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가제트의 퍼스트 시티즌 논쟁 3 –
안동일 작
찰스 캐럴과 건국의 아버지들, 미국 독립전쟁을 살펴 보면서 작가는 새삼 하늘의 뜻을 생각하게 됐다. 미국 독립이야 말로 하늘의 뜻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 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 군대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민병대가 단기전도 아닌 국력을 건 8년 간의 전쟁 끝에 이겼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거기다 각자, 그리고 각 지역의 생각하는 바와 목표가 다르고 목소리 크기가 사뭇 다른데 이를 뭉뚱그려 합중국을 만들어 내 공화제와 대통령제의 민주주의를 역사상 처음으로 구현해 냈다는 점이 그렇다.
사실 독립 최고의 영웅 조지 워싱턴도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하느님의 섭리다. 전투에 패배해 위기에 봉착 했을 때도, 전쟁에 이겼을 때도 , 독립이 이루어졌을 때도 대통령에 취임 하면서도 이 섭리 라는 말을 썼다. 독립 전쟁 이전인 1755년 7년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워싱턴은 한 전투에서 타고있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겉옷에 네 개의 총알구멍이 뚫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후 형 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전능한 섭리의 배치로 인해 모든 인간적인 확률과 기대를 뛰어넘어 보호받았다”라고 적었다.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778년에는 동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미국의 독립 투쟁 과정에 나타난 신의 도움을 감사해하면서 이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섭리의 손길이 이토록 명백하게 나타났기에, 믿음이 없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하며 감사를 표하지 않는 자는 사악한 자보다 못하다.”는 멋진 표현으로 전쟁의 성과를 신의 공로로 돌렸다.
대통령 취임 첫 해인 1789년, 워싱턴은 미국 정부 차원의 첫 추수감사절을 선포하면서 ‘섭리’의 개념을 다시 정리 하면서 이에 대한 감사를 국가적 의무로 자리 매김 시켰다. 그는 선포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의 혜택에 감사하는 것은 모든 나라 안의 의무”라고 명시해 국가의 탄생과 안정이 신의 보호 아래 있음을 공식화했다.
미 합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워싱턴의 이런 신념과 신앙이 깃든 고백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독립은 신이 선물로 제시한 ‘언덕위의 도시’ 건설의 힘겨웠지만 성공적인 출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여겨야만 한다.
찰스 캐럴의 등장이 미국 천주교를 위한 신의 한수였다는 예기를 하면서 모든 일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날줄과 씨줄로 얽힌 인연이 그 결과를 향해 서서히 짜여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바로 미국의 독립이 그랬다.
미국 독립의 날줄과 씨줄은 그간 인간 역사가 만들어낸 문명과 학문, 신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학의 집대성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인간관 에서 부터 인간은 서로 돕고 사랑 하기 위해 조물주가 창조 했다는 기독교 신앙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이른바 서구 문명이 발굴해 낸 모든 제의와 지식 그리고 제도 까지 아우르는 종합 백과 전서식 일대 사변이 미국의 독립운동과 그 독립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지 워싱턴을 위시해 토마스 제퍼슨이며 사무엘 아담스 베자민 프랠클린 이며 찰스 캐럴 등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빼어났을 인물들의 등장은 날줄과 씨줄의 읽힌 인연의 화룡점정으로 작용했다.
신의 섭리 중 하나는 그무렵 식민지의 독립이 시대정신으로 떠 올랐다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알려지기는 프랑스와의 7년 전쟁 이후 부채가 늘어난 영국이 설탕법(1764), 인지세법(1765) 등 새로운 세금을 계속 부과하고 70년대애 들어 일련의 참을 수 없는 ‘강압법'(Intolerable Acts)을 제정 하자 식민지인들이 이에 대한 불복종 운동, 영국 상품 불매 운동 으로 저항이 싹 트기 시작 했다고 되어있다.
