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4>
안동일 작
미국 독립전쟁이 독립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보마르세의 삶의 길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언덕길, 산악도로로 변하게 된다. 기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면서 부터다. 전호에 보마르세와 미국정부와의 실랑이를 거론 하면서 미국 독립군을 지원 하려다 빚더미에 앉았고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했는데 이는 과장이다. 그의 평전을 썼던 작가들이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그렇게들 썼다.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 이후에도 보마르셰의 재력은 상당했다. 더욱이 이듬해인 84년 피가로의 결혼의 공전의 히트로 이 작품으로 번 인세와 판권 수입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 했다 할 정도로 대단 했다. 그는 그 무렵 사비를 털어 볼테르의 금서들을 인쇄·출판하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 역시 엄청난 자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이듬해 건축한 바스티유 앞의 그의 저택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 중 하나로 꼽혔으며, 정원을 꾸미고 가구와 예술품을 들여놓는 데만 수십만 리브르를 아낌없이 썼다.
미국에 떼인 돈 약 300만 리브르가 뼈아프긴 했지만, 당장 그를 파산하게 만들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것은 만약 미국 새 정부가 의리를 지켜 1780년대 중후반에 300만 리브르를 순순히 황금이나 현물로 상환했다면, 그 돈은 몇년 뒤 고스란히 프랑스 혁명 정부의 국고로 들어갔거나 군중에게 약탈당했을 확률이 거의 100%였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의 일이다. 83년 미국 독립전쟁 승리 이후 그 6년 동안 보마르세는 나름 승승장구를 계속 했고 미국과 관련 특히 존 캐럴의 주교 임명과 관련해 큰 일을 해냈다. 혁명이 일어난 직후에도 파리의 자치 정부 역할을 했던 ‘파리 코뮌 대표단(Assemblé des représentants de la commune de Paris)’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사업가이자 온건파였던 그는 곧 과격해지는 혁명의 흐름 속에서 타깃이 되고 만다.
혁명기 과격파(자코뱅 파)들은 보마르셰의 바스티유 저택을 보며 “백성의 피를 빨아먹은 자의 집”이라며 분노했다. 실제로 그가 망명길에 오르자마자 혁명 정부는 그의 모든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재산을 국유화했다. 미국이 준 돈이 계좌에 있었다면 그대로 혁명 자금으로 몰수되었을 것이다.
물론 보마르셰 입장에서 미국 정부가 야속했던 것은 사실일 게다. 말한대로 미국은 “우리가 보마르셰와 맺은 계약은 ‘상거래’가 아니라, 프랑스 왕실이 보마르셰를 앞세워 우회 지원한 ‘비공식 원조(선물)’였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지급을 미뤘다. 억지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이같은 모르쇠는 새옹지마가 된다. 보마르셰를 비참한 망명객으로 만들고, 아내와 딸을 감옥에 가두고, 전 재산을 몰수한 진짜 ‘가해자’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 정치였고 미국정부의 50년이 걸린 추후 배상은 보마르세 라는 이름이 창창히 존속 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던 것이다.
보마르셰는 미국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피가로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프랑스에 소개 했다가, 그 이념이 폭주한 혁명의 부메랑을 맞아 본국에서 파멸한 자가 부르주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정황 분석일 듯 싶다.
따지고 보면 보마르세는 물심 양면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 가운데 한사람 일 수 있다. 물적으로는 프랑스 왕정의 재정을 파탄나게 했고 심적으로는 피가로 라는 안물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소개해 그들을 각성하게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면서 그야말로 ‘재정적 파산’에 가까운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에 비해 손에 쥔 지정학적·경제적 실익은 허무할 정도로 미미했다.
보마르세의 간언에 설복 당한 루이왕괴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샤를 그라비에(베르젠 백작)과 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참전은 철저히 ‘영국에 대한 복수와 견제’라는 정치적 명분에 치우쳐 있었다.
프랑스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실익이 아닌 ‘심리적 만족감’ 영국의 독주를 막았다는 정신승리였다.
1783년 파리 조약 결과,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강 유역과 카리브해의 Tobago(토바고) 섬, 그리고 뉴found랜드 연안의 어업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는 투입한 전비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전리품이었다.
