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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7)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대주교 캐럴과 시계공 출신 고관 보마르세 <4>

안동일 작 

그런데 예수회는 몇번 언급 했듯이 1760년대 들어서  프랑스에서 부터 호된 서리를 맞는다.
프랑스 내 예수회(Jesuits)의 해산 과정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을 넘어,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교황권 사이의 복잡한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과정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 등)들이 주도한 반교회 정서와 절대왕정의 중앙집권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또 예수회의 교만도 힌 몫했다.

프랑스에서 예수회는 강력한 교육적 영향력과 국왕의 고해신부로서 갖는 정치적 입지 때문에 오랫동안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왕권과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에 경도 돼 있던 주류 세력은 교황을 중심으로 일사 분란하게 뭉쳐있는 예수회를 ‘국가 속의 국가’로 간주하며 비난 하고 때로는 적대시했다.
에수회 해산 명령의 결정적인 계기는 1760년에 일어난 라 발레트 선교사 사건 이었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사 라 발레트 신부의  선교회가 파산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예수회가 무오류가 아니라는 것과 과유불급,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

앙투안 라 발레트 신부는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의 예수회 선교단 책임자로,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상업 및 무역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설탕 무역, 노예 매매, 농장 경영 등 대규모 상업적 투자를 진행해 ‘아시엔다'( 부락형 대형 농장)를 꾸려넸다. 하지만  해적선의 준동과  7년 전쟁(1756~1763) 중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760년 초 파산을 신청하면서 그가 속한 프랑스 예수회 본회가 이 부채를 떠안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
예수회는 라 발레트의 개인적인 일탈이라며 채무 이행을 거부했으나, 채권자들은 이를 예수회 전체의 사업으로 보고 소송을 제기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회의 재정과 운영 실태를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예수회의 불법적인 상업 활동과 독자적인 조직 운영이 드러났다.

이 스캔들은 예수회를 혐오하던 얀센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명분을 주었고, 결국 1762년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자산을 압수하고 프랑스 내에서 조직을 해체하는 판결을 내렸다.   더욱이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회헌(Constitutions)을 정밀 조사했고, 이를 “왕권에 반하는 위험한 문서”로 판정했다.
1762년 4월 6일 프랑스 법원은 판결문에서 예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온 단체이다. …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 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를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고등법원의 강력한 압박과 여론에 밀려 1764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예수회의 활동을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가톨릭 열강들의 압력이 거세지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결국 1773년 칙서 ‘주님이시요 구세주’ (Dominus ac Redemptor)를 발표해 전 세계적으로 예수회를 공식 해산했다.
많은 예수회 신부들이 교구 신부로 흡수되거나 다른 수도회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부는 비밀리에 공동체를 유지하며 복권의 때를 기다렸다.  캐럴 신부가 추레한 평복을 입고 볼티모어 항에 내려 찰스 캐럴과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던 때가 바로 이때 였다.

예수회는 1814년이 되어서야 복권 재건 되는데 예수회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약 40년 동안 예수회는 전통 가톨릭 국가가 아닌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프로이센(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예수회의 뛰어난 교육 역량을 높이 평가해 교황의 해산 칙령 집행을 거부하고 예수회 신부들이 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보호막을 제공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보수 회귀적인 ‘메테르니히 체제’가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 회복과 교육 정상화가 시급해졌다. 교황 비오 7세는 칙서 ‘모든 교회에 대한 배려’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의 전 세계적인 복권을 선언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붕괴되었던 교육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예수회 신부들이 다시 초빙되었다. 이후 왕정복고기 동안 이들은 다시 강력한 교육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예수회의 일관된 목표는 교육과 선교를 통한 예수 일꾼 양성이었다. (사진 설명,  맨위 예수회와 존 캐럴이 세운 미국의 조지 타운 대학교, 가운데, 프랑스 해변의 예수회 수도원, 맨 아래, 카리브해의 아시엔다)    

1760년대 중반 예수회의 해산은 특히 프랑스 가톨릭 교육 시스템에 공백을 가져왔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근대적인 국가 주도 공교육 체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
그런데 보마르세와 캐럴 형제가 비교적 자유 분방하게 활동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회가 해산 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선 천주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세상사는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복이 되는 법이다.

참, 지난번에 보마르세가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 이후에는 진학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다시 살펴 보니 그가 파리의 보베 대학(Collège de Beauvais)을 청강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회 학교들이 폐쇄 된 이후의 시기였다. 그곳 에서 그는 논리학과 수사학, 희곡 작법을 심층적으로 배웠다고 첫 희곡 외진 (미국 발음 유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보베 대학 (Collège de Beauvais)은 18세기 프랑스의 엘리트 배양소였다. 14세기(1347년)에 보베의 주교였던 장 드 도르망(Jean de Dormans)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파리 대학(소르본)의 중심지인 ‘라탱 지구(Quartier Latin)’에 있었다.