맞는 말이지만 미국 독립이 영국 본국의 경제적 수탈 때문에 일어 났다고 하는 것은 성부른 판단이다. 당시 식민지의 경제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미국 독립 혁명 직전 당시 13개 식민지는 지역별 지리적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구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북부(뉴잉글랜드) 식민지는 토양이 척박해 대규모 농경보다는 어업, 조선업, 해상 무역이 발달했다. 보스턴은 주요 무역 항구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중부 식민지는 ‘식민지의 빵 바구니’로 불릴 만큼 밀과 곡물 농사가 활발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남부 식민지는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 담배, 쌀, 인디고(염료) 등 수출용 현금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플랜테이션) 경제가 주를 이루었다. 1774년 당시 식민지인의 평균 소득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연간 약 13.85파운드였다. 세율 또한 11.5%로 영국의 57%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오히려 저항의 독립 움직임이 일면서 무역 중단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곤궁을 겪게 된다. 영국과의 무역이 끊기면서 신용 시장이 붕괴되었고,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발행한 지폐(컨티넨탈 노트)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774년에서 1789년 사이 미국의 1인당 GDP는 약 30% 감소했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에 맞먹는 수준의 극심한 경제적 타격이었다. 식민지인들은 이를 감수했다.
독립이라는 시대 정신은 경제적 수탈 보다는 인지가 발달한 식민지 지식층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혔다는 심정적 측면이 더 강했던 것이다.
모든 세상일이 그렇듯이 독립 운동 역시 사람의 일이다. 독립 운동의 국면에서 미국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독립 건국의 아버지 들이 그들의 대표다. 운동은 도수 체조 아닌 담에야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먼저 눈여겨 볼 사안이 독립운동 국면에 식민 각지역에 후일 혁명 위원회라 불리우는 조직이 지도급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시다발로 결성됐다는 점이다. 이 조직이 통신위원회, 혹은 연락 위원회 (Committees of Correspondence)와 특별 컨벤션 혹은 민중 의회(Provincial Conventions)다.
명칭은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식민 각주를 연결 하는 연락 위원회와 기존의 식민지 의회를 대치한 새로운 민회, 이 두 기구는 영국 왕실 총독의 통치를 대체하는 사실상의 혁명 정부 역할을 했다.
통신위원회는 1760년대부터 등장했는데 1772년 보스턴에서 본격적으로 조직된 후, 1773년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제안으로 전 식민지에 확산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 본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등 가혹한 처벌법(참을 수 없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각 식민지 지도자들은 각자 대응하는 대신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보스턴의 유명 논객 사무엘 아담스가 그 주동 역할을 했다.
각 지역으로 번져 간 통신위는 영국의 정책과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 사항에 대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통신망 역할을 하면서 연계 했고 상황이 더 나빠지자 이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각지에서 기존의 식민의회를 대신 하는 민중 의회, 특별 컨벤션 (Provincial Conventions/Congresses) 을 만들었던 것이다. 컨벤션은 의회와 정부 역할을 함께 하면서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포함한 공동 저항 행동을 조율하고 독립 여론을 확산시켰다.
찰스 캐럴의 메릴랜드에서도 메릴렌드 컨벤션과 연락위원회가 결성 됐는데 이 둘을 합쳐 혁명위원회라고 불렀다. 메릴랜드에 연락 위원회가 만들어 진 것에는 찰스 캐럴의 역할이 지대 했다. 73년 여름 개미지옥과의 논쟁이 캐럴의 승리로 귀결되자 식민의회에서도 이에 자극 받아 총독의 월권, 독주를 저지 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자 총독은 식민 의회에 해산에 가까운 휴회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의원들과 민중 리더들은 개인 차원 조직으로 산재해 있었던 통신의원회를 확대 보강 했고 기능을 잃은 식민 의회대신 민중 컨벤션을 결성해 혁명 위원회를 구성했고 재야의 찰스 캐럴을 그 위원으로 위촉 했던 것이다.
매릴랜드 뿐 아니라 13개 식민지 각지에서 비슷한 비슷한 수순과 전차로 연락위원회와 민중의회가 구성됐다. 거의 모든 곳에서 기존 식민지 의회는 해산되거나 기능을 상실했다. 관료 체계 밖에서 선출된 독자적인 컨벤션은 법적 토대 없이 운영되었지만, 식민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총독과 왕실 관리들의 권한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왕실 총독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지고 안전이 위협받자 대부분 도피했다. 반란군에게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영국 군함으로 피신하거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일부 총독은 체포되기도 했다. 뉴저지주의 마지막 왕실 총독인 윌리엄 프랭클린(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들)은 반역 활동을 조직하려다가 1776년 6월 체포되어 코네티컷에서 투옥되기 까지 했다. 메릴랜드의 총독 로버트 에덴 경은 비교적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스스로 떠날 기회를 얻었다. 왕실 총독들 중에서는 조지아의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 경이 1782년 영국군이 사바나에서 철수할 때까지 직무를 수행하며 가장 늦게까지 남은 축에 속한다. 반면, 버지니아의 던모어 경(Lord Dunmore)은 1775년에 일찍 도주했다.
