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몬트리올 진흙탕의 ‘몽 세뇌르’ 캐럴 2 –
안동일 작
캐럴이 캐나다행을 결행 한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들 독립 민병대의 존재 였다. 캐나다에는 그 무렵 대륙군과 노선을 같이 하는 민병대가 결성돼 있었다. 캐나다라는 말은 원주민 이로쿼이족의 언어인 ‘카나타(kanata)’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본래 ‘마을’ 또는 ‘정착촌’을 뜻하는 일반 명사였는데 그 지역 일대를 일컫는 말로 당시부터 쓰여지고 있었다.
캐나다 퀘벡도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영국 령이 되면서 총독의 군사력으로 민병대를 두었다. 당연히 총독의 명에 따라 영국왕에 충성하는 민병대 였다. 그런데 대륙에서 독립의 기운이 불타 오르면서 각지의 민병대가 총독과 영국왕에 반기를 든 것과 마찬 가지로 캐나다 에서도 식민지의 독립을 원하는 민병대가 결성 됐던 것이다.
이들 민병대는 영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천주교도 들이 중심이었다. 독립이 이루어지면, 미국이 승리하면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고 미국 쪽에 줄을 대고 섰던 것이다. 대륙회의에서 그리 큰 힘을 쓰지 않았는 데도 독립 전선에 합류한 민병대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고 사절단을 보내 격려하고 후원 하면 이를 크게 확장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1763년,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캐나다(퀘벡)를 빼앗았을 때, 캐나다 가톨릭교도들은 절망에 빠졌다. 당시 영국은 국교회(성공회) 국가였고, 가톨릭교도가 공직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가톨릭을 억압하고 성공회로 개종시키려 했다. 가톨릭 학교를 폐쇄하거나 성직자 보충을 막는 등 ‘고사(枯死) 작전’을 썼다.
당시의 몬트리올과 퀘벡은 밀도가 높은 공동체였다. 그 무렵의 도시 인구는 몬트리올이 약 1 만명 내외였고 행정 중심지였던 퀘벡은 몬트리올과 비슷하거나 약간 적은 수준이었다. 도시를 제외한 주변 농촌 지역까지 합치면 퀘벡 전체에 약 9만명 ~ 10만 명 정도의 프랑스계 캐나다인(Habitants)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 캐나다인들에게 가톨릭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이들은 거세게 저항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지켰다. 갈등은 한동안 계속 됐고 그러면서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기 직전, 영국은 아주 영리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퀘백법을 발효시킨 것이다. 미국 식민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북쪽의 캐나다인들만이라도 자기 편으로 묶어두려 한 것이다.
영국은 1774년 퀘벡법을 통해 가톨릭교도의 종교적 권리를 인정하고, 가톨릭 교회가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거둘 법적 권한까지 보장했다. 이로 인해 가톨릭 수뇌부(브리앙 주교 등)는 영국 왕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가톨릭을 지켜준 고마운 영국 국왕 폐하”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영국 정부와 결탁한 가톨릭 수뇌부는 신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영국 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종교적 협박이 시작됐다.
이런 즈음에 캐나다 일부 민중 들은 영국이 준 ‘종교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들을 통제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 일부 천주교도들이 찰스 캐럴 등이 주창하는 ‘미국식 자유’에 호응하면서 그 길에 동참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동조해 독립의 길에 나선 숫자는 찰스 캐럴등이 기대 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소수였다. 민병대만 하더라도 영국에 충성한 부대가 다수였고 실제 그들은 퀘백 성으로 들어가 영국군 수하에서 활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독립하자는 미국인들은 가톨릭을 게속 박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데 오히려 개신교 국가인 영국이 가톨릭을 보호해주는 척하는 기묘한 상황”이 전개 되면서 후자가 대세가 된 형국 이었다.
독립파 캐나다 민병대는 두개의 연대가 결성 됐는데 하나는 1775년 가을, 제임스 리빙스턴(James Livingston)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제1 연대(1st Canadian Regiment) 였고 다른 하나는 1776년 초에 모세스 헤이즌(Moses Hazen)이 중심이 돼서 결성한 제2 연대였다. 각 연대의 부대원의 수는 현재의 연대 규모에 훨씬 못 미치는 800 여명 수준이었지만 연대로 불렀고 지휘관을 연대장으로 불렀다. 두사람 다 대령으로 계급장을 달았다.
두 연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불어를 쓰고 천주교를 믿는 캐나다인 청 장년들 이었으나 두 부대의 창설자인 연대장은 모두 미국인 개신교도들 이었다.
