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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54)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 3 –

 안동일 작

찰스 캐럴, 조지 워싱턴, 존 아담스의 천주교와 종교자유에 관한 구체적이며 본격적인 대담은 세 사람이 성 메리 성당에 다녀온 그날 저녁 시티 터반의 귀빈 다이닝 룸 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는데 이 또한 결과적으로 캐럴옹의 선견지명과 심모원려가 빛을 발한 일 이었다.

당초 아들 찰스나 몰리뉴 신부의 생각은 워싱턴과 아담스를 저녁 까지 성당에 잡아 두고 성당에서의 정성을 다한 만찬으로 두 사람을 감명 받게 하려는 것 이었는데 캐럴 옹이 과유불급이고 과공은 비례 라면서 저녁 까지 잡아두면 오히려 부담감과 경계심이 발동 한다며 저녁 만찬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두 사람이 할 말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아들을 깨우쳐 터반 특실에서 자신들 끼리 만찬을 하게 했던 것이다. 너무도 현명한 판단 이었다.

그날 시티 터반 특실 다이닝 룸의 메릴랜드 특산 불루크랩은 너무도 달았고 준비한 포르투갈 마데이라 포도주는 더 달았고 한껏 멋을 낸 정장의 네 사람( 우연히 토마스 제퍼슨이 합류 했다)의 식견과 정치적 영향력은 정찬의 분위기를 더욱 멋지게 달아 오르게 했다. 그 결과 모두에게 득이 되고 약이 되는, 나아가  미국 독립의 길에 엄청난 보탬이 되는 미증유의 결정이 이날의 작은 파티에서 이루어 졌던 것이다.

그날의 정찬은 어느모로 보나 당시 최고의 정찬이었다. 최고의 인물 들이 최고의 다이닝 룸에서 최고의 음식으로 최고의 분위기에서 나눈 정찬 이었던 것이다.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이날 정찬이야 말로 천주가 안배한 일 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 후에 전개되는 일을 보면 정말 그렇다.

그날 ‘대륙에서 가장 품격 있는 터반’이라 불리우던 중형 다이닝 룸, 크리스탈 룸에는 대형 벽난로에 향나무 장작이 불꽃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여러개의 은 촛대(Chandeliers) 위에 밝혀진 최고급 양초 조명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퀸 앤 양식의 중후한 짙은 갈색 마호가니 테이블과  장식 의자 네개가 배치되어 있었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고급 목재 바닥이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타원 테이블에는 흰색 리넨 테이블보가 깔렸고 은제 포크 나이프와 크랩 크랙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식탁에는 과일 바구니와 정교한 장식의 소금 그릇, 후추 그릇이 중앙을 장식하고 있었다. (꽃 장식은 1800년대 이후 유행해 자리 잡았단다) 고졸한 은제 고블렛(Silver Goblets) 주전자와 물컵이 우아함을 더 했다.

에피타이저와 빵 접시는 도자기와 주석 재질이 번갈아 나왔는데 주로 영국 산이었지만 더러는 중국에서 온것도 있었다.  말한대로 이날 메인 요리는 불루 크랩이었다. 정찬은  아몬드 페이스트와 넛맥 등을 사용한 크랩 수프로 시작됐고 전채로 크랩 케이크와 푸아그라가 나왔다. 메인 디쉬는 허브 레몰라드(Herbed Remoulade) 소스를 곁들인 게 버터 찜이었다. 당시의 블루크랩은 어획 압력이 적어 오늘날 보다 훨씬 컸으며(최대 10인치), 그만큼 살이 풍부하고 달콤했다.