통신위원회와 특별 컨벤션들은 광범위한 정보 네트워크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s) 역할을 하며 왕실 권위를 효과적으로 대체했다. 어떻게 그 위원회들이 총독들을 제치고 실권을 행사 할 수 있었는지 또 왕실 총독들은 큰 저항 없이 이를 용인하거나 도망칠 수 밖에 없었는지 궁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또한 날줄과 씨줄이 미국의 독립으로 모아지고 있었던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 보다 당시 총독들이 자체 무력을 갖지 않고 있지 않았다. 총독들은 개인 경호원이나 소수의 치안 관리는 거느리고 있었지만, 독립적인 ‘총독 직속 상비군’은 사실상 없었다. 거기에 그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기반은 본국의 지원과 지역의 법적 제도였는데, 혁명기에는 이 기반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던 것이다.
총독의 유일한 군사적 기반은 민병대(Militia)였다. 그런데 식민지의 기본 무력인 이 지역 민병대는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 소집되는 군대였다. 법적으로 식민지 민병대의 최고 사령관(Commander-in-Chief)은 해당 지역의 총독이었다. 독립 기운이 고조되자 민병대원 대다수가 애국파(Patriots)인 통신위원회와 특별 컨벤션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총독이 소집령을 내려도 주민들이 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총독을 압박하는 무력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주둔해 있었던 영국 정규군은 어땠을까? 총독은 행정관일 뿐, 식민지에 주둔한 영국 정규군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군 지휘권은 북미 총사령관(토마스 게이지 장군)에게 있었다. 총독이 위험에 처해도 인근에 정규군 부대가 없거나 지휘관이 협조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없었다. 실제로 1775년경에는 대부분의 정규군이 보스턴 등에 집결해 있어, 다른 지역 총독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다.
이런 정황에서 총독들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무력의 한계로 인해 쫓겨나야 했다. 버지니아의 던모어 총독은 민병대가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화약고를 점거하고 노예들에게 해방을 담보로 입대를 종용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분노를 샀고, 결국 그는 영국 군함으로 피신하여 배 위에서 통치권을 주장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조시아 마틴 총독은 애국파 민병대가 총독 관저를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 대포를 마당에 묻고 도망쳤다.
이처럼 총독들은 “자체 무력”은 없었고, 자신이 지휘해야 할 “지역 민병대”는 배신했으며, 본국의 “정규군”은 너무 멀리 있거나 부족했다. 이 때문에 혁명 기구(컨벤션 등)가 행정력을 장악했을 때 총독들은 무력하게 쫓겨나거나, 체포되거나, 바다 위의 영국 군함으로 숨어들어 ‘선상 망명 정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총독(주지사)들 중에는 독립을 지지한 이도 있다. 순서가 뒤바뀌는 감은 있지만 따로 알아볼 기회가 없기에 지금 알아본다. 밴자민 프링클린과 그의 장남인 윌리엄 주지사 부자간의 이례적인 스토리에 대해서 만큼은 따로 알아본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13개 식민지 총독 중 유일하게 미국 독립 대의를 지지한 이가 코네티컷 총독 조너선 트럼벌(Jonathan Trumbull)이다 . 대부분의 총독들은 영국 국왕에 충성하며 혁명 세력과 대립하다 쫓겨났지만 트럼벌은 예외였다. 그는 미국 독립 대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그는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총독인 동시에 독립한 코네티컷주의 초대 주지사가 되어 1784년까지 재임했다.
트럼벌의 코네티컷 에서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었을까?
