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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63)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닥터 프랭클린’ 부자의 산과 골 3

안동일 작

독립선언 직전 필라에 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이 무렵 숨가쁘게  물밑에서 전개 되던 스파이전을 방불케 하는 파리의 미국 독립운동으로 눈을 돌리기 전 감깐 쉬어 간다는 의미에서 건국 아버지들의 ‘속 썩인 아들들’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우리의 주인공 찰스 캐럴도 여기서 비켜서지 못한다. 하늘은 사자에게 날개를 주지 않았다더니…

조지 워싱턴은 친자식이 없었기에 부인 마사 워싱턴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하지만 그 공들인 보람이 무색했다. 의붓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 (John Parke Custis, 1754년생, 일명 ‘잭키(Jacky))는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워싱턴의 속을 썩였다. 워싱턴이 “제발 공부 좀 해라”며 편지로 타이르고 엄하게 꾸짖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독립전쟁 중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며 워싱턴에게 슬픔을 안겼다.

토머스 제퍼슨이야 말로 자식 운이 매우 박복했다. 아내 마사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오직 딸 마사(Martha)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제퍼슨은 어린 아들들을 모두 병으로 잃으며 가문을 이을 적통 후계자를 두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흑인 하녀 샐리 헤밍스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2대 대통령이자 독립 혁명의 기관차 존 애덤스는 아들들 때문에 가장 고통받은 인물 중 하나다. 둘째 아들 찰스 애덤스 (Charles Adams, 1770년생)는 하버드를 졸업했으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심한 불화를 야기했다.  격노한 존 애덤스는 아들을 “미친 야수”라 부르며 절연했고, 찰스는 아버지가 현직 대통령이던 1800년, 30세의 나이로 간경화로 사망했다.
셋째 아들 토머스 보일스턴 애덤스 (Thomas Boylston Adams, 1772년생) 역시 알코올 중독과 재정적 무능으로 평생 고생하며 아버지의 평생 근심거리가 되었다.

‘혁명의 불꽃’이었던 새뮤얼 애덤스 그도 아들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아들인 새뮤얼 애덤스 주니어 (Samuel Adams Jr., 1751년생)는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중 얻은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평생 아버지의 기대만큼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788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로교의 하나님이 미국 독립을 위해 스코트랜드에서 식민지로 보내 주었다’는 존 위더 스푼 목사(프런스턴대 총장)의 경우도 자식복 만큼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 위더스푼 목사의 아들들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목사는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세 명(제임스, 존, 데이비드)이었다.
위더스푼 목사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높은 도덕적·학문적 기준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는 사뭇 드라마틱하다.

장남 제임스(James Witherspoon)는 비극적인 전쟁 영웅으로 꼽힌다. 가장 전형적인 ‘건국 아버지의 아들’다운 길을 걸으려 했던 아들이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륙군에 입대하여 나다니엘 그린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1777년 저먼타운 전투(Battle of Germantown)에서 전사했다.  위더스푼 목사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도,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차남 존(John Witherspoon Jr ) 의사였다. 형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의학을 공부하고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아버지의 엄격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1795년경 선박을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 사건은 노년의 위더스푼 목사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삼남 데이비드(David Witherspoon): 법률가로 정착해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아들이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법률가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제임스 아델(James Iredell) 밑에서 공부하며 자리를 잡았다. 특이 사항으로는 나중에 맏형 제임스의 미망인과 결혼 한 일이다.

다혈질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비극은 자식이 속을 썩였다기 보다, 아버지를 너무 닮아 발생한 참극에 가깝다.  장남 필립 해밀턴 (Philip Hamilton, 1782년생)은  해밀턴이 가장 아끼던 천재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의 명예를 모욕하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19세에 사망했다. 이는 몇 년 뒤 해밀턴 본인이 결투로 사망하는 비극의 복선이 되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최장수 인물이었던 찰스 캐럴 그도 아들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들 찰스 캐럴 주니어 (Charles Carroll Jr., 1775년생)는 일명 ‘찰스 캐럴 오브 홈우드’로 부렸는데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아내를 학대하고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다. 결국 아버지가 죽기 7년 전, 술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한번 인용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다.   국가의 기틀을 세우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인지, 아니면 위대한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인지, 건국 영웅들의 가정사는 후대에 전해지는 영광만큼이나 어둡고 쓸쓸한 구석이 많다.  역사가들은 건국 아버지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가정’을 돌보느라 정작 본인의 자식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거나 소홀했던 면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성인(Saint)의 자식으로 사는 것보다 죄인의 자식으로 사는 게 속 편하다”**는 당시의 자조 섞인 농담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으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선다.

