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 4 –
안동일 작
‘도허레건 매너’ (Doughoregan Manor, 위 사진)는 영지라고 까지 불렸던 찰스 캐럴의 광활한 사유지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가톨릭 성지였다. 겉으로는 찰스 캐럴의 화려한 저택이지만, 그 안의 사설 경당(Private Chapel)은 박해 시대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처 였고 안식처 였다.
75년 4 월 16일 도허레건 매너에서 열린 부활절 미사는 어느때 보다 화려하고 성대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미사를 집전하는 존 캐럴 신부는 몇달 전과는 달리 화려한 금색 장식이 달린 흰 제의를 입었고 남녀 신도들도 정장에 미사포를 쓰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사제 조차도 평 신사복에 로만 칼라만을 착용한 채 제대에 올라야 했고 신도들은 일요일 농장을 돌보는 차림으로 미사에 참여 해야 했었다. 워낙에도 천주교 탄압 국면에서는 주일날 조심스레 모여 미사를 올렸지만 더 위축 됐던 것은 1773년에 돌연 발령된 교황의 예수회 해산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찰스 캐럴의 각고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일신 됐기에 신도들은 여봐란 듯이 성대한 부활절 미사를 올리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Victimae paschali laudes immolent Christiani. (파스카의 희생을 찬미하라, 그리스도인들아.)
Mortem tuam annuntiámus, Dómine, et tuam resurrectiónem confitémur, donec vénias. (주님, 저희는 당신의 죽음을 알리고 당신의 부활을 고백하나이다,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부활의 축문이 라틴어로 낭송 되었고, 벅찬 감격의 기도가 계속 올려 졌다. 부친 캐럴옹, 그리고 부인 메리 다날 여사와 함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찰스 캐럴은 절절한 기도 속에 식민지 천주교의 부활을 새삼 다짐했다. 이날 미사에는 성공회 신자인 혁명위원회 주역 윌리엄 파카 까지 초대돼 있었다.
캐럴의 기도는 언제나 천주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간구의 기도가 아니라 무슨 일을 어떻게 하기로 했다는 아룀과 각오를 피력 하는 기도 였다. 물론 그 일이 자신의 뜻 보다는 천주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지게 해 달라는 겸손의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사실 그동안 애써 태연한 척 상황을 달래고 있었지만 1973년 엄청난 일이 일어 났다. 그해 7월 21일, 로마 교황청의 클레멘스 14세 교황이 예수회에 대한 공식적인 해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교황 칙령인 ‘주님이요 구세주(Dominus ac Redemptor)’를 발표해 전 세계 예수회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시켰다. 당시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가톨릭 군주들은 예수회의 강력한 영향력과 독립적인 성격을 경계했다. 이들은 교황청에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교황은 저들의 압력에 굴복해 교회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해산을 결정하게 됐던 것이다.
이 명령으로 인해 전 세계의 예수회 학교와 선교지가 폐쇄되었으며, 당시 예수회 수장(총장)이었던 로렌초 리치(Lorenzo Ricci)는 감옥에 갇혀 얼마 뒤 옥사했다. 그 무렵 캐럴턴에 돌아와 있던 찰스는 그 이전 6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했던 프랑스 왕실의 예수회 탄압의 피해 당사자의 하나 였기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망연 속에 전의가 불타 올랐다. 예수회가 해산 돼야 한다니.. 예수회가 불법 단체라니… 찰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예수회 사제로 유럽에 있던 4촌 존 캐럴이 허름한 평복을 입고 초췌하게 볼미모어 항에 내리던 모습을 찰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회를 근간으로 설립됐던 식민지 천주교 로서도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당초 미국 천주교야 말로 예수회가 세운 교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수회는 영국에서 성공회가 왕권에 의해 국교로 전환 됐을 때 다른 천주교 교파와는 달리 왕권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버틴 유일한 교파였다.
메릴랜드 식민지의 창시자인 제1대 볼티모어 경, (조지 칼버트)도 예수회에서 셰례를 받은 이였고 칼버트 가문 전체가 영적인 지도와 교육을 위해 예수회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내에서 계속 정통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정치적·경제적 탄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예수회 소속 인사들만이 거의 유일하게 이를 감수 했다.
1634년, 메릴랜드에 정착민들을 실은 아크(Ark)호와 도브(Dove)호가 도착했을 때, 그 배에는 볼티모어 경의 동생인 레너드 칼버트뿐만 아니라 앤드루 화이트(Andrew White) 신부를 포함한 예수회 사제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메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 포교뿐만 아니라 땅을 일구고 식민지 행정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다.
