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대륙회의 부호 마부 찰스 캐럴턴 1 –
안동일 작
< 주님,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 주십시오.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와주십시오. 창과 단창을 뽑으셔서 나를 추격하는 자들을 막아 주시고, 나에게는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하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나를 해치려는 자들도 뒤로 물러나 수치를 당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흩으시고, 주님의 천사에게서 쫓겨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구절이 단상의 성공회 신부에 의해 낭송 되자 장내는 엄청난 전율에 휩싸였다. 마치 하느님이 현재 식민지의 상황을 미리 알고 답을 주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뒷쪽에 앉아 있던 찰스 캐럴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구절인 구약의 시편 35장이 낭송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신부의 기도가 이어졌다.
“”압제자의 매로부터 도망쳐 주님의 보호 아래 몸을 던진 미국의 주(States)들을 굽어살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대륙회의 의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전쟁터에서는 용기를 주시며, 잔인한 적들의 악한 계획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혜의 하느님이시여, 이 영예로운 집회의 평의회를 직접 인도하시어 모든 일을 가장 확실한 토대 위에 세우게 하소서”
1774년 9월 7일 오전 9시, 대륙회의가 열리고 있는 필라델피아 카팬터스 홀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광경이다. 기도의 주인공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공회 그리스도 교회의 제이콥 두셰(Jacob Duché)신부. 그가 대륙회의 개막 기도를 인도 했던 것이다. 두셰 목사는 당시 시편 35편을 낭독 한 뒤 즉흥기도를 이어갔는데 그 또한 본문 성경 못지 않은 감동과 울림을 던졌다.
대륙회의 개막기도는 그 전날 저녁 즉흥적으로 결정된 일이었고 이날 새벽에 케럴이 직접 자신의 마차를 두세 신부의 관사로 몰고 가 그를 대륙회의장으로 데려 왔기에 기도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지만 두세 신부는 엄청난 감동의 기도를 전했던 것이다.
이날 기도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버지나아 대표 조지 워싱턴이 보였다. 당시에는 서서 기도하는 관습이 일반적 이었기에 대부분의 대표는서 있었으나, 워싱턴은 무릎을 털썩 꿇고는 간절히 손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페트릭 헨리도 무릎을 꿇고 까지 낀 두손으로 간절한 기도를 따라했다. 기도가 끝난 뒤 좌중은 ‘에이멘’ 소리도 제대로 못낼 정도로 큰 울림의 감동을 받아야 했다. 기도가 지루했을 수록 아멘 소리가 큰 법이다.
대표적인 이성주의자이자 당시 종교적 형식에 비판적이었던 존 아담스 조차 이 기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광경을 보고 “천국이 내린 위로”라고 표현했다.
그는 부인 아비게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열정적이고 간절하며, 우아하고 숭고한 기도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극찬했다. 또한 “돌 같은 마음도 녹일 만큼 감동적이었으며, 평화주의자인 퀘이커교도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도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대표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 건국 정신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찰스 캐럴의 공이다.
찰스 캐럴은 74년 9월에 열린 1차 대륙회의의 공식 대표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자문위원 격으로 초기부터 메릴랜드 대표단에 합세해 꽤 많은 의미있는 일을 해냈다. 대부분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 개막 기도 역시 찰스가 주동이 돼서 이뤄 낸 일이었다. 캐럴이 공식 대표로 지명된 것은 2차 대륙회의가 장기간 지속되던 76년의 일이다.
1774년 9월 5일, 각계의 각고의 집중적인 노력 끝에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6명이 필라델피아 목수 회관(Carpenters’ Hall)에 모였다. 각 식민지 마다 2명에서 5명의 대표를 파견 했는데 이것이 제1차 대륙회의였다.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아다시피 미국의 탄생을 이끈 회의체로, 1774년부터 178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되었는데 1차는 한달여 만에 끝났고 2차는 이듬해인 1775년 5월 10일에 소집돼 1781년 명칭이 대륙 연방 의회(Congress of the Confederation)’로 바뀔때 까지 식민지 연합의 의회와 정부 역할을 한 독립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였다.
