖人)이라 해도, 결국 왕의 욕망을 품게 된다”는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랭클린은 회의 에서 ‘워싱턴 같은 굿맨(Good man)’이라는 표현을 사용 했다.
프랭클린은 왕정의 허례허식을 가장 혐오한  실용주의자이자 공화파였다.  존 애덤스 등이 수장의 호칭을 ‘전하(His Highness)’ 혹은 각하 등으로 부르자고 했을 때 맹렬히 비판했다.

정찬 자리의 화제는 새로 구성될 연합정부 수반의 명칭으로 좁혀 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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