세 손님들은 연방 경탄의 소리를 내며 흡족해 했고 캐럴은 보편적 종교 자유를 권리 선언에 포함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세 사람에게 연실 포도주를 따라댔다. 이날의 와인은 말한대로 마데이라 였다. 마데이라는 독립 운동의 ‘스폰서’ 와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시 식민지 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와인이었다.
마데이라는 포도주 상표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한  지명으로 와인 신지를 뜻했다.  정확히 말하면 포르투갈 반도 남단과 아프리카 사이의 작은 섬이다. 그곳은 해상 교통의 요지였고 우수한 품종의 포도 산지이기도 했다.

이날 찰스 캐럴은 귀한 손님 세사람을 위해 세 종류의 마데이라 와인을 선보였다.  드라이한 세르시알(Sercial)은 차갑게 식혀서 식전주로 내 놓았고 셀러드와 전채 요리, 크랩 케이크에는 레인워터 (Rainwater) 를 함께 제공했다. 따뜻한 게 요리 메인 디시와는 무게감이 있는 베르데호(Verdelho)는 적격이었다.또  베르데호 라면 식후의 브렌디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날 4명의 만찬에 20병의 와인이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네 사람은 마음껏 마셨다. 그날 터반에 모였던 네명 모두 소문난 애주가들 이었다.

여담 이지만 흥미 있는 이야기 이기에 조금 더 설명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면 ‘애주가들의 모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술을 즐겼다. 당시에는 오염된 물보다 도수가 높은 술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 이란다.

조지 워싱턴은 품격 있는 애주가이자 증류주 업자로 통한다. 단순히 마시는 것을 넘어 직접 술을 만들기도 했던 비즈니스형 애주가였다.
최애 주종은 마데이라 와인과 포터(Porter, 흑맥주). 저녁 식사 때 마데이라 와인을 한 파인트(약 473ml)씩 마시는 것이 습관이었다. 헌법 제정 회의 직전 파티에서 그와 동료들이 마신 양이 1인당 와인 2병 이상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주량이 상당했다. 취임 연회 때도 마데이라를 마셨다.  그리고 그는 당밀을 넣은 필라델피아 산 진한 포터를 좋아해 버지니아에서 부터 대량으로 주문해 마셨는데 그 때문에 필라에서 대륙회의가 열리는 것을 대 환영 했다.
퇴임 후 마운트 버넌에 미국 최대 규모의 위스키 증류소를 세워 엄청난 양의 호밀 위스키를 생산했다. 정작 본인은 위스키보다 와인과 맥주를 선호했지만…

존 아담스는 ‘모닝 시드르”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술을 건강의 비결로 믿었던 생활 밀착형 애주가였다. 최애 주종은 하드 시드르(Hard Cider, 사과 발효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드르 한 잔(약 120ml)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이것이 소화를 돕고 건강을 유지해 준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90세까지 장수했는데, 노년에도 “뉴잉글랜드의 시드르가 세상 그 어떤 술보다 낫다”며 찬양했다.
유럽 외교관 시절 시드르를 구하지 못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아내 아비게일에게 불평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토마스 제퍼슨은 세련된 와인 덕후(Oenophile)였다. 그는 양보다 질을 따지는 미국 최초의 본격 와인 전문가였다. 최애 주종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산 고급 와인. 프랑스 대사 시절 유럽 전역의 와이너리를 돌며 지식을 쌓았다. “포도주가 싼 나라에는 주정뱅이가 없다”는 철학을 가졌다. 당연히 독주(Spirits)보다는 가벼운 와인을 선호했고, 식사 때 마다 3~4잔 정도를 꼭 마셨다. 그는 와인 수입과 수집에 엄청난 돈을 썼다. 대통령 시절 연봉의 약 8~10%를 와인 구매에 지출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막대한 빚을 지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니 식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찰스 캐럴은 예수회 신자 답게 소셜 드링커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와인 맥주 보다는 독한 술, 두세 잔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 식후에 코냑을 즐겼다는데 그래서 마데이라를 좋아 했던 모양이다.