1연대의 제임스 리빙스턴은 알바니 출신의 전형적인 뉴욕 인물로. 몬트리올에 거주하며 상업에 종사하다가 혁명이 터지자 대륙군에 가담했다. 그는 개신교(Dutch Reformed계열) 배경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뉴욕의 리빙스턴 가문은 뉴욕의 강력한 개신교 엘리트 가문이었다.
2 연대의 모세스 헤이즌은 매사추세츠 출신의 뉴잉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7년 전쟁 당시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이후 퀘벡 지역에 정착해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그는 청교도(Puritan) 가문 출신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부 기록(James Thompson의 일기 등)에서 그를 이름 때문인지 ‘유대인’으로 오해해 소개한 경우도 있지만 와전이다.
미국인 개신교도 들이 이끈 캐나다 연대’에는 프랑스계 가톨릭 신자(Habitants)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부대원 들은 지휘관들과는 종교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다. 지휘관들은 높은 봉급을 제시했었다.
캐럴은 몬트리올에 도착 하던 날 사령관 베네딕트 아늘드에 이어 헤이즌 대령을 만났다. 그때 리빙스턴은 퀘벡쪽 전선에 나가 있었다. 헤이즌은 아놀드 보다 더 초조해 하고 있었고 격앙돼 있었다. 그는 사령관인 아놀드와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먼저 토로 했었다. 갈등이 상당히 심각했다. 역시 보급과 처우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럴 법 했다. 헤이즌 연대야 말로 퀘백 전투가 대륙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베네딕트 아놀드의 약속을 믿고 그 무렵에 급히 결성한 부대로 아놀드 부대가 몬트리올로 돌아올 때 퇴로를 뚫고 보급품을 나르고 정찰 업무를 수행하며 몬트리올 치안 확립에 적극 개입했는데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이었다. 저들은 이미 대륙군 편에 서서 영국군과 싸웠기 때문에, 영국군이 다시 캐나다를 장악하면 당장 ‘반역자’로 처형될 위기였다. 영국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다고 했다.
병사들 처우와 보급문제는 캐럴로서도 당장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날 헤이즌과의 만남에 캐럴의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혔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가톨릭 신자인 캐나다인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그는 찰스 캐럴과 그의 사촌 존 캐럴신부에게, “병사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당신들의 종교적 도움이 절실하다”며 종교적 가교 역할을 부탁했던 것이다.
천연두에 걸린 캐나다 민병대원들이 육체의 고통보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종교적 심리적 공포에 더 떨고 있다고 했다. 퀘벡의 사제들이 성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찰스 형제는 그러마고 흔쾌히 대답했다. 리빙스턴이나 헤이즌의 부대에 소속된 캐나다인 가톨릭 병사들은 “나는 가톨릭 신자인데, 왜 우리 교구 신부님은 나를 반역자라고 하는가?”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1776년 6월, 영국 증원군이 퀘벡에 도착하면서 대륙군이 캐나다에서 완전히 퇴각할 때, 이들 캐나다 민병대원들도 가족을 이끌고 남쪽(미국)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이후 요크타운 전투를 포함해 독립 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대륙군의 일원으로 끝까지 열심히 싸웠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지만, 이들은 끝내 고향인 캐나다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뉴욕주 북부(현재의 클린턴 카운티 등)에 땅을 나누어 주어 천주교 촌으로 만들어 정착하게 했다. 찰스 캐럴이 적극 나섰음은 물론이다.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캐럴의 숙소였던 사토 드 라메제 역시 낮고 긴 석조 건물이었다. 웅장하기보다는 차갑고 습한 느낌이 강했으며, 바닥의 돌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신발 밑창을 타고 캐럴의 뼈마디까지 전달되었다.
밤이 으슥해서 편지지를 펼치고 잉크병을 연 캐럴은 편지를 쓰기 전에 생각에 잠겼다.
그날 4월 마지막 날, 찰스가 돌아 본 몬트리올 거리는 스산함과 처량함 그리고 역한 냄새가 가득찬 ‘회색의 도시’였다. 실제로도 몬트리올은 화재를 막기 위해 나무 대신 인근에서 채취한 회색 석회암(Limestone)으로 집을 지었다.
그래서 거리의 집들은 두꺼운 돌벽과 가파른 은색 주석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캐럴은 거리를 걸으면서 이 두꺼운 회색 돌벽들이 마치 고집스런 요새처럼 느껴졌다.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도로는 깊은 진흙탕(Quagmire)으로 변했다. 하수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녹아내린 오물과 말의 분뇨, 그리고 대륙군이 버린 쓰레기가 섞여 코를 찔렀다. 메릴랜드의 깔끔한 농장주였던 캐럴에게 이 냄새는 ‘실패의 냄새’처럼 다가왔다.