개막 당시 대륙회의는 비공개로 철저히 비밀리(Secret session)에 진행되었다. 회의장에는 각 식민지에서 선출된 대표들(Delegates)만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일반 시민이나 언론의 방청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영국에 대항하는 반역적인 성격의 논의가 많았기에 외부의 압력이나 방해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자문역을 맡은 각지의 혁명위원회 위원급의 인사들의 참석은 허용됐던 모양이다. 실제 대표들은 식민지 각주의 사정에 의해 수시로 교체 되기도 했는데 대륙회의와 연합의회 전체 기간(1774~1789)을 통틀어 대표로 임명되었던 사람은 총 340명에 달한다. 56명은 그중 독립 선언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서명한 상징적 인원이다.
캐럴과 메릴랜드 대표들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 이었기에 일찍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있었다. 대표들의 숙소 문제며 회의 의제 등을 논의 하기 위해 사무엘 아담스, 페트릭 헨리 등 주요 주최측 인사들 과의 만남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최측이라고 표현 하면 어폐가 있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대륙 회의를 성사 시킨 주동자들은 캐럴의 등장을 퍽이나 반겼다. 정식 대표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신망과 실력을 지닌 인사였기 때문이다. 초기 대표단에 명단을 올리지 않은 것은 캐럴의 심모였다. 당초 메릴랜드 혁명위는 캐럴을 추대했지만 아직 가톨릭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타 식민지 주를 생각해 고사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명한 인사였고 주최측은 그의 명석함과 막대한 재력을 혁명의 소중한 자산으로 여겼기에, 그를 환영 했다. 특히 주동자 중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보스턴의 사무엘 아담즈의 환대와 반가움의 표현은 상상 이상이었다. 새뮤얼 애덤스 (Samuel Adams)는 ‘혁명의 선동가’로 불리며, 일찍 부터 매사추세츠에서 통신위원회를 조직해 각 식민지에 연락망을 구축했고 가장 먼저 대륙회의 소집을 강력히 촉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유의 아들이라는 전국 비밀 조직의 수장이기도 했다.
사무엘 애담스는 논설로 유명해진 인물. 이점 찰스 캐럴과 비슷하다. 한 사람은 보스톤 가제트를 통해, 한 사람은 메릴랜드 가제트를 통해… 사무엘 애덤스와 찰스 캐럴은 각각 북부(매사추세츠)와 남부(메릴랜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필객이었으며, 신문을 여론 형성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둘다 변호사는 아니다.
사무엘 애덤스는 보스톤 가제트에 ‘Vindex’, ‘Candidus’, ‘Observer’ 등 무려 25개 이상의 필명을 사용하여 마치 여러 사람이 독립을 외치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면서 필봉을 휘둘렀다. 그의 필치는 매우 선동적이고 대중적이었다. 영국의 폭정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보스턴 시민들의 분노를 결집하는 데 천재적이었다. 그는 신문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자유의 종소리’라고 비유 했다.
아다시피 메릴랜드 가제트의 1등 논객 찰스 캐럴의 가장 유명한 필명은 ‘First Citizen’ (제1시민) . 그는 사무엘보다 좀 더 법률적이고 철학적이며 우아한 문체를 구사했다. 천주교도는 공직에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학식과 철학 그리고 정치적 식견을 증명해야 했다.
두 가제트 스타가 처음 만난 것은 1차 대륙 회의가 시작되긴 이틀 전인 9월 4일 오후 카펜터스 홀에서 였다.
두사람은 만나자 마자 서로를 얼싸 안았다.
“정말 보고 싶었소, 캐럴 선생.”
“저도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애덤스 선생님.”
애담스는 당시 52세(22년생) 였고 캐럴은 37세 (37년생)였다.
“우리 일등 시민이 일등 미남 이라는 것은 짐작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잘 생겼으리라는 것은 몰랐소이다.”
“과찬 이십니다. 선생님이야 말로 제가 상상했던 풍모이십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서나이 첫 정은 8초안에 가늠된다고 했다.
“캐럴 선생, 당신의 글은 모두 찾아 읽어 보았소, 어찌 그리 문장이 유려 하시오”
“선생님만 하겠습니까?