다시 마데이라 로 돌아온다. 마데이라 와인이 당시 미국에서 그토록 사랑받았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끝에 완성된 맛’이었기 때문이다.  이 술은 포르투갈에서 꼭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을 거친 긴 항해 끝에 미국으로 들어 왔는데 유럽산이 아닌 것으로 간주 돼 세금이 부과되지 않아 독립파 인사들에게는 영국에 대한 저항의 상징과도 같았다.
항해 중 열을 가해지고  산화 시키고 강화되는 독특한 숙성 제조 방식 덕분에  도수가 높아  거친 식민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 술이었다.  이 마데리아는 우연이 만든 ‘요리된 와인’ (Vinho da Roda)이었다. 당시 마데이라 섬은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들의 필수 기착지였다.  배의 균형을 잡는 바닥 짐(Ballast)을 겸해  실린 와인 통들은 적도를 두 번이나 통과하며 (브라질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오기 위해) 섭씨 40-5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열기와 습도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와인은 열을 받으면 산패하여 식초가 되지만, 마데이라는 보존을 위해 첨가한 도수 높은 주정(브랜디) 덕분에 상하지 않고 서서히 ‘익어’갔다. 이 과정에서 당분이 카라멜화 되면서 특유의 견과류 향과 깊은 호박색 풍미가 탄생했다. 마데리아는 와인이면서 브랜디 (코냑)이었다. 그래서 주정강화 와인이라고도 불린다.
거친 파도에 배가 계속 흔들리면서 와인과 주정이  오크통 안에서 끊임없이 섞였고, 이는 식민지 독립 운동  연대의 모습을 상징 하는 것으로 여겨 질 만 했다. 잔뜩  울분에 찬 독립진영 인사들은 이런 전차로 일반 유럽산  와인보다는 훨씬 독한 마데이라를 찾았기에 이내 독립 운동, 독립 전쟁의 ‘스폰서 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던 것이다.
그랬다. 이처럼 마데이라가 이날 만찬주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4명의 신사들은 저마다 뽐내는 자태로 마데이라를 즐겼다. 실은 허리띠를 풀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날 식민지 최고의 신사 4명의 복색을 어땠을까? 이왕 내친 김에 그것까지 살펴본다.

조지 워싱턴 , 그는 군인이면서 버지니아의 일류 부자 신사였다. 그는 그날 일요일 예배 복장으로  짙은 청색(Deep Blue) 벨벳 코트를 입었다. 은색 버튼이 달린 긴 코트 안에 화이트 리넨 자보(Jabot, 가슴 장식)와 레이스 소매가 달린 셔츠를 입어 위엄을 더했다.   하의는 코트와 색을 맞춘 무릎까지 오는 바지(Breeches)에 흰색 실크 스타킹, 그리고 은제 버클이 달린 검은 가죽 구두를 신었다.

존 아담스, 뉴 잉글랜드의 실용주의자인 그는 화려함보다는 정중함을 택했다. 짙은 갈색(Deep Brown)울 소재의 코트가 그의 체구와 어울렸다. 자보 장식은 워싱턴보다 덜 화려하지만, 정갈하게 다듬어진 은색 가발(Wig)이 돋 보였다. 당시 인텔리 전문인들은 행사 때면 가발을 착용했다. (위 사진 대륙회의 광경,  참조)