1763년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북미 대륙(캐나다 등)의 영토를 통째로 빼앗기는 굴욕을 당해야 했던 프랑스는 적국 영국의 가장 소중한 식민지였던 미국을 분리해 냄으로써 영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륙의 세력 균형을 되찾았다는 점에 만족 해야했다.
또 프랑스 수뇌부는 참전해 승리 한다면 막대한 경제적 보상을 기대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프랑스는 미국이 독립하면 영국과의 무역을 끊고 프랑스의 최대 무역국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독립 직후 미국인들은 익숙한 언어, 오랜 신용 관계, 그리고 우수한 품질을 가진 영국 상품과 다시 거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막대한 차관을 대주었지만, 정작 경제적 과실은 전쟁에서 진 영국이 따먹는 황당한 결과가 벌어졌다.
프랑스는 캐나다나 루이지애나 등 과거 잃어버렸던 북미의 핵심 영토를 단 한 평도 되찾지 못했다. 미국 역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 다시 거대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벤자민 프랭클인의 능숙하고 노회한 외교력에 감탄 하게 되는 대목이다.
프랑스가 미국을 돕기 위해 보낸 육·해군 군사력과 무기, 그리고 현금 차관을 모두 합치면 당시 가치로 약 13억 리브르에 달했다. 이 엄청난 재정 지출은 프랑스 왕정에 치명타였다. 전쟁 직후 프랑스 연간 세입의 절반 이상이 미국 독립전쟁으로 진 빚의 ‘이자’를 갚는 데만 쓰였다고 할 정도다.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특권층)에게 세금을 걷으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왕실은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 동안 열리지 않던 ‘삼부회’를 소집하게 되었고, 이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폭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왕정의 전재산을 털어 넣었으나, 그 결과로 생긴 재정 파산과 미국에서 싸우며 ‘자유와 평등’ 사상을 배워온 귀족·군인들(라파예트侯작 등)에 의해 결국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영국의 뺨을 한 대 때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기 집 기둥뿌리를 뽑아버린 극단적인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현대 역사학자들과 프랑스 군부의 방대한 군적부 조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집계되어 있다. 프랑스는 지상군(로샹보 백작의 육군)뿐만 아니라 대서양, 카리브, 아프리카 해안 등 전 세계 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대규모 해전을 벌였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을 돕기 위해 북미 대륙에 보낸 군대 중 2,112명의 전사·병사자를 냈으며, 카리브해 등 전 세계 해전까지 모두 합산하면 최대 1만 5천 명에 달하는 귀중한 청년들의 목숨을 잃었다.
미국 독립전쟁 전체를 통틀어, 미국 독립군(대륙군) 중 ‘순수 전투 중 전사자’는 약 6,800~8,000명 수준이다. 순수 전투 사망자 수는 미국인보다 프랑스인이 더 많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이다.
여기에 말한대로 10억 리브르가 넘는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까지 지출하면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은 파산 직전에 몰렸고, 이는 결국 몇 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게는 가혹한 대가의 악수였던 것이다.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다. 보마르셰는 군중들이 바스티유를 철거하는 모습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지켜볼수 있었다.
1789년 8월 그는 파리 코뮌(자치 위원회) 의원으로 지명된다. 피가로에 열광했던 군중들의 천거에 따른 일어었다.
그러나 워낙 막대한 부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혁명 세력 내부에서 이내 “구체제의 결탁자 아니냐”, “무기를 숨겨둔 것 아니냐” “아직도 왕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과 모함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실제로 참여 직후 인 9월 중순에 김찰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으나 예의 뛰어난 수사학적 웅변으로 무죄를 입증하고 복귀 했다.
그후 3년간 분주하게 이리저리 다니며 개혁에 동참 하려 했으나 타고난 온건파 이자 사업가인 그와 혁명 수뇌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1792년 초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 등 외국 세력과 전쟁을 시작하자, 무기가 부족해졌다. 무기 중개상 경력이 있던 보마르셰는 명예 회복과 돈벌이를 위해 네덜란드에서 소총 6만 정을 구해오겠다며 혁명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대금 지불문제가 게속 꼬이고 배달이 지연되자, 8월말 과격파들에 추동된 성난 군중이 “보마르셰가 적들에게 주려고 무기를 숨겨두었다” 며 그의 대저택을 습격해 약탈하고 그를 롸얄(L’Abbaye) 감옥에 수감한다.