“하하 내글이 건초 더미를 나르는 우마차라면 당신의 글은 세련된 세이즈였소.”
세이즈는 당시 최고급 쌍두 마차의 기종 이름이다.
“사무엘 선생님, 선생님의 빈덱스(Vindex) 는 보스턴의 부두 노동자들을 깨웠지만, 저의 ‘제1시민’은 메릴랜드의 신사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런 차이 였겠지요”
“ 우리의 펜 끝이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소. 정말 반갑소. 나의 소중한 동지 찰스. “
이렇게 반가운 해후를 한 두 사람은 캐롤의 쌍두마차 커리클에 올라 시티 터반으로 향했다. 당시 필라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자 여관을 겸한 선술집 이었다. 캐럴의 마차는 검게 칠한 가죽과 잘 닦인 검은 나무로 마감되어 있었다. 화려함으로 과시하지 않아도 그 견고한 만듦새만으로도 주인의 안목과 재력을 짐작게 했다.
“듣던 대로 캐럴 선생은 검소 하십니다. 대륙 최고의 부자의 마차 치고는 너무 작은 것 아니오?”
” 부러 이 마차로 택했습니다. 이 마차를 대륙 회의에 기증 하려 합니다. 요긴하게 쓰십시오. ”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올시다.”

찰스 캐럴 캐럴턴(위)과 사무엘 아담스(아래) 맨 위 사진은 카펜터스 홀 전경

당시 마차는 정말 요긴한 교통 수단이었다. 또 필라델피아의 도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좁고 울퉁 불퉁 험한 길을 견디기 위해서는 화려한 의전용 마차보다 튼튼한 쌍두마차(Two-horse carriage)가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다. 실제로 이후 대륙회의는 대표들을 실어 나르거나 신부며 목회자들을 데려오는 등의 실무적인 목적으로 이 마차를 매우 유용하게 운용했다. 당시 튼튼한 쌍두마차라면 셰이즈(Chaise)나 조금 더 견고한 커리클(Curricle) 그리고 파에톤(Phaethon)이 있었는데 그때 찰스는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커리클을 가지고 와 마부를 딸려 필라에 두고 돌아갔던 것이다.
커리클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2인승 마차로, 당시 영국과 미국 상류층 사이에서 ‘기동성’과 ‘품격’을 동시에 잡은 모델로 통했다. 덩치가 큰 4두 마차(Coach)보다 가벼워 필라델피아의 좁은 골목을 다니기 좋았고, 서스펜션(스프링) 기술이 적용되어 비교적 승차감이 좋았다.
찰스의 커리클은 장식은 배제했지만, 바퀴살과 차체는 단단한 활엽수로 제작돼 험한 길에서도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묵직하게 나아갔다. 특히 좁은 골목길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가난한 글쟁이인 나는 마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정말 유용한 마차입니다. 그려”
좁은 골목 빈민가 아이들이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광경을 보면서 사무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들은 금색 장식된 4두 마차엔 손을 흔들지 않았다.
얼마 뒤 찰스는 집에 있던 파에톤을 손수 몰고 와 대륙회의 마부 노릇를 하기도 했다. 파에톤은 차체가 높고 바퀴가 커서 험로 주행에 유리했고 높은 안장 덕에 주인이 직접 마차를 모는 경우에 쓰이는 기종이었다. 캐럴이 직접 마부석에 앉아 의원들과 성직자들을 태웠던 것이다. 이러니 사람들이 그를 안 좋아 할 수 없었다.
독립 일꾼 들과 성직자를 태우고 진흙탕 길을 거침없이 헤쳐 나가는 찰스의 파에톤의 거대한 뒷바퀴는 미국 독립운동의 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캐롤의 그날 숙소는 조금 떨어진 메리 성당 사제관이었지만 캐롤은 시티 터반 전채를 대륙회의 주최측 인사들을 위해 전세 놓았었다.