보베 대학은 파리 대학교(Universitas Parisiensis)를 구성하던 수십 개의 ‘콜레주(Collège)’ 중 하나였다. 당시의 소르본 역시 그 콜레주 중 하나(신학 특화)였다. 1762년 예수회가 해산 추방당하면서 파리 학정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63년 보베 대학을 비롯한 파리의 수많은 소규모 콜레주들이 루이 르 그랑(당시 예수회에서 몰수되어 파리대 본부가 됨)대학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옛 보베 대학의 역사적 문서, 판화, 서적 등 수많은 아카이브는 ‘파리 소르본 대학교 종합도서관(Bibliothèque de la Sorbonne)’의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인 NuBIS에서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

당시 보베 대학의 교육은 예수회의 교육 철학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루이 르 그랑 출신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수사학, 논리학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던 것이다. 당초 예수회는 파리 대학(소르본) 교수들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통합 되면서 보베의 교수진은 많은 인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서 온 이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실력과 성가는 어디 가지 않는법.
수사학(Rhetoric)은 상대를 설득하고 논리로 제압하는 일종의 기술이다. 보마르셰가 훗날 법정에서 보여준 화려한 변론술이 여기서 닦였던 것이다.
보베와 파리대학 동문들의 면면을 보면 보마르셰뿐만 아니라, <마농 레스코>를 쓴 아베 프레보, 그리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맥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온건파 카미유 데물랭. 혁명의 법학자 루이 생쥐스트 등 혁명기의 거의 모든 정치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꼭 이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보마르세도 혁명 초기, 혁명위원회 위원 한자리를 차지했다.

한 마디로 ‘구체제의 학문을 배우지만, 그 학문으로 구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칼날’을 갈아주던 곳이었다.
보마르셰가 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아마도 시계공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묘한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논리학 수사학을 발휘하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너희는 가문을 배우지만, 나는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배운다.”

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이었다는 것은 보마르셰의 자유분방함과 ‘피가로’다운 경계인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귀족 자제들 틈에서 그들의 지식을 ‘훔쳐 배우는’ 천재적인 시계공 아들의 모습은 바로 파가로의 모습이었다.
예수회는 ‘세상 속의 수도회’를 지향하며 정치, 과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강조했다. 보마르셰가 보여준 ‘기지(Wit)’와 ‘막후 외교’는 예수회의 교육적 학풍과 매우 잘 어우러진다. 당시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은 해산 이전에는 물론, 해산 이후에도 예수회가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마르셰가 이런 예수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피가로’라는 혁명적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구체제의 지식을 습득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러니 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의 가톨릭 신앙은 ‘신비주의’보다는 ‘사회적 계약’에 가깝다고 운위된다.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종교는 에티켓이자 사회적 신분이었지, 금욕적인 삶을 뜻하지 않았다. 보마르셰가 수많은 연애 사건과 소송에 휘말리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것이 그 증좌다.
“하나님은 경외하지만, 정치에 개입하는 교회는 혐오한다”는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종교적 권위를 비웃는 장면들이 나오는 이유도, 프랑스인들이 신앙과 교회의 권력을 분리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보마르셰는 후일 “나는 예수회의 제자로서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고, 피가로로서 그 세상을 뒤집는 법을 실천한다” 고 기염을 토했다.
존 캐럴은 젊은 보마르셰가 루이 르 그랑의 복도에서 신학교로 떠나기전의 자신과 마주치며 “존, 신을 섬기는 법과 세상을 속이는 법은 결국 한 끗 차이가 아니겠니?” 하는 깜짝 놀랄 농담을 건네는 장면을 여러 차례 회고 했다.

프랑스인들의 신앙관은 대로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묘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흔히 ‘갈리아주의(Gallicanisme)’라고 부르는데, 신앙은 로마 가톨릭을 따르되 세속적인 통치와 권력은 프랑스 국왕(혹은 국가)이 독자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아주 독특한 태도다. 그러면서 가톨릭 에서 가장 교조적이고 금욕 경건을 내세웠던 얀세니즘이 기장 발흥했던 곳도 프랑스였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출신 교황은 총 16명으로 집계된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14세기 ‘아비뇽 유수’ 시기다. 이 시기에는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렀고, 이때 선출된 7명의 교황은 전원 프랑스인이었다.
999년에 선출된 실베스테르 2세가 프랑스 출신 첫 교황 이었다. 그는 수학과 천문학에 능했던 학자 교황으로 꼽힌다. 그후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제창한 어반 2세가 프랑스 출신 교황.
아비뇽 시기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이 시기는 사실상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권이 놓였던 시기로, 프랑스인들이 교황청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던 자부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인들에게 가톨릭은 영혼의 구원인 동시에, 유럽의 패권을 다투는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이런 ‘현실적인 신앙관’이 보마르셰 같은 인물을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보마르세의 피가로 3부작(정확히는 앞의 두 작품)이 프랑스 혁명 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된다. 피가로는 보마르세의 분신이기도 하면서 당시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 했던 캐릭터다.  작가는  위트 와 기지 넘치는 저항정신 그리고 자유사상 평등 정신을 뭉뚱그려 ‘피가로 정신’이라고 명명 하고 싶다.
실제로 역사학자들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그를 단순한 희극 캐릭터가 아닌,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고한 나팔수’로 평가하고 있다.