참 한가지 빼 먹으면 안될 일이 차남과 삼남 때문에 속썩었던 독립의 기관차 애덤스 선생은 그래도 장남은 잘 두었다는 사실이다.  건국 아버지들의 아들 ‘잔혹사’에서도  그애게 존 퀸시 애덤스(1767년생)라는 걸출한 장남이 있었다는 점은 후인 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 대통령이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을 제대로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존 퀸시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심 이면에 차가운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복합적인 ‘엘리트 교육의 부작용’과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원인이었다.  퀸시 애덤스가 아버지를 어려워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너는 위대해져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다.

존 애덤스와 아비게일은 장남인 존 퀸시를 아주 어릴 때부터 ‘미래의 지도자’로 찍어놓고 무섭게 몰아붙였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럽 외교 현장을 누벼야 했고, 부모님으로부터 “네가 잘못하면 가문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편지를 끊임없이 받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따뜻한 ‘아빠’라기보다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엄격한 감시자였다.
앞서 언급한 찰스와 토머스, 두 동생이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지는 과정을 보면서 존 퀸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동생들의 타락이 ‘아버지의 엄격함을 견디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자신만은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기계처럼 공부와 일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성격이 매우 냉소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존 퀸시는 아버지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해낸 ‘건국의 황태자’였으나, 정작 본인의 일기에는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숨 가빠 했던 고독한 영혼의 기록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위대했으나 아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이름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다시 델라웨어 강길로 돌아온다.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까지의 강길은 약 35마일(약 55km) 정도다.  돛을 단 샬럿 바지 범선이 순풍과 썰물(Ebb tide)을 타면 평균 4~5노트(시속 7~9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단순히 계산해도 6~8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이 구간은 조수의 영향을 받는 ‘조석 구간’이다. 1770년대 선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계보다 물때였다.  트렌튼에서 필라델피아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썰물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강물 자체의 흐름에 조류의 힘이 더해지면 배가  빠르게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만약 물때를 잘못 맞춰 밀물을 만나면, 배를 강가에 묶어두고 물길이 바뀔 때까지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경우라면 하루가 꼬박 걸리거나 이틀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
벤자민과 존 신부를 태운 샬럿도 물때를 맞추기 위해 쿠퍼스 패리에  정박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타는 승객도 있었고 늦은 점심을 해야 했기도 했다.
쿠퍼스 페리 (Cooper’s Ferry)는  현재의 캠던(Camden) 지역으로, 델라웨어 강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다.   나룻터 바로 앞에는 꽤 좋은 주막(터반, Tavern)이 있었다.
나루터의  페리 터반은 뉴저지 각지에서 온 민병대원, 필라델피아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 영국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 반대로 대륙군의 동태를 살피는 스파이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박사와 신부는 우연히 로버트 모리스를 만났다. 필라델피아 출신 대륙회의 맴버로 벤자민의 심복중 심복인 인물이었다. 대륙회의의 비밀 교신 위원회(Committee of Secret Correspondence)를 주도한 인물.

나루에 내리면서 부터 사람들이 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주막에 들어 섰을 때 깔끔한 정장 신사가 놀란듯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 나왔다. 그가 모리스였다.
“박사님 이게 왠일 입니까?”
그는 와락 안기듯 벤자민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고 벤자민도 반가운 듯 그의 어깨를 안았다.
“바비 자네가 여기 왠 일인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생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금 수척해 지신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반가우이, 자네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회의 소식이나 들어 봄세.”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보고 급히 드릴께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리스는 옆의 존 신부에게 아는체를 해 왔다.
“혹시 존 캐럴 신부님 아니십니까?”
벤자민에게 나섰다.
“ 그렇다네, 인사 하시게 이번에 나와 함께 대표단으로 갔던 존 캐럴 신부님 이시네.”
모리스의 표정이 더 환해 졌다.
“ 아주 잘 됐습니다, 이렇게 함께 뵙게 되다니.”
모리스는 존 신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륙회의 밥 모리스 입니다. 신부님 존함은 자주 들었습니다. 4촌 동생 되시는 찰리하고는 막역한 친구 입니다.”
모리스는 찰스 캐럴을 들먹이며 존 신부에게도 깍듯하면서도 친근하게 나왔다. 실제로도 모리스는 찰스와 꽤 교분이 있었고 벤자민에게 보고할 프랑스 일도 찰스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날 존 신부와의 만남은 그 중요한 일에 황금 날개를 달게 되는 일이 된다. 그일은 바로 프랑스로 부터 화약과 무기를 공급 받는 일이었고 종국에는 프랑스 군을 미국 독립운동에 끌어 들이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대륙회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캐럴 형제를 캐나다에 파견하면서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을 파리로 비밀리에 파견 했다. 딘은 변호사이자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대륙회의 의원 출신 인물이었고. 벤자민이 공식 전권 공사로 부임하기 전에 프랑스의 문을 두드렸던 어찌보면 합중국 최초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그를 발탁, 천거한 인물이 바로 모리스 였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734–1806  아래 사진)그는 ‘미국 혁명의 자금줄’이라 불렸던  중요한 인물이다.