개막전야의 주요 인사 상견례를 겸한 파티는 그날에 이어 다음날과 그 다음 날에 까지 저녁 마다 터반에서 열렸고 두셰 신부의 개막 기도도 이때 캐럴의 조심스런 제안과 의장을 맡은 버지나아의 페이턴 랜돌프 (Peyton Randolph)와 펜실베이니아의 대표적인 온건파(보수파) 리더 조셉 갤러웨이 (Joseph Galloway)의 적극적인 찬동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시 자유주의, 이성주의에 함몰 돼 있었던 주요 인사들은 처음에는 무슨 특정 종교인 기독교식 개막 기도 냐며 난색을 표 했지만 세사람의 적극적인 제안과 나머지 다수의 찬동으로 기도 자체는 하기로 결정 됐다. 하지만 어느 교파의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는 이견이 분분 했다.
독립 국면의 종교 지형과 건국 아버지들의 종교관을 파악할 수 있는 사안이다.
회의 둘째 날이었던 그날 오후 기어코 보스턴에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회의장 분위기는 매우 무거워졌었다. 주사위는 던져 졌고 이제 신의 가호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들었던 모양이다. 특히 찰스 캐럴의 생각이 그랬다. 그래서 그날 저녁 터반의 모임에서 내일 열릴 본격 회의를 기도로 시작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한대로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성공회, 청교도, 장로교 퀘이커 등)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다. 이신론자들은 냉소적 이었고 종교 있는 이들은 저마다 자신 교파의 기도가 진짜 기도라고 나섰던 것이다.
몇몇 이들은 천주교 신자 캐럴이 며칠간의 접대를 무기삼아 천주교 신부를 천거하면 반대 하기도 그렇고 어쩌나 싶었단다. 하지만 캐럴이 그리 분별력 없고 경솔한 사람은 아니었다. 두세 신부를 천거한 이는 필라 출신 갤러웨이였다. 하지만 성공회라는 것이 문제 였다. 과연 성공회 신부인 그가 영국왕에 반대하는 모임에 올수 있겠냐는 의견이 제기 됐던 것이다. 그때 찰스가 나섰다.
“두세 신부라면 기꺼히 맡아 줄 겁니다. 제가 내일 아침에 가서 설득 하고 회의장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의견이 분분 했다. 못하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한쪽에서 그러면 그건 하늘의 뜻으로 알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했다. ‘ 아무래도 성공회는 그런데…’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성사 안 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필라델피아를 제 집 드나듯 하는 케럴은 두세 신부와는 몇차례 안면이 있었다. 캐럴 생각에도 그 라면 맡아 줄 것도 같은데 싶었다. 다른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원도 아닌 아닌 자기가 더 나서기는 어려웠다.
이때 회의의 주장 격인 사무엘 애덤스가 나서 결론을 냈다. 독실한 청교도였던 사무엘은 “우리는 편협한 사람이 되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친구이자 경건한 분의 기도라면 기꺼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회 신부님 접촉 하도록 하지요 ” 라고 말해 갈등을 잠재웠다.
찰스는 그날 7일 아침 수소문 해 두세 신부를 찾아갔고 신 새벽인데도 의외로 그가 단박에 흔쾌히 승락해 그를 마차에 싣고 회의장으로 달렸던 것이다. 두세는 마차에 앉자 마자 성공회 성무 일과표를 펼쳤다. 성공회도 천주교와 마찬 가지로 그날 그날의 기도 주제와 성구를 중앙에서 정해 인쇄물로 내려 보내는 모양이었다.
“이럴수가… 캐럴 선생, 여기 좀 보시오, 오늘의 성구가 시편 35편 입니다.”
두세 신부가 깜짝놀라 성구를 보여줬다. 다윗이 아비멜렉과 싸우기 전 올리는 기도였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절묘했다.
대륙 회의 개막 기도는 이렇게 헤서 최고의 감동과 감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본격 개막일날의 멋진 기도로 좌중의 심금을 울렸던 두세 신부는 얼마 후 대륙회의 원목으로 추대 된다.
두세의 이야기 , 이 이야기도 다음에 또 하기에 어려울 듯 해서 요약해서 들려 드리도록 한다. 작가는 두세 신부에 관한 기록을 볼때 마다, 한국의 친일파로 변절한 민족대표들을 생각 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비중있게 다루게 될 박희도 선생이 특히 생각난다.