1634년 3월 25일, 화이트 신부가 집전한 성 클레멘스 섬 미사 미사는 영미권 가톨릭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영국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메릴랜드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내세웠지만, 내부적으로 예수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볼티모어 경(2대 세실 칼버트)과 예수회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는데 볼티모어 경은 식민지의 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고, 예수회는 교회의 자치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뒤 이같은 갈등 위에 개신교도들의 대거 유입으로 천주교는 메릴랜드에서 소수파가 되어 탄압을 받게 됐던 것이다.
탄압 속에서도 메릴랜드 신자들은 사설 경당에서 미사를 올리며 단합하고 더욱 깊이 신앙했다. 그 중심에 캐럴가가 있었다. 캐럴가는 도허레건 매너 말고도 보위 타운에 미국 예수회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하는 ‘화이트 마쉬(White Marsh)’를 운영 했고 찰스 카운티에는 ‘세인트 토마스 마노(St. Thomas Manor)’ 장원을 운영 했다.
토마스 마노는 1641년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속적 예수회 거주지 (예수회 특성상 수도원은 아니었다) 중 하나다. 1741년에 지어진 벽돌 저택이 1780-90년대에도 건재했다. 1794년 존 캐럴이 이곳에서 미국 최초의 주교 예복을 입고 서품식을 가졌을 정도로 상징성이 큰 곳이다. 강가에 위치해 있어 배를 타고 드나들기 좋았고, 외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천연의 요새’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보위 카운티의 화이트 마쉬는 1783년 이곳에서 역사적인 ‘화이트 마쉬 회의(General Chapters)’가 열린 곳이다. 존 캐럴과 전직 예수회 신부들이 모여 미국 가톨릭의 자치권을 논의하고, 조지타운 대학 설립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다. 이곳은 캐럴가가 예수회에 기증한 땅이다. 웅장한 수도원 건물 대신, 투박한 벽돌집과 농장 건물이 늘어선 이곳에서 사제들과 신자들이 흙을 묻히며 노동하고 밤에는 라틴어로 토론하는 곳이었다.
그무렵 상황은 본국 영국도 마찬가지 였다. 당시 영국은 성공회 국교화 이후 형벌법(Penal Laws)을 통해 천주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다. 천주교도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교육을 받거나 사제가 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 천주교 엘리트들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유럽 대륙(벨기에, 프랑스 등)의 예수회 학교로 비밀리에 유학을 보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첫 손에 꼽혔지난 왕실과의 불화 때문에 벨기에의 생토메르 대학 (College of St. Omer) 과 리에주 (Liège) 신학교가 영국 천주교도들의 지적·영적 중심지로 꼽혔다. 이 학교들은 영국 예수회가 세운 학교로 존 캐럴(찰스 캐럴의 사촌, 훗날 미국 최초의 주교)과 로버트 몰리뉴가 수학했고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몰리뉴 신부와 존 캐럴 등은 이곳에서 서품된 후 메릴랜드 등 북미 식민지로 파견됐다. 당시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는 영국 예수회의 관할 구역이었다. 찰스 캐럴 역시 한때 이학교에 적을 두었기 때문에 몰리뉴, 존 등과의 유대감은 더욱 특별했다. 이처럼 영국 본토 내에서 예수회 활동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영국 관구(English Province)’는 구주대륙에 거점을 두고 계속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지켜온 찰스 캐럴과 식민지 신자들의 예수회에 대해 교황이 해산령을 내렸던 것이다. 해산령(Dominus ac Redemptor)은 당시 식민지 뿐 아니라 전 세계 예수회원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찰스 캐럴이 예수회 해산이라는 거대한 풍랑을 헤쳐 나간 방식은 정말 영리하면서도 굳건했다. 메릴랜드에서 찰스 캐럴과 그의 사촌인 존 캐럴 신부가 보여준 행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미국 가톨릭의 기틀을 새로 짜는 신의 한 수였다.