다행히 그의 빼어난 글 솜씨로 쓴 호소문이 발표 되고 친분 있던 시민군 간부 여성의 극적인 도움으로 일주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가 풀려 난 사흘 뒤, 감옥에 남아있던 수천 명의 죄수가 학살당한 ‘9월 학살’이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1793년 무기 조달 임무를 완수하겠다면 어렵사리 다시 유럽 대륙으로 나갔으나, 프랑스 내부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는 졸지에 ‘망명 귀족(반혁명 도망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그는 몇년 동안 영국(스코트랜드)과 독일 (함부르크) 등을 전전하며 비참하고 가난한 망명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의 대 저택과 전 재산은 혁명 정부에 압류되었고, 그의 아내와 딸 또한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
1796년 공포 정치가 끝나고 5인 총재 정부가 들어서자 겨우 파리로 돌아 올수 있었다. 하지만 전 재산은 날아가고 청각까지 거의 상실한 비참한 상태였다. 그때 그가 매달렸던 일이 미국 정부에 대한 소송과 청원 이었다.
1799년 5월 그는 소송을 완결 짓지 못하고, 파리의 쓸쓸한 오두막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67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사이, 기실은 초반 상승 국면에 있던 시기. 그가 한 일 가운데 우리에게 기장 울림을 주는 일은 자신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존 캐럴을 미국 최초 주교로 만든 일이다.
아다시피 가톨릭은 주교를 중심으로 꾸려져 있는 교단이다.
“교황도 결국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는 표현은 교구의 주교를 중심으로 신행과 교회행정 이 이루어지는 것을 규정한 가톨릭 교회법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회가 공중분해 된 암흑기에, 미국이라는 신대륙의 초대 주교로 예수회 출신인 존 캐럴이 임명 되었을까? 이 놀랍고도 역설적인 사건의 막후에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피에르 보마르세라는 두 걸출한 능력가가 파리에서 함께 짠 고도의 외교적 ‘체스 판’이 존재했다.
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의 독립이 확정되자, 미국 가톨릭교회는 막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꽤나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미국 가톨릭은 영국 런던 대목구(Vicar Apostolic)의 관할 아래 있었다. 독립한 미국이 영국의 종교적 지배를 계속 받는 것은 심정적으나 정치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미국 주교를 임명하고 싶은데,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대리인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프랑스 주도의 미국 교회를 만들려 한 것이다.
미 의회,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은 격분했다. “우리가 영국 왕에게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제 프랑스 왕이나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미국 주교는 반드시 ‘미국인’이어야 한다고 버텼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사제는 존 캐럴이었지만, 그는 전 세계적으로 탄압받아 해산된 ‘예수회’ 출신이었다. 프랑스 궁정과 로마 교황청 모두 예수회 출신을 미국의 수장으로 앉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파리의 몽마르뜨르 아지트에서 프랭클린과 보마르세가 머리를 맞댔다. 보마르세는 프랑스 궁정(루이 16세와 베르젠 외무장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당발이었고, 프랭클린은 교황 대사(Nuncio)였던 도리아 팜피일리(Doria Pamphili) 대주교와 친분이 두터웠다.
” 피에르군 , 로마 교황청이 캐럴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네. 그놈의 예수회 낙인 때문이지. 프랑스 국왕도 눈치를 보고 있고.”
보마르세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 했다.
“박사님, 신을 섬기는 자들이나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나 두려워하는 건 똑같습니다. 교황청은 예수회가 신대륙에서 부활할까 봐 무서운 것이고, 국왕은 통제 안 되는 사제가 무서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캐럴을 ‘예수회의 생존자’가 아니라, ‘독립 미국의 성자’로 포장하는 겁니다. 베르젠 백작의 입은 제가 막을 테니, 박사님은 교황 대사의 잔에 와인을 채우십시오. 구체제가 부순 예수회의 씨앗이, 신대륙의 벌판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로 자라나는 모습을… 이 피가로가 대본을 짜보겠습니다.”
보마르세는 외무장관 베르젠을 찾아가 특유의 정세 분석으로 설득했다. 팔랑귀 국왕의 내락을 받은 후 였다.