터반에서 합류한 제퍼슨은 당시 가장 젊고 세련된 감각을 지닌 이 였다. 43년 생인 그는 동년배 아담스와 캐럴 보다 8살 연하였고 워싱턴 보다는 11살 이나 어렸다. 그는 그날 밝은 톤의 먼지 낀 장미색(Dusty Rose)실크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가발을 쓰기보다 자신의 붉은 머리칼에 가루를 살짝 뿌려 묶는 방식을 선호했다. 지적인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가느다란 안경을 손에 쥐고 있거나 코트 주머니에 꽂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날 제퍼슨이 파티에 합류한 것은  우연이었다. 제퍼슨은 오후에 어느 귀부인 하고 데이트라도 있었는지 잔뜩 치장하고 터반에서 치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이 용무를 끝내고 일어서려는 참 이었기에 캐럴이 나서 합석을 권했고 제퍼슨이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응했기에 이루어 진 일 이었다.
이 또한 천주의 가호였다. 제퍼슨이 없었다면 이날 최대 관건이었던  권리선언 종교자유 문제가 쾌도난마식으로 그 자리에서 결정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날 호스트 캐럴은 감청색 실크 벨벳 코트와 장식 없는 흰색 셔츠를 입어 가톨릭 신사 로서의 품위와 겸손을 동시에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작은 은제 십자고상 펜던트가 옷 안쪽으로 살짝 보일 듯 말 듯 자리 잡고 있어, 그날의 ‘종교적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닐 꽤 긴 논의를 통해 대륙회의 권리선언에 가톨릭을 포함한 식민지의 종교 자유화를 제퍼슨이 나서 명문화 하기로 결론을 낸 뒤 캐럴이 일어서 다시 한번 일동에게 감사를 표하며 건배를 제의 했는데  이 장면이야 말로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자랑하는 세익스피어의 그 어떤 연극 무대 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장면이었다.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존경하는 세 분 신사 여러분, 이 술은 남 대서양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제 맛을 찾았습니다. 우리의 자유 또한 박해와 투쟁이라는 뜨거운 시련을 통과해 더 단단해 질 것입니다. 서로의 작은 다름을 존중하는 마음이 오늘 처럼, 이 잔의 술처럼 변치 않기를!  우리 모두의 양심과, 독립된 아메리카의 자유를 위하여!”
세 사람이 일어서 동시에 잔을 케럴의 잔에 부딪혀 왔다. 좌중은 “치어스!” 를 뇌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장중한 목소리였다.  치어스가 무슨뜻인가 ‘이 즐거운 기색을 계속 유지 하자’는 말이다.
‘챙’ 부딪는 소리와 함께 갈색 마호가니 벽면을 배경으로, 워싱턴의 짙은 청색, 아담스의 갈색, 제퍼슨의 그린/로즈, 그리고 캐럴의 감청색 벨벳과  네사람의 모두 잘생긴 상기된 얼굴이  사방의 촛불 아래에서 각기 다른 질감으로 빛나는 모습이 4개의 마데이라 와인 잔에 현란하면서도 장중하게 반사됐다. 그 반사된 빛은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크라이막스를 이미 묘사 했지만 네 사람이 이날 나눈 천주교,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대화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신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중얼거리는 것이 무슨 영적 유익이 있습니까? 이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일입니다.” 아담스가 못내 불만이라는 듯 라틴어 문제를 대화 초반에 또 들고 나왔다.

캐럴의 답변.  “라틴어는 변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든, 파리에서든, 로마에서든 모든 천주교인은 같은 언어로 기도합니다. 이것은 보편성(Catholicity)의 상징입니다. 신자들은 단어의 뜻이 아니라, 그 소리에 담긴 2천 년 전 사도들의 신앙을 듣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아담스의 불만.  “금색 제단, 화려한 옷, 연기 나는 향… 이것들은 복음의 단순함을 가리는 눈속임(Pageantry)처럼 보입니다.”
” 아담스 선생,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눈으로 아름다움을 보고, 코로 향을 맡으며, 귀로 음악을 들을 때 인간의 영혼은 더 쉽게 하늘을 향합니다. 이 화려함은 사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신 분을 맞이하는  예법일 뿐입니다. ”
“십자가상과 그림들이 은 십계명이 금지한 우상이 아닙니까?”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 그림들은 ‘보이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나무 조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내 아비가일의 초상화를 소중히 여긴다고 해서 그 종이 조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찰스 캐럴은 당대 최고의 가톨릭 인텔리 답게 개신교도들의 ‘교황 숭배(Papists)’나 ‘외세 결탁’ 비난에 대해서도 매우 세련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정치적 권리와 신학적 순종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전략을 취했다.
“우리가 교황의 영적 지도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세속적인 국가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며, 이 땅을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우리의 영혼을 돌보지만, 우리의 총검과 충성은 이땅  새로운 대륙을 향해 있습니다.  ‘충성은 정부에게, 신앙은 하느님과 그의 종 교황에게’ 우리의 모토입니다. ”