예수회 해산령이 내려지자, 메릴랜드의 예수회 신부들은 명목상 ‘교구 신부’로 신분을 전환했다. 이때 찰스 캐럴은 법학자이자 대지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예수회의 방대한 토지와 자산이 영국 정부나 타 교단에 몰수되지 않도록 법적인 보호막을 쳤다. 겉으로는 사적 소유인 것처럼 보여지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가톨릭 공동체와 교육 사업을 위한 자금줄을 유지한 것. 캐럴의 할아버지인 개척자 찰스가 등기소장을 역임하면서 정립한 메릴랜드의 선진적 재산 등기법은 이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찰스 캐럴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영국법과 식민지 법 아래서 예수회가 살아남을 길은 오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독립국가 건설뿐임을 이내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독립 전쟁에 쏟아붇다 시피 하겠다며 독립 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대륙회의에서 종교 자유화 선언이라는 큰 소득을 올리고 돌아온 찰스 캐럴에게 이 행보를 더욱 매진 하도록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 총독 로버트 이든의 엉뚱한 획책 때문이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 메릴랜드 이든 총독은 어디서 들었는지 예수회 재산은 해당 정부에 귀속 되는 것이라며 그 방대한 메릴랜드 내 천주교 재산을 강탈 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혼자 독식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주 정부에 귀속 시킨다는 명분이었다.
대륙회의서 돌아온 74년 10월 말 부터 찰스는 이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급히 찾아온 혁명위 인사가 찰스에게 귀뜸 해준 일인데 이든의 충동질에 컨밴션 의원 다수가 주정부의 재산이 크게 늘어나는 고무적인 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캐럴은 격분해서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언제 부터 자신들이 로마 교황을 인정하고 그의 명령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를일 아닌가. 당시 이든은 손발이 묶인 상태였지만 찰스 캐럴의 천주교 재산을 강탈해 자신의 입지를 마련 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메릴랜드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영국 본토 출신 로버트 이든은 사실 인망도 꽤 있었고 수완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메릴랜드 혁명위는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기보다 ‘그가 통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1774년 6월 실질적 권력 이동이 일어나 제1차 대륙회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메릴랜드 결의회, 민중의회(Maryland Convention) 가 소집됐다. 메릴랜드 주민들은 총독의 명령 대신 이 결의회의 결정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한 바 있다.
총독은 여전히 아나폴리스의 총독 관저에 살고 있었지만, 실제 행정·군사 명령은 찰스 캐럴이 속한 안전위원회(Council of Safety)에서 나왔다. 총독은 그림자 처럼 관저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든이 예수회의 재산은 몰수 돼야 한다고 혁명위를 들 쑤시고 나섰던 것이다. 다음날 찰스는 이든을 찾았다.

“ 어서오시오 메릴랜드 예수회 캡틴 나리. 이번에 필라에서는 활약이 대단 했다지만 예수회 일 때문에 심려가 크시겠소?”
이든은 처음부터 비아냥 조로 나왔다. 그는 듣던대로 소식이 늦어 최근에야 알게 됐는데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예수회 재산이 모두 국고에 귀속 됐다며 이곳도 그래야 한다고 나섰다.
“이든경, 당신의 뜻이 관철 될 것이라고 생각 하시오? 언제 부터 메릴랜드 행정부가 교황을 뜻을 헤아렸는지 모르겠소.”
“모든 것은 의회에서 결정 될 것이오. 기다려 보시오.”
“의회라면 컨벤션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언제부터 총독께서 컨벤션을 인정하고 그 결정을 따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나는 민중의 공복이오, 민중의 뜻을 따르는게 공복의 도리요.”
말이 더는 안 통했다. 나름 몇가지 안배를 해 놓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결정을 내린다면 이를 되돌리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등기소의 일이 그 안배 였는데 할아버지 정착자 찰스가 만든 등기소 법 보다는 의회의 결정이 웃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찰스는 의회, 컨벤션에 정식 의원으로 합류하기로 결정 했다.
컨벤션을 이끌고 있던 윌리엄 파카가 진작 부터 권해 왔던 일이다. 찰스는 그때 까지 세이프티 위원회에만 이름을 걸어 두고 있었다. 캐럴은 1774년 12월 초에 민중 의회인 메릴랜드 결의회(Maryland Convention) 에 정식 합류한다.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메릴랜드의 실질적인 자치 정부 역할을 하던 결의회의 위원으로 위촉 선출 된것이다.
컨벤션 뿐 아니라 안전 위원회(Council of Safety) 의 중추였던 윌리엄 파카(William Paca)가 적극 나서 줬다. 그는 천주교도가 아니었지만 종교적 관용에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 매릴랜드 내에서 캐럴의 ‘가장 완벽한 파트너’로 꼽히는 이였다.
1740년 생으로 캐럴 보다 몇살 어린 윌리엄 파카는 메릴랜드 출신의 법률가로, 찰스 캐럴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4인의 메릴랜드 대표 중 한 명이다. 그는 성공회(Anglican) 배경을 가졌지만, 당시 영국 국교회의 특권에 반대하고 일찍 부터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1770년대 초, ‘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이 정부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글을 썼을 때, 파카는 지근에서 법적·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찍 부터 함께 애나폴리스의 권력층에 맞서 싸운 말하자면 ‘혁명 동지’였다.