“장관님, 프랑스가 미국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프랑스인 주교를 억지로 밀어 넣으면, 영국의 개신교도들보다 더 독한 미국의 반가톨릭 정서가 폭발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 자체가 흔들립니다. 차라리 프랭클린박사가 미는 ‘친프랑스파 미국인’을 앉히는 게 상책입니다.”
보마르세의 이 정밀한 조언 덕분에 프랑스 왕실은 미국 주교 임명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불간섭 선언’을 하게 된다. .
프랭클린은 파리 주재 교황 대사에게 존 캐럴을 추천하는 유명한 외교 각서를 보낸다. 이때 보마르세는 자신의 정보망을 가동해 교황청 내부의 분위기를 프랭클린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보마르세는 예수회 해산령(1773년)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황청이 ‘예수회 복권’을 두려워하면서도 신대륙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간파했다. 그는 프랭클린에게 “존 캐럴이 예수회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미국 시민이자 훌륭한 사제’라는 점을 부각해야 교황청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는 출구 전략을 제공했다.
존 캐럴이야 말로 왕권과 이성주의자, 얀세니스트들에 의해 자신이 몸담았던 예수회가 파괴되는 피눈물 나는 역사를 겪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신을 박해했던 구체제(프랑스 왕정)의 핵심에 있던 보마르세와, 이성주의자인 프랭클린의 막후 도움으로 1784년 미국 가톨릭 고위 성직자(Superior), 그리고 1789년 초대 볼티모어 주교로 임명된다. 교회가 버린 예수회 사제를, 세상의 정치가들이 구해내 미국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것이다. 고위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과 신조가 마음에 걸렸지만 대의를 위해 존 캐럴은 주교직을 수락했다. 그의 주교 서품식은 의외로 영국에서 거행된다. 이부분은 따로 전한다.
보마르세가 존 캐럴을 돕기 위해 분주히 뛴 이유는 개인적 친분과 미국측의 외교적 청탁 때문이 아니었다. 보마르세 본인이 바로 “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비록 해산되어 추레한 평복을 입고 있지만 그 정신만큼은 도도한 존 캐럴에게서, 보마르세는 구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자신의 분신(피가로)을 보았던 것이다. “억압 받고 탄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는 예수회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민중 극작가 특유의 오기였던 것이다. .
예수회 해산이라는 거대한 불행이, 신대륙 미국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주춧돌이 되는 “화가 굴러 복이 되는” 이 매혹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신은 어떻게 설계 했을 까?
존 캐럴의 주교 서품과 프랑스 혁명 격동의 순간 순간의 에수회 회원 보마르세와 프랑스 천주교의 모습은 다음호에 알아 보기로 한다. 그 정중앙에 우리로서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산금 문제로 돌아 온다.
보마르세 유족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정산금을 받아낸 과정은 무려 50년 넘게 이어진 법적·외교적 공방전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정부가 대외적인 채무이자 자신들의 행정적 실책(혹은 억지)을 결국 인정하고 대금을 지급한 역사적인 첫 번째 청구권 해결 케이스 중 하나로 꼽힌다. 그게 미국 다운 일이다.
지급 합의는 1835년 에 이루어 졌고 정산 절차 및 최종 지급 완료는 1837년까지 이어졌다. 보마르세와 그 유족들이 원래 요구했던 금액은 이자를 제외하고도 약 300만 리브르에 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80만 프랑을 받고 모든 청구권을 영구히 포기하는 조건(Take-it-or-leave-it)으로 합의됐다.
왜 지급이 50년이나 걸렸나?
벤자민 프랭클린이 종전 직후인 1783년,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 백작과 정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가 1778년 조약 이전에 미국을 위해 총 300만 리브르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의회에 알렸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 대리인이었던 그랜드(Grand)의 장부에는 200만 리브르만 기록되어 있었다. ” 그렇다면 나머지 100만 리브르는 어디로 갔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고, 이후 구버너 모리스(Gouverneur Morris) 라는 미국 외교관이 프랑스 외무부 장부에서 1776년 6월 10일, 보마르세가 국왕으로부터 수령한 100만 리브르의 영수증을 찾아냈다.