교황을 ‘적그리스도’나 ‘우상’으로 몰아세우는 오해에 대해서도  캐럴은 이를 ‘질서’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군대에 총사령관이 필요하듯, 거대한 신앙의 공동체에도 중심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그 ‘직분’과 ‘일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아담스가  ” 만약 교황의 명령이 내린다면 선생은  독립 운동을 멈출 것인가?”라고 물어왔다.  당연히 예상되던 질문이다.  캐럴은 일단  교황이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지만  그런 명령이 내려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양심은 하느님의 것이나, 내 시민권은 이  땅에 속해 있다”고  덧 붙혀 규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각오를 피력했다.  .

이날 천주교 대담에서 압권은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가 일종의 우상 숭배, 미신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때 캐럴은 먼저 반문했다.

“여러분은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천국이 없다고 부정하지는 않으시지요?”

다행히도 그 인정의 강도는 달랐지만 세 사람은 천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 했다.   제퍼슨도 착한 영혼이 가는 상징적인 곳이라고 했다.

“천국에 가면 무슨일을 할 수 있을 까요? 거기 가서도 독립운동이 필요 할까요? 가난한 사람 돕는 일이 필요 할까요? 거기서는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친지 형제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들의 기도를 든는 일이 가장 큰 일 일 겝니다. 마리아 님이야 말로 그 기도를 가장 잘 들어 주시고 천주와 예수님께  사정 해 줄수 있는 분 아닐까요?  다른 성인들도 마찬 가지 입니다. 그래서 우리 천주교인들은 마라아님과 성인들에게 기도 하고 그분 들의 통공을 믿는 것입니다.”

이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에 대륙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세사람이 고개를 끄덕 였다. 캐럴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이 이야기는 실은  유년시절 예수회 소학교에서 어느 수녀님에게 들은 얘기였다.

캐럴은 다짐이라도 받듯이  “나의 신앙이 당신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듯, 당신들의 법도 나의 제단을 허물어서는 안 된디는 생각 입니다” 라고 말했고 세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물론 이죠”라고 합창했다.

가톨릭에 대한 오해의 강도가 어느 정도 옅어 졌다고 여겨 지자 캐럴은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중단 돼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캐럴은 가톨릭에 대한 공격을 역으로 이용해 ‘자유’라는 미국의 건국 가치를 강조했다.
“우리가 영국의 폭정에 맞서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한다면, 우리가 맞서 싸우는 영국의 전제정치와 무엇이 다릅니까?”

좌중은 딱히 할말이 없었다.  그는 법률가인 아담스와 제퍼슨에게 특히 메릴랜드 종교 관용법(Maryland Toleration Act)의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독립은 ‘반쪽짜리 자유’임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을 중지 했을 때 대륙의 독립 진영이  얻게될 이득에 대해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당근을 제시 했다.  캐럴은 매우 현실적이며 전략 적인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세사람, 특히  존 아담스 에게  “우리가 영국과 싸우려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원조가 필수적이며, 캐나다의 가톨릭교도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이득을 들어 자신과 천주교가 이를 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식민지 내에서 가톨릭을 계속 탄압한다면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원조를 주저할 것이며, 캐나다 공략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아담스는   캐럴의 ‘프랑스 지원’ 논리에  새삼 무릎을 쳤다.
“캐럴 선생 당신은 참으로 영리한 정치가 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천주교 신앙이 프랑스의 함대를 불러올 수 있다면, 내가 앞장 서 필라델피아의 모든 종소리가 당신과 천주교도 들을  축복하게 만들겠소. 독립을 위해서 우리는 형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  그 때문이라도 나는 반대 할 수 없습니다. 지당한 진리요 진리.”