제이콥 두세 (Jacob Duché)는 173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찰스 캐럴과 동갑이다. 그의 성인 ‘두세(Duché)’에서 짐작 되듯 프랑스계 혈통이었지만 그는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다.
원목으로 추대된 제이콥 두셰(Jacob Duché) 신부는 그후 가열차게 독립의 원목 노릇을 제대로 한다. 그가 1775년 7월 20일 대륙회의 대표들 앞에서 행한 설교 <미국의 포도나무(The American Vine)>는 미국 독립 전쟁 초기 식민지인들의 저항 의지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 가장 중요한 문건 중 하나로 꼽힌다.
두셰 목사는 이번에는 시편 80편 8~15절을 본문으로 삼았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느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는 이 구절을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 상황에 직접 비유했다. 애굽(이집트)은 억압하는 영국이었고 포도나무는 신대륙에 심겨진 식민지 주민들. 하느님은 포도나무를 정성껏 심고 돌보신 분
두셰는 영국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와 정착한 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포도나무’를 옮겨 심으신 섭리적 사건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영국의 강압적인 조세 정책과 군사적 위협을 포도나무를 짓밟으려는 “숲속의 멧돼지”와 “들짐승”에 비유했다.
그는 식민지인들이 무기를 드는 것은 공격적인 반역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중한 ‘포도나무(자유와 삶의 터전)’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역설했다. 결론으로 그는 회개와 단결을 촉구하면서 하느님이 포도나무를 계속 보호하시게 하려면, 식민지인들이 먼저 도덕적으로 깨끗해지고 일치단결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많은 식민지 주민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과 자유 수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두셰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통해 그들의 양심에 가책을 덜어주었다.
이 설교는 대륙회의의 요청으로 책자로 인쇄되어 널리 유포되었으며, 사실상 미국 혁명의 초기 공식 선언문과 같은 위상을 가졌다.기록가 이기도 한 존 아담스는 이 설교를 듣고 “탁월한 웅변”이라며 찬사를 보냈고, 이 설교가 식민지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통해 ‘혁명의 사도’로 추앙받던 두셰 목사 (한국에서는 성공회 성직자를 꼭 신부라고 호칭 한다지만 미국에서는 목사 로도 호칭한다) 는, 2년 뒤 필라델피아가 영국군에 점령되자 “이 포도나무(미국)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며 영국 국왕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조지 워싱턴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한때 열광했던 <미국의 포도나무> 설교는 그에게 오히려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강하게 붙이는 근거가 됐다.
제이콥 두셰 목사의 전향은 미국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지식인의 변절’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는 1777년 10월 8일자로 돼 있는데 필라델피아 점령 직후 다. 1777년 9월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하자 두셰는 체포되어 하룻밤 동안 투옥되었다. 석방된 직후 그는 워싱턴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독립 선언을 취소하고 영국과 화해할 것을 종용하며, 대륙회의 의원들을 “원칙도 없고 무식하며 하층민 출신인 자들”이라고 폄하했다. 또한 대륙군을 “훈련되지 않은 겁쟁이들의 집합”으로 묘사하며 승산 없는 전쟁을 끝내라고 압박했다.
워싱턴은 이 편지를 읽고 “놀라움보다 우려가 크다”며 즉시 대륙회의에 회부하여 공개했다. 이는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그가 단순한 기회주의자라기보다 심리적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분석한다. 그는 영국의 압제에 저항하는 것(Whig)에는 동의했지만, 영국 국왕과의 완전한 결별(Independence)은 신성모독이자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재앙으로 보았다. 많은 이들은 그의 전향이 전쟁의 압박으로 인한 정신적 불안정 때문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 주는 그에게 고역죄(High Treason)를 선고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1777년 12월 영국으로 망명한 그는 런던의 여아 고아원(Lambeth Orphan Asylum) 사목으로 일하며 유능한 설교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영국인들로부터는 “바보”라는 조롱을, 미국인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끊임없이 귀국을 간청했다. 결국 1792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묵인 하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당시 그는 이미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한 상태였으며,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대중의 외면 속에서 고독하게 지내다 1798년 사망하여 세인트 피터 성당 묘지에 묻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