미국 재무부는 즉시 태세를 전환 해 보마르세에게 타전 했다.
“덩신(보마르세)이 프랑스 왕에게 받은 그 100만 리브르는 우리(미국)에게 주라고 준 돈이니, 우리가 당신 에게 줄 물자 대금에서 그 100만 리브르만큼은 까고(상쇄하고) 주겠다.”
이에 보마르세는 격렬히 반박했다.
“그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그냥 주라는 돈이 아니라, 내가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무역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내게 준 ‘사업 자본금(Bounty)’이다. 나는 이미 이 돈의 사용처를 프랑스 국왕에게 완벽히 소명했다. 미국 정부가 관여할 돈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 의회는 아서 리와 헌터 등의 주도를 거쳐 1787년, 오히려 보마르세가 미국 의회에 돈을 토해내야 한다는 적반하장식 결론을 내렸다.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이다.
보마르세가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과 딸(Eugénie)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19세기 초 들어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마르세 유족의 편에 서서 미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보마르세가 받은 100만 리브르는 미국에 준 선물이 아니며, 그는 프랑스 정부에 책임을 다했다”고 공식 보증했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일종의 양심 선언이 나왔다.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해 법률가 출신의 미국 정객들도 “미국 재무부의 정산 방식은 법적 근거가 없으며, 국가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유족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독립의 아버지 찰스 캐럴도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신의를 위해 그 돈을 해결해야 한다고 후배 정치인 의원들을 설득했다.
1835년 앤드루 잭슨 행정부 시절, 미국과 프랑스 간의 해상 노획물 배상금 등 여러 외교적 채무 정산이 맞물리면서 미국 의회는 마침내 보마르세 유족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의회는 유족들에게 80만 프랑을 최종 제안했고, 수십 년간 고통받던 유족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1837년 지급 완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이 국가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신용과 외교적 압박에 밀려 자신들의 행정적 과오와 억지 주장을 사실상 철회하고 배상(위로금의 형태를 빌린 타협적 정산)을 진행한 기념비적인 첫 케이스가 다. 당시 프랑스의 외교적 압박이 없었다면 찰스 캐럴이나 알렉스 헤밀턴 같은 양심가의 충언이 없었다면 미국 정부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은, 국제 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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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프랑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1795년 프랑스 혁명 정부는 복잡한 구체제 리브르를 폐지하고 10진법 기반의 ‘프랑(Franc)’을 새 화폐로 도입했다. 이때 기존의 1 리브르를 거의 1대 1 비율로 교환해 주었기 때문에, 당대 문헌이나 19세기 정산 기록에서는 리브르와 프랑을 사실상 같은 가치의 단위로 혼용해서 표정하고 있다.
과거의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단순 물가상승률(CPI)만 계산하는 방식과, 당시의 실질 구매력(노동 가치, 금·은 현물 가치)을 기준으로 보는 방식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크다.
미국 정부가 보마르세 유족에게 지급한 80만 프랑은 당시 환율로 약 15만 달러였다. (당시 1달러 = 약 5.3프랑) 1835년의 15만 달러를 2026년 현재 미국 달러의 가치로 인플레이션만 단순 계산하면 약 5백70만 달러가 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계산기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공산품 가격이 폭락한 현대의 착시를 반영하지 못하므로, 당대인들이 체감한 ‘노동 가치와 생활 물가’로 환산하는 것이 역사 서술에서는 훨씬 사실적이다.
18세기 후반~19세기 초 프랑스의 물가 지표를 기준으로 보면 80만 리브르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대 숙련된 석공이나 목수 같은 기술자의 하루 임금이 약 2~3 리브르였다. 80만 리브르는 기술자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약 800년~1,000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 당대 프랑스나 미국의 중상류층 가정이 1년 동안 하인을 두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간 3,000~5,000 리브르 수준이었다. 80만 리브르는 자산가 가문이 대를 이어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막대한 재산이었다.
보마르세가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 쏟아부은 원금(수백만 리브르)에 비하면 1835년에 유족들이 받아낸 80만 리브르(프랑)는 일종의 ‘눈물의 삭감 합의안’이었지만 이 돈을 기반으로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현대 프랑스의 명문가 반열에 어를 수 있었다.