피가로 정신 (L’Esprit de Figaro)은 단순히 ‘똑똑한 하인’의 재치를 넘어,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다. 피가로는 신분적 열세를 폭력이 아닌 오직 지력과 말솜씨로 극복한다. 위트와 기지 (L’Esprit)다.
“백작님은 태어나는 수고만 하셨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지혜를 짜내야 했습니다”는 그의 독백은 특권층의 무능을 날카롭게 비웃는 피가로 정신의 정수다.
그의 저항 정신 (La Résistance)은 부당한 권력에 대해 순종하는 대신, 판을 짜고 상황을 통제한다. 이는 수동적인 민중이 능동적인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자유와 평등 (Liberté et Égalité)을 내 세우는 그는 혈통이 아닌 능력과 노력에 따른 가치를 주장한다. 기회 균등과 “능력 위주의 사회”를 꿈꿨던 당시 부르주아와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며,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계몽주의 사상을 에수회 적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러려니 난관도 많았다.
보마르셰는 평생 수많은 송사에 휘말리며 기득권과 싸웠는데, 피가로가 극 중에서 내뱉는 울분과 논리적인 반박은 그가 법정에서 실제로 겪었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피가로의 결혼 제5막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독백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폭탄과도 같았다.
“귀족이라니! 당신은 그저 태어나는 수고만 했을 뿐이야. 그 외에 당신이 한 일이 뭐가 있지?”
(Noblesse, fortune, un rang, des places : tout cela rend si fier ! Qu’avez-vous fait pour tant de biens ? Vous vous êtes donné la peine de naître, et rien de plus.)
이 구절은 피가로 정신의 핵심인 ‘평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런 노력 없이 혈통만으로 권력을 쥐는 귀족 계급의 허상을 꼬집은 것이다.  . “나는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야 했는데, 당신은 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지배하려 드느냐”는 일침은 당시 관객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그 어떤 찬사도 의미가 없다.”
(Sans la liberté de blâmer, il n’est point d’éloge flatteur.)
유명한 문장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절, 피가로(혹은 보마르셰)는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무조건적인 찬양은 아부일 뿐”이라는 냉철한 인식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나만큼의 생존 능력을 갖춘 하인을 백 명만 모아도, 지난 백 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던 모든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
피가로는 단순히 화만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알고 있었다. 실무 능력은 물론 도덕성도 없는 통치자 귀족들 보다, 밑바닥에서 구르고 깨지며 단련된 민중의 지혜가 훨씬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는 시민 사회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공연 대본을 본 루이 16세는 “이 연극이 상연된다면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려야 할 것”이라며 격분해 상연을 금지 했다. 하지만 피가로의 이 날카로운 위트들은 이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피가로 정신’은 바로 “말 한마디로 거대한 성벽을 허무는 유쾌한 파괴력”이었던 것이다.
“피가로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후일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말이다.