모리스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개인 신용을 담보로 초가 대륙군의 군자금을 마련했을 정도로 재정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추진력이 강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역시 재정력이 막강했던 찰스 캐럴과도 ‘자금 운용’과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말과 뜻이 통했다. 그 또한 찰스 캐럴의 시티 터반 사랑방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사일러스 딘을 파리로 보낼 때, 단순히 외교관으로 보낸 게 아니라 ‘상업적 대리인’의 성격도 띠게 했다. 즉, 프랑스의 원조를 끌어내는 동시에 무기 거래를 성사시키는 실무적인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모리스다.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 전, 캠든의 터반에서 존 신부와 모리스가 만난 것은 아주 절묘했다. 후일 따져 보면 이 또한 신의 절묘한 안배 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는 분주한 인사를 나눈 뒤 터반의 구석 자리에 앉아 논의를 시작했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사안이  많아 논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처음의 안건은 대륙회의 분위기였다.
대륙회의는 그때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라는 견해를 놓고 양분되어 있다고 했다.
모리스는 그때 까지만 해도 온건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버지니아의 대표인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빨리 결행 해야 한다는 강경파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분위기를 전하면서 아담스, 제퍼슨, 핸콕 , 휫필드 등 여러 이름이 나왔다. 그러면서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떠나시기 전에도 말 씀 드렸지만 독립선언은 시기 상조 아닙니까? 영국과 완전히 갈라서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언인데 우리가 지금 영국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공연히 애꿎은 희생만 엄청나게 더 치루게 되는것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전쟁은 뭡니까?”
존 신부가 나섰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제퍼슨 이 노인네는 그때 까지 온건파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고 강경파 들에게는 그들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확실한 강경파로 입장을 굳혔다고 존 신부는 파악하고 있었다. 독립선언 얘기도 나왔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륙군 젊은이들에 대한 보급과 무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쟁을 빨리 끝낼 요량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온건파들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하는 가 싶어 모리스에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의 단결과 힘을 과시하고 영국으로 부터 받아낼것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협상을 해야죠, 저쪽이 쥐는 아니지만 쥐를 몰더라도 도망갈 구멍을 내주어야지, 궁지에 몰아 독이 바짝 오르게 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얘기지요.”
밴자민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을 아꼈다.
“그래서 모리스 의원 같은 분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
존 신부가 다시 물었다.

“일단은 내실을 기해 야 하지요 지금의 무기로는 우리 대륙군이 승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공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 하다는 것 아닙니까?”

실제 모리스는 영국의 강압적인 조세 정책에는 반대했고 저항 했으나, 처음부터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대영제국과의 화해와 협상을 선호하는 온건파에 속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륙군의 화력이 너무도 열악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의 이야기이지만 1776년 7월, 독립을 결정하는 투표 당시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완전한 독립 선언이 시기상조라면서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부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해 독립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일단 독립 선언이 결정되자 모리스는 “시민의 의무는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8월 2일 미국 독립 선언문에 서명했다.

“박사님 필라에 들어 가시면 저들 강경파들을 다독여 주실거지요? 다른 사람 말은 안들어도 그 사람들이 박사님 말은 들을 테니까요. “
벤자민은 가타부타 말을 않고 따라만 놓고 있었던 마데이라 잔을 들어  들이켰다. 통풍에 술은 금물인데 오늘 같은 날 와인 한잔 쯤이야 싶어 존 신부도 말리지 않았다.