보마르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손들의 역사는 “미국을 상대로 한 끈질긴 법적 투쟁의 승리”이자 “프랑스 문화·정치 주류 사회로의 화려한 안착”으로 요약된다.
보마르세의 외동딸인 아멜리 외제니(Amélie-Eugénie)와 그녀의 후손들이 걸어간 길은 19~20세기 프랑스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보마르세에게는 세 번의 결혼이 있었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세 번째 아내인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아멜리 외제니 카롱 드 보마르세(1777~1832)가 유일했다.
아버지가 파산 상태로 사망하고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 재산이 압류당했을 때, 외제니는 어머니와 함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녀는 1796년 관료 출신인 앙드레 투생 들라뤼(André Toussaint Delarue)와 결혼했는데, 남편 역시 아내를 도와 평생을 미국 정부와의 채권 싸움에 바치게 된다.
외제니는 평생을 미국의 오리발과 싸우며 수십번 청원서를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미국 의회에서 80만 프랑 지급 법안이 최종 통과(1835년)되기 불과 3년 전인 1832년에 눈을 감았다. 결국 미국이 지급한 거액의 정산금은 그녀의 자녀들(보마르세의 외손자들)에게 돌아갔다.
이 시기 그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속권을 받기 위해서러도 ‘보마르세’라는 뜻깊은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모계 성씨 계승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외손자 샤를 에두아르 (1799~1878)는 프랑스 군 고위 장교 이자 레지옹 도뇌르 훈장(Commandeur)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법원에 청원을 넣어 가문의 성씨를 들라뤼에서 ‘들라뤼 카롱 드 보마르세(Delarue Caron de Beaumarchais)’로 공식 확정하는 왕실 법령(1853년 나폴레옹 3세 칙령)을 받아냈다. 이로써 보마르세의 이름은 끊기지 않게 되었다.
보마르세의 후손들은 대대로 학계, 문학계, 그리고 정·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다.
보마르세는 비록 말년에 억울함과 파산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그의 아내와 딸이 미국 정부로부터 끝내 받아낸 80만 프랑의 정산금은 후손들이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재기하고 도약하는 든든한 경제적 발판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 후손들은 2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최고의 문학 가문이자, 대사(大使)를 배출한 외교 가문, 그리고 세계 최고급 와인 제국을 이끄는 명문가로 당당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 속 주인공처럼, 어떤 역경 속에서도 유쾌하게 살아남아 승리하는 보마르세 특유의 DNA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그중 대표적인 이가 외교관 장 드 보마르세 (1912~1981)다. 그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전설적인 외교관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에서 활약했고, 이후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주영국 프랑스 대사 등 외교관의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할아버지가 스파이이자 비밀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재능을 직계 후손이 그대로 물려받은 셈.
장-피에르 드 보마르세 (Jean-Pierre , 1944~현재)는 오늘날 프랑스 문학계의 거두 중 한 명이다. 최고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으로, 자신의 선조인 보마르세의 전기를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 사전》, 《프랑스 극문학 걸작선》 등을 편찬한 저명한 서지학자이자 교수입니다. 게다가 장-피에르는 세계적인 부호이자 와인 명가인 무통 로스차일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가문의 여주인이었던 필리핀 드 로스차일드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이자 보마르세의 직계 후손인 줄리앙 드 보마르세 드 로스차일드(Julien de Beaumarchais de Rothschild, 1971~현재)는 현재 보르도 와인 제국의 핵심 경영자이자 예술 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이 귀족의 성씨인 ‘드 보마르세(de Beaumarchais)’는 그가 위조하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특유의 매력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20대 초반 궁정에 드나들던 그는 한 부유한 미망인(프랑수아 가르디)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왕실 방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땅의 이름이 바로 ‘보마르세(Bosc Marchais, 아름다운 숲)’였다.
카롱은 결혼하자마자 이 땅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카롱 드 보마르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결혼 후 불과 10개월 만에 아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점이다. 귀족 사회는 그를 “아내를 독살하고 성을 훔친 사기꾼”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법적으로 그 이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굳혔다.
귀족들은 그를 평생 ‘시계공 카롱’이라 비하했지만, 그는 스스로 창조한 ‘보마르세’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았다. 혈통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분을 창조한 첫걸음 이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