오늘날의 프랑스인들도 여전히 피가로를 사랑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프랑스인의 DNA에는 여전히 피가로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진보 성향의 르몽드와 더불어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도 일간지가 바로 <르 피가로(Le Figaro)>다.  “비판할 자유가 없다면 찬사에도 의미가 없다”는 보마르셰의 대사를 제호 아래 새겨두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권력에 대한 냉소와 풍자(Satire)를 지적 유희이자 시민의 의무로 여긴다. 파업이나 시위 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거침없는 자기표현 방식은 현대판 ‘피가로 정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 덕분에 피가로는 클래식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매력적인 프랑스적 인간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너무도 다르다.
보마르셰는 미국 독립전쟁의 ‘숨은 일등 공신’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역할을 했다. 사라토가 전투의 무기 지원은 그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이 불가능했던 초기, 보마르셰는 ‘로드리그 오르탈레스와 동료들’을 통한 대규모 지원으로은 사라토가 전투 이후 미국 독립군의 ‘체계화’에 기여했다.
사라토가 승리 이후 1778~1779년의 대규모 수송 으로 보마르셰는 미국이 정규군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군복 3만 벌과 신발 수만 켤레를 보냈다. 당시 미군은 맨발로 눈 위를 걷는 처참한 상황이었는데, 보마르셰의 보급품이 도착하며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무기만 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선진적인 포병 기술 교본을 번역해 보냈고, 유능한 기술자들을 직접 고용해 미국으로 밀항시켰다. 이는 미국 국방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총기뿐만 아니라 대포, 화약, 군복, 심지어 신발과 텐트까지 보급했다. 특히 프랑스산 고성능 화약은 미군이 사용한 화약의 약 90%에 육박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10여 척의 대형 상선을 구입해 함대를 운영했다. 보잘것 없었던 독립군 해군력 증강의 수훈갑이다. 그의 함대에는 6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열함 ‘르 피에르 로드리그(Le Fier Rodrigue)’호도 있었다. 이 배들은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군수품을 실어 날랐으며, 때로는 영국함과 직접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슈토이벤(Steuben) 남작이나 라파예트(Lafayette) 장군 같은 유능한 유럽 장교들이 미국으로 건너 와 군사 고문 을 맡고 전장을 지휘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또 벤자민 프랭클린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보마르셰는 단순한 무기 상인이 아닌 정치적 조언자이자 정보원이었다.
보마르셰는 스파이망을 가동해 영국 내부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를 프랭클린에게  즉각 전했다. 프랭클린이 프랑스 외교부 장관 베르젠(Vergennes) 백작의 신뢰를 얻도록 막후에서 여론을 조성한 것도 보마르셰였다.
보마르셰의 화려한 저택은 프랭클린과 프랑스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미국 독립의 당위성을 논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기지로 미국 독립이 프랑스의 국익(영국 견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퍼뜨렸다.

보마르셰와 프랭클린은 겉으로는 ‘극작가’와 ‘철학자’로 만났지만, 실제로는 영국 정보국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가짜 뉴스(Disinformation) 전략은 매우 돋보인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과 짜고 영국 스파이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미국 독립군은 곧 항복할 것”이라거나 “프랑스는 무기 지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영국이 방심한 사이 비밀리에 함대를 출항시키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은 무기 대금이나 수송 일정을 논할 때 철저히 암호를 사용했다. 보마르셰는 프랭클린을 “나의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불렀고, 프랭클린은 보마르셰의 유령 회사(로드리그 오르탈레스)를 정부가 아닌 ‘민간 독지가의 자선 활동’으로 포장하여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1783년 협상 국면에서 그는 베르젠 백작과의 끝장 토론으로 미국의 편을 들었다. 보마르셰는 파리 협정 전후로 궁정의 루이 15세와  외무장관 베르젠을 끈질기게 찾고 또 찾아가 , 미국과의 동맹을 끝까지 유지해야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설득했다.  ‘비폭력적 기지’의 관점에서 볼 때, 보마르셰의 미국 독립 전쟁 참여는 “총칼보다 무서운 물류와 외교의 승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1783년 파리 협정으로 미국 독립이 확정되자 보마르셰는 환희에 찼으나, 곧 대륙회의의 냉담함에 직면해 너무도 당혹해야 했다. 이때 그가 프랭클린과 미 대륙회의에 보낸 서신에는 ‘피가로’다운 당당함과 처연함이 공존하고 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 내 재산과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의 배들을 ‘선물’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기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내 가족의 생계까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보마르셰는 미국에 약 500만 리브르라는 거액을 청구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사였던 아서 리(Arthur Lee)는 보마르셰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무기와 군수품 들은 프랑스 정부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조차 정치적 입장이 난처해져 보마르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보마르셰는 폭력이 아닌 ‘계약과 기지’로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그 대가로 가장 가혹한 경제적, 정치적 배신을 당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희곡을 더 써냈던  그의 모습이야말로 ‘피가로 정신’의 가장 고결한 완성이 아닐까 싶다.

작가 에게는 두 장면이 유난히 떠오른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트레이드 마크인 너구리 털모자와 어딘지 1% 부족한 화려한 귀족 복장의 보마르세의 모습이 대비되는 가운데, 두 사람이 파리 몽마르뜨르의 카페에서 체스판을 바탕 삼아 식민지 해상과 육지에거의  군대의 이동과 보급 경로를 논하는 장면.

그리고 미국 독립을 축하하는 파리의 센 강변의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정작 자기 배들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한 보마르셰가 혼잣말로 “피가로,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농담을 하겠나?” 읊조리는 모습.

미국이 최종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이 신대륙에서 실현된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자신이 창조한 ‘피가로’가 구 체제를 비웃었듯, 미국의 승리는 왕정에 대한 시민의 승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가끔은 흔들렸던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다시 정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승리 직후, 영광의 주역들이 축배를 들 때 정작 뒤편에서 파산 위기에 몰려 빚 독촉을 받는 보마르셰의 모습은 ‘피가로 정신’이 가진 고독한 이면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닐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때 그가 외쳤던 말이 아닐까? 실제로 그의 고단한 역정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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