그 무렵 몬트리올 도시 인구는 약 1 만명 내외였다. 1만 명 중 대다수는 프랑스어를 쓰는 가톨릭 신자였고, 소수의 영국인 상인과 관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1만 명 규모의 타운에서는 상류층 가문이나 주요 신부들, 군 간부들끼리는 서로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었다. 찰스 캐럴 같은 거물급 인사가 나타났을 때 그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찰스는 건물들의 닫힌 창문 너머로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적개의 눈초리를 느꼈다.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은 당시 몬트리올의 심장부였지만, 캐럴이 본 풍경은 처참했다. 한쪽에서는 예복을 입은 현지 가톨릭 귀족들이 차가운 표정으로 성당을 드나들고, 광장 건너편에는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짓무른 대륙군 병사들이 더러운 담요를 뒤집어쓴 채 구걸하거나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점령군이 아니라 완연한 도시의 천덕구러기 였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아래로는 굶주린 병사들의 거친 욕설과 베네딕트 아놀드의 기병들이 내는 말발굽 소리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수천 명의 미국 대륙군 병사들이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하더니 저들은 전투에도 졌고 거기에 다수가 역병 까지 걸려 있는 모습…
도시 북쪽 성벽 너머로 보이는 강물은 캐럴에게 그나마의 ‘탈출구’였지만 역시 ‘공포’였다. 강물에는 집채만한 얼음 덩어리들이 떠내려 가고 있었다. 영국 함대가 이 얼음을 부수면서 강을 거슬러 오고 있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고 캐럴은 얼음 섞인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이 이곳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거리를 걸을 때,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이나, 자신을 피하는 신부들이며 안면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인구가 적은 도시였기에 더욱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진흙탕 위로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신음하는 병사들과 시신들이 즐비한 도시의 풍경은 그가 필라델피아에서 꿈꿨던 ‘자유의 원정’이 비극적인 참사로 변하고 있음을 이내 깨닫게 하는 지옥도였다. 같은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자신들을 ‘해방군’이 아닌 ‘침략자’로 보고 영국군이 오기를 기다린다니… 캐럴은 자신이 추구해 온 가톨릭 연대에 깊은 회의를 느껴야 했다.
대륙군 절반 이상이 천연두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곳 몬트리올에서는 썩어가는 시신과 병자들의 악취를 피할 곳이 없었다. 더욱이 천주교 병사들이 고해성사도 못하고 종부 성사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캐럴은 “하느님은 왜 이 고통을 방관하시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제단 앞에 서서 “반역의 냄새가 나는 자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고 문을 닫아버리던 사제는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가 아니라 ‘영국 왕의 충견’으로 보였다.
찰스는 그날 마주쳤던 주요 인물들을 떠올렸다. 가톨릭 상인들의 리더였던 조제프 플레시 (Joseph Plessis) 는 당시 몬트리올의 유력한 가톨릭 상인이자 시민 대표 격인 인물이었고 찰스와도 안면이 있는 이였다.
찰스 캐럴은 제일먼저 그를 찾아 대륙군에 대한 보급품 지원을 호소했다. 플레시는 매우 예의 바르고 격식 있게 캐럴을 대 했지만 정작 돈이나 물자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는 이미 영국 법률(퀘벡법) 아래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데, 왜 불확실한 도박(미국 독립)에 우리 가문의 운명을 걸어야 하느냐” 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샤를 장-바티스트 샤부아예 (Charles-Jean-Baptiste Chaboillez) 역시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몬트리올의 부유한 모피 상인이었다. 그의 저택은 대륙군 장교들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륙군이 몬트리올을 점령했을 때 강제로 그의 집을 징발했기 때문에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캐럴은 길을 걷다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그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눈을 부릅뜨고 찰스를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영적 위로가 되었던 유일한 통로는 피에르 르네 플로케 (Pierre-René Floquet) 신부였다. 그는 몬트리올에 남아있던 마지막 예수회(Jesuit) 신부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제들과 달리 그는 대륙군과 캐럴 일행에게 활짝 마음을 열였고 협조적 이었다. 동창인 존 캐럴 신부에게 자신의 집을 숙소로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브리앙 주교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게 된다.
몬트리올 노트르담 성당 앞의 진흙탕 길에서의 성사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존 신부와 자신이 어제 오늘 사이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유일한 잘한 일이지 싶다.