사실 독립선언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식민지의 주인을 자처하는 영국왕과 죽기 살기로 한판 끝까지 붙어 보자는 얘기 아닌가. 벤자민의 표정이 다시 아까의 고뇌에 찬 표정으로 돌아간다.
살살 약을 올리면서 실력을 키워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일격을 날려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밥 모리스 그의 계산적인 생각에 존 신부도 일견 수긍할 점이 있다고 생각 되기는 했다. 그만큼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기는 일은 당시로서는 요원했기 때문이다.
“박사님, 대답해주세요. 영영 하지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좀더 시간을 갖자는 애기 니까요”
모리스는 마데이라 잔을 내려 놓는 벤자민 노인의 손을 잡으며 응석을 섞어 말했다. 마데이라를 한잔 더 따르려는 그를 존 신부는 눈짓으로 말렸다.
존 신부에게는 왕당파(Loyalist)인 아들 윌리엄과 결별하면서 보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침통한 모습이, 전쟁 승리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아들 또래 모리스의 응석에 같은 표정이지만 매우 다르게 반응 하는 것이 대비되면서 벤저민의 고독이 더 깊게 느껴졌다.
“마침 프랑스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그말에는 벤자민이 반갑게 대꾸 했다.
“기록적인 편서풍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페킷선의 선장도 유능한 이였고…”
그러면서 서신 한장을 건넸다.
존 신부는 벤자민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편지가 사일러스 딘이라는 인물이 파리에서 밥 모리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서신은 바다 위를 날아온 모양이군!”
노인은 조끼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더니 편지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대서양을 사이에 둔 정보 전달은 오로지 범선에 의존해야 했던 고된 과정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런던이나 파리로 소식을 보내려면 정기 우편선인 패킷선(Packet Ships)이나 일반 상선을 이용해야 했다. 빠른 경로는 대서양의 편서풍(Westerlies)과 멕시코 만류(Gulf Stream)를 이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식민지 → 유럽의 경우 북미 해안에서 멕시코 만류를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속도가 붙었다. 보통 3~4주 정도 소요됐다.
하지만 반대로 유럽에서 식민지로 돌아올 때는 맞바람과 조류를 거슬러야 해서 훨씬 오래 걸렸다. 남쪽으로 내려가 무역풍을 타고 우회하는 경로를 택하기도 했으며, 보통 6~9주가 걸렸다.
독립전쟁 중에는 영국 해군이 해안을 봉쇄했기 때문에, 미국 특사(벤자민 프랭클린 등)에게 보내는 훈령은 대형 군함보다는 빠르고 작은 쾌속선을 이용해 봉쇄망을 뚫고 야간에 몰래 출항하곤 했다.

사일러스 딘은 1776년 3월 초에 비밀리에 출항했다. 그는 운 좋게 강력한 멕시코 만류와 봄철의 강한 편서풍을 타 25일 만에 프랑스 해안에 닿을 수 있었고 4월초에 파리에 도착 했던 모양이다.
도착 직후 딘은  파리에서 상황 소식을 써서 가장 빠른 사선(Privateer) 편에 보냈던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 항로는 6주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폭풍우를 피하고 항해술이 뛰어난 선장을 만났다면 40~45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5월 하순에 벤자민이 생생한 파리의 상황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지를 다 읽은 벤자민이 모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삐 움직이고 있구만, 수고들 했네. 자네들이야 말로 우리의 동량들 일세,  자네들이 있어 내가 든든해. 사일러스 군이 원하는 것 다 들어 주도록 해야지. 내일 부터러도 급히 움직이세.”
“참 우리 신부님 피에르 보마르세라고 프랑스왕의 측근인사 잘 아시지요?“   벤자민이 존 신부를 쳐다보며 물었다.
“ 보마르세 라고 하셨습니까?”
“ 지난번에 찰스 세뇌르 한테 들었습니다. 파리 라틴어 학교 동창 이라고.”
“ 잘 압니다. 왜 그친구한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
“예 그래서 제가 오늘 신부님 만났을 때 그토록 반가와 했던 겁니다.”  모리스가 나섰다.
명석한 존 신부는 모리스가 설명을 다 하기 전에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랑스왕의 최 측근으로 등극 했다는 시계공 출신 극작가 재주꾼 보마르세가 대륙회의가 프랑스를 공략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맨으로 등장해 있다는 것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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