총독이 컨벤션을 추동해 ‘교황령’을 빌미로 재산을 몰수하려 할 때, 파카는 영국 관습법(Common Law)을 들이대며 “교황의 명령은 메릴랜드 법정에 효력이 없으며, 재산권은 오직 메릴랜드 시민의 권리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논리적 방어막을 쳐 커벤션 내의 분위기를 일순 바꿨다. 예수회 재산을 탐낸 컨벤션 일부 세력이 이든 총독과의 야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파카는 “이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재산 침해이며, 이런 선례를 남기면 우리 모두의 재산이 위험해진다”는 논리로 위원들을 설득했다. 윌리엄 파카는 이든 총독과 대립하면서도, 무질서한 폭동보다는 ‘법치에 근거한 혁명’을 원했다.
부유한 가톨릭 귀족인 캐럴과,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법률가인 파카. 두 사람은 애나폴리스의 시티 터반(그곳애도 같은 이름의 선술집이 있었다.) 과 도히건 매너에서 그해 봄 부터 거의 매일 같이 마데이라 와인을 마시며 이든 총독의 음모를 분쇄할 계책을 꾸몄고 메릴랜드 헌법을 구상했고 민병대를 굳세게 재건할 방책을 논의 했다.
1년 뒤의 일 이지만 캐럴을 도발했던 이든 총독은 명목상 자진 퇴임을 내세운 추방을 당하게 된다. 1776년 4월 영국 정부가 이든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혁명군에게 압수 되는데 이 편지에는 “영국군이 오면 도울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에 이든이 충성을 맹세한 답을 보냈다고 밝혀 지면서 ‘반역’의 증거가 됐다. 찰스 캐럴과 윌리엄 파커등 혁명 지도부는 이든에게 “신변을 보장해 줄 테니 지금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든은 결국 그해 6월 21일 영국 군함 ‘포이(Fowey)’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메릴랜드에서 총독 정치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 순간이었다.
파카는 사무엘 아담스의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 활동에도 관여했기에, 찰스와 더 긴밀해 질수 있었다. 파카 외에 찰스의 편에 서서 시티 터반과 도허건 매너에 자주 초대 받았던 유력한 다른 인물로는 사무엘 체이스(Samuel Chase)가 있었다. ‘불타는 태양’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혈질 정치인이다. 파카가 세련된 법률가라면, 체이스는 컨벤션에서 고함을 지르며 반대파를 제압하는 ‘행동파’ 동지 였다.
또 훗날 메릴랜드의 첫 주지사가 되는 토마스 존슨(Thomas Johnson)이 있는데 그는 매우 신중하고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캐럴의 재산 문제를 ‘공공의 이익’ 관점에서 중재해 주는 역할을 했다.
찰스 캐럴은 1775년 3월 메릴랜드 안전위원회(Committee of Safety)내에서 치안및 군수위원회의 주역으로 나서 아나폴리스 지역의 치안과 군수품 조달을 담당하며, 종교적 차별을 넘어 실질적인 성과를 크게 올리는 행정력을 발휘해 성가를 높였다.
75년 부활절은 4월 16일 이었고, 이날 찰스 캐럴과 메릴랜드 천주교도 들은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오랜 겨울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듯 부활절 미사를 여봐란듯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 미사 바로 며칠 뒤 (4월 19일) 마침내 렉싱턴-콩코드 전투 가 벌어졌고 이내 이 소식이 메릴랜드에도 전해졌다. 캐럴은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무력 저항과 민병대 조직 대폭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해 의원들의 전폭적인 찬동을 이끌어 냈다. 캐럴은 ‘가톨릭 민병대’를 따로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일반 민병대에 입대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그는 주변의 가톨릭 교도들에게 애국자(Patriots)로서 피를 흘려야만 전쟁 후 종교적 자유를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 했다. 그러면서 캐럴은 군수품 조달과 민병대 무장을 위해 거액의 사재를 기부했다. 거의 이든과 일부 컨벤션 모리배 들이 노렸던 그 수준 이었다.
캐럴은 “우리는 종교를 넘어선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논리로 가톨릭에 배타적이었던 개신교 지주들을 설득했다. 특정 부대 이름이 가톨릭은 아니었으나, 캐럴의 영지(Carrollton Manor)에서 일하던 가톨릭 청장년들과 이웃들이 대거 입대하며 특히 민병대 1연대는 사실상의 ‘캐럴 부대’ 역할을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