캐럴과 존이 노틀담 성당 벨푀유 신부에게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서려는데 조금 뒤쪽에 서 있던 한 병사가 성큼 다다와 존 신부의 옷깃을 잡았다.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짓무른 대륙군 병사였다.
”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 해 주십시오.'” 병사는 ‘ 몽 페르’ 라고 정확히 프랑스어로 발음 했다. 보아하니 그도 문전 박대 당한 모양이었다.
존은 아직 계단에 서 있던 노틀담 성당의 젊은 신부를 흘낏 한번 보고는 병사의 손을 덥석잡고 저쪽으로 이끌었다. 긴 게단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신부와 병사는 진흙 투성이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성사가 시작됐다.
신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는 성사를 흔히 ‘마지막 성사(Last Rites)’라고 부르는데 보통 고백성사와 종부성사 그리고 마지막 영성체인 노자 성사로 이어진다.
환자가 의식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영혼을 깨끗이 하는 고백성사를 먼저 하고 그 다음은 사제가 고통받는 환자의 이마와 양손에 성유를 바르며 치유와 위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병자성사 (Anointing of the Sick)를 한다. 과거에는 ‘죽기 직전’에만 한다고 해서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 불렀으나, 요즈음에는 종부성사라는 말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 노자성쳬(사) (Viaticum)는 임종 성사로서는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路資)’는 문자 그대로 길을 떠날 때 필요한 돈이라는 뜻으로, 죽음을 앞둔 신자가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힘을 얻도록 모시는 마지막 영성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날 찰스 형제의 성사 때는 준비가 되지 않아 약식 손동작 으로만 이루어져야 했다.
존 캐럴 신부는 병사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고름이 흐르는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 갔다.
그리고는 신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Mon enfant, n’aie pas peur. Dieu est miséricorde.” (내 아들아, 두려워 마라. 하느님은 자비이시다.) :
예수회의 선교 철학 ‘적응주의(Accommodation)’와 실용주의에 투철한 신부는 병사가 프랑스계 라는 점을 생각해 불어로 성사를 집전했다. 병사가 뭐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서너발짝 떨어져 있는 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숨이 가쁜 병사는 모국어인 불어를 잘 이해하는 신부에게 자신의 마지막 고백 할 때 깊은 평화를 느끼는 듯 했다.
종부성사는 마지막 기름 부음이라는 뜻으로 환자의 병든 부위에 성유를 바르는 예식이다. 다행히 작은 성유병 하나가 수단 안 주머니에 있었던 모양이다.
신부는 병사의 눈에 성유 바르며 성구를 읊었다. “Par cette sainte onction… que le Seigneur te pardonne tes fautes par la vue.” (이 거룩한 도유로… 주님께서 네가 눈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를.)
그리고는 성체를 쥔 손을 들어 올리며 “Voici l’Agneau de Dieu…”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하고 외쳤다. 성체가 없었기에 존 신부는 빈 손을 모아 허공에 올렸다.
그리고는 그 손을 병자에게 건네며: “Reçois le Corps du Christ, pour qu’il te garde et te mène à la vie éternelle.”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라, 그분께서 너를 지켜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 라고 읊었다. 병사는 손을 올리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악취가 찰스가 있는 곳까지 퍼져 나왔다. 하지만 신부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모아진 두 손을 그 입안으로 집어 넣었다. “Que Dieu notre Père vous montre sa miséricorde…”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존은 괞찬으려나 싶다. 어쩌면 감염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날 존은 예수회 플로케 신부의 관사에서 얘기도 나눌 겸 자고 오겠다고 해서 오후에 헤어졌었다.
당시 천연두는 단순히 ‘아픈 병’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웠다.
아직 ‘종두법(백신)’이 나오기 전이었다. 유일한 예방책은 인두법이었는데, 이는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건강한 사람의 상처에 문질러 가볍게 앓고 지나가게 하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당시 대륙군 사령부는 군 전체가 동시에 앓아누울까 봐 인두법을 엄격히 금지했다. 캐럴은 유럽 유학 시절 벨기에의 시골에서 이 인두법의 효과를 목격했고 그 독특한 비방도 알고 있었다. 몬트리올 기적의 발아점이었다.
안개 낀 세인트로렌스 강바람이 숙소의 돌벽을 때리는 새벽, 찰스 캐럴은 걱정과 추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어슴프레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덩치 큰 군인이 그 앞에 나타났다.