자연법과 이성을 숭상하던 제퍼슨은 캐럴의 논리에 지적으로 완전히 매료되었다. 인간 이성의 자유론이 특히 그랬고, 천주교가 종교의 최대 속성인 경건을 모토로 한다는 말이 그랬다. 그날 ,제퍼슨은 수첩을 꺼내 캐럴이 언급한 ‘종교적 평등’에 관한 구절을 메모하며, 며칠 뒤의 권리선언 그리고 훗날 버지니아 종교 자유령의 초안이 될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캐럴 선생님 , 양심의 영역은 정부가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지요. 진작 부터 캐럴 선생의  ‘제1시민’ 기고문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만들 새 나라는 특정 종교의 왕국이 아니라, 모든 이의 ‘생각할 권리’가 보장되는 공화국이 돼야 만 한다는 것이 제 소신이기도 합니다.  ”

묵묵히 듣고 있덩 워싱턴이  옆에서 결론 처럼 말했다.

“종교의 자유가 이 새로운 국가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 우리들의  다 같은 생각을 이번에 대륙회의 에서 작성할 식민지 권리 선언에 담도록 합시다.”

아담스 “내가 나서 회의에 정식 제안 하도록 하지요.”

제퍼슨 “그 초안을 오늘밤이라도 제가 써 보겠겠습니다.”

캐럴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자리에서 일어나 세사람에게 각각 목례를 보냈다.

“존경하는 세분 의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캐럴,  제1시민은   신문 기고를 통해 여러차례  “정교 분리와 종교적 평등”에 대한 주장을 폈고 식민지 전역에 걸쳐 일정 하게 공감 여론을 형성해 두고 있었다.  워싱턴과 아담스 제퍼슨 등은  이미 이 글들에 깊이 공감했던  상태였기에, 캐럴이 대접한 마데이라 와인과 블루크랩은 그들의 마음을 여는 ‘부드러운 마침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캐럴이 한마디 보탰다.  ” 여러분은 오늘 천군만마를 얻으셨습니다. 만약 전쟁이 나서 우리 워싱턴 장군(그는 그때 워싱턴을 단숨에 진급 시켰다)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때  뒤에 있는   우리가 어느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지가  중요합니까?  우리가 흘리는 피는 똑같은 붉은색입니다.  오늘 보셨던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메릴랜드 민병대에 자원한 청년들 입니다. 저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돼 있는 청년 들이지요.”

워싱턴이 그 말을 이내  받았다.

” 캐럴 선생은 끝내  저를 전쟁터로 몰아세우시는군요.  가야하면 가야죠. 그렇습니다. 캐럴 선생의 말씀대로  전쟁터에서 탄환은 병사의 교리를 묻지 않습니다.  캐럴 선생이  그간 보여준 헌신과 모범은  이미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한 당신 신앙의 증거로 우리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지휘를 맡게 된다면 우리 대륙군은 천주교 신앙 뿐 아니라  모든 기독 신앙을 가진 자들을 품을 것이며, 그들의 제단은 안전할 것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해 두겠소. 됐습니까? ”
워싱턴은 마데이라가 담긴 잔을 높이 들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캐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약속과 함께 경의를 표했다. 남은 두 사람도 캐럴의 눈앞에 잔을 들어 약속을 표시했다.

워싱턴의 이날 경의는 몇 년 뒤 독립 전쟁 국면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이었던 롱아일런드 전투에서  메릴랜드 400 이라 불리우는 천주교 청년 민병대의 희생적인 활약으로 돌아 오게 된다. 그때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에 캐롤의 메릴랜드 천주교 청년 민병대 400명은 워싱턴과 대륙군을 구하고 저들은 전멸에 가까이 산화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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