그가 루이 조제프 고슬랭이 었다. 대륙군 본부의 그날 불침번 경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참에 찰스의 모습이 보이자 나섰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며 리빙스턴 연대 소속의 사관 으로 지금은 대륙군 본부 쪽에 배속 돼 있다는 대충의 관등성명 소개가 끝나고 루이가 거친 프랑스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찰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달려온 참이었다.
“캐럴 영주님 .. 당신은 성모의 땅 메릴랜드의 주인이시니 묻겠습니다. 리빙스턴 대령님은 우리가 영국군과 싸워 이기면 ‘자유’를 얻을 거라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집 마당의 십자가를 부수고 간 영국군과, 우리를 이단이라 부르는 필라델피아의 개신교 병사들 사이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의외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잘문 아닌가. 캐럴은 고뇌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
“루이, 나 역시 같은 질문을 하느님께 던지고 있소. 나는 메릴랜드에서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잃었었지요. 우리가 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천주 신앙이 당신과 나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루이-조제프 고슬랭(Louis-Joseph Gosselin)은 제1 캐나다 연대(리빙스턴 연대) 소속 중위 (Lieutenant)였다. 나이는 30세. 모피 사냥꾼 출신으로,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졌으나, 목에는 낡은 은색 십자가 묵주를 항상 걸고 다녔다. 대대로 퀘벡 농토를 일구던 가문이었으나, 영국의 지배 아래서 ‘가톨릭은 이등 시민’이라는 굴욕을 견디다 못해 대륙군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 사용했다.
그는 찰스를 “Mon Seigneur” (몽 세뇌르)라 불렀다. 영어의 ‘Lord’에 해당하는 단어다. 프랑스의 평민이 찰스 캐럴처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을 마주했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존칭이다. ‘영주님’, “대인님”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호칭이다. 실제 루이 등 퀘백의 신자들은 신대륙 최초의 천주교 타운인 성모 마리아의 땅 메릴랜드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어 일종의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많이들 캐럴 가문과 볼티모어 가문을 혼동하고 있었다.
“캐럴 옹(Annapolis Carroll)의 아드님이신 젊은 영주님. 저희 리빙스턴 대령은 용감하지만 우리의 ‘아베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퀘벡의 주교님은 우리를 반역자라며 성사를 거부하고 사탄의 자식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국 국왕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 앞의 자유인이 되고 싶어 이 총을 들었습니다.”
“너무도 잘한 일이오 너무도 자랑스럽소, 그래서 내가 멀리서 부터 이를 치하하고 격려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오”
“그런데 천주의 영주님 ,우리 캐나다 천주교 민병대원들은 매일 밤 천연두로 죽어가는 동료의 눈을 감겨주며 울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없고, 고해성사도 없는 이 진흙탕에서 우리는 버려진 군대입니까? 영주님과 친구분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말한 ‘자유’에 우리 퀘백의 가톨릭 신자들의 자리도 정말 있는 것입니까?”
찰스는 격분하는 루이를 보며 자신의 ‘정치적 대의’가 현지 가톨릭 민중, 특히 독립의 대열에 함께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처절한 ‘생존의 문제’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럼 있고 말고, 가장 높은자리에 올려 놓도록 내 노력 하리다. ”
루이가 가슴의 묵주를 꽉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럼 약속해 주십시오. 우리가 만약 패배해서 이 진흙탕 속에 묻히더라도, 영주님은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우리 같은 캐나다 가톨릭교도들의 이름도 ‘자유의 문서’에 적어 넣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말이오.”
“내 하비에르 성인의 이름으로 약속 함세”
“루이, 자네의 억양이 독특하군. 노르망디 쪽인가?”
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닙니다, 영주님. 제 조상은 브르타뉴의 바닷가 바위 틈에서 태어났지요. 프랑스 놈들은 우리를 ‘야만인’이라 불렀고, 영국 놈들은 ‘짐승’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 브르타뉴 놈들은 고집 하나는 바위보다 세답니다.”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가장 낙후된 시골이었지만 천주교 신앙 만은 최고 높은 곳이었다.
“루이 그나저나 천연두가 문제 아닌가? 자네가 나좀 도와 줘야 겠네.”
“마리아의 영주님, 마리아 님의 은총을 걸고 신명을 다해 돕겠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해서 운명의 1776년 봄, 천연두균이 창궐하던 몬트리올 진흙 땅을 성모 마리아의 은총이 내린 안온한 곳으로 바꾼 찰스의 몬트리올 기적의 허큘레스, 루이 고슬랭과의 도원 결의가 그날 신새벽에 이루어 졌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