먼저 그가 독특한 자치 구조와 선거제 총독 이었다는 점이 그 이유로 꼽힌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식민지는 영국 국왕이 직접 총독을 임명하는 왕실 직할령(Royal Colony)이었다. 하지만 코네티컷은 1662년 국왕 찰스 2세로부터 받은 왕실 칙허장(Royal Charter)에 따라 매우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시민(유권자)들이 직접 총독과 입법부 의원을 매년 선출했다. 트럼벌은 영국 국왕이 내려보낸 관리가 아니라 주민들이 뽑은 대표였기 때문에, 독립 전쟁이 터졌을 때 주민들의 지지를 그대로 유지하며 직무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트럼벌은 소극적 지지만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지 워싱턴의 신뢰받는 조력자로서 코네티컷을 대륙군의 핵심 식량 및 군수품 보급처로 만들었던 독립 유공자로 자리했다. 코네티컷이 ‘보급 주(The Provision State)’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트럼벌과 조지 워싱턴은 독립 전쟁의 승리를 이끈 군 사령관과 보급 책임자로서의 깊은 신뢰 관계였다. 워싱턴은 트럼벌을 “가장 위대한 애국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매우 존중했다.
워싱턴은 전쟁 중 어려운 문제나 보급난에 봉착할 때마다 “우리는 조너선 형제와 상의해야 한다(We must consult Brother Jonathan)”라고 말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트럼벌은 코네티컷을 ‘보급 주(The Provision State)’로 만들어 대륙군이 필요로 하는 식량, 의복, 군수품의 약 60%를 조달했다.
워싱턴은 수시로 트럼벌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에 필요한 자원을 요청했고, 부유했던 트럼벌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이를 이행했다. 트럼벌의 아들들도 워싱턴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장남 조너선 트럼벌 주니어는 워싱턴의 군사 비서(Military Secretary)로 일하며 독립 전쟁 최후의 전투인 요크타운 전투까지 워싱턴의 곁을 지켰다. 후일 주니어는 캐럴과도 매우 절친한 관계를 맺는다.
들째 아들 존 트럼벌은 ‘혁명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역시 워싱턴의 부관(Aide-de-camp)으로 복무했으며, 나중에 워싱턴의 유명한 초상화들과 독립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화폭에 담았다. (연방 의사당 독립시기 벽화의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또 조카 조셉 트럼벌은 대륙군의 첫 번째 병참총감(Commissary General)으로 임명되어 워싱턴의 보급 행정을 도왔다.
그런데 그의 이런 행보에는 그의 신앙심, 종교가 깊이 관련 돼 있다. 조너선 트럼벌은 성공한 무역업자 였지만 독실한 회중교회 신자였으며, 한때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 했던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였다.
그는 10대 초반에 하버드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1727년 학부 졸업 후에도 3년 동안 신학 공부를 지속해 1730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회중교회 설교자(목사) 자격을 얻었다.
코네티컷주 콜체스터의 한 교회에서 목사직 제의를 받고 부임을 준비하던 중, 1731년 형 조셉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가업인 무역업을 돕기 위해 목회자의 길을 포기했다.
1735년 그는 네덜란드 순례자들의 목사이자 회중교회 교단 설립자 중 한 명인 존 로빈슨(John Robinson)의 직계 후손인 페이스 로빈슨(Faith Robinson)과 결혼해 청교도 공동체 내에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고 이를 기반으로 자치 총독에 당선 됐다.
18세기 코네티컷의 정치 구조상 종교 문제는 입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제1차 대각성 운동’ 당시 보수적인 ‘올드 라이트(Old Lights)’와 개혁적인 ‘뉴 라이트(New Lights)’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해 양측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청교도적 ‘자유(Liberty)’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깊이 깔려 있었으며, 이는 그가 독립 전쟁 당시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일반 상황으로 돌아와 당시 사정을 좀더 살펴 본다. 총독 들에게는 산하 경찰 조직도 없었나 싶은데 그랬다. 독립 혁명 당시 식민지에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경찰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의 전통을 따른 보안관(Sheriff), 치안관(Constable), 야간 파수꾼(Watchmen) 등이 지역 치안을 담당했다.
보안관 (Sheriff)이 카운티(County) 단위의 가장 중요한 법 집행관이었다. 주로 총독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범죄자 체포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 선거 관리, 법원 명령 집행 등 광범위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심각한 범죄나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 보안관은 지역의 일반 시민들을 소집하여 일시적인 무장 조직인 ‘포세(Posse)’를 구성할 권한이 있었다.
그 밑의 치안관 (Constable)은 마을(Town) 단위의 치안을 담당했다.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선출되거나 임명되었으며, 소음 제어, 무단 방치 가축 관리, 가벼운 범죄 수사 등을 맡았다. 야간 파수꾼 (Night Watch)은 주로 보스턴,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 또는 유급 인력이었다. 밤중에 순찰하며 화재를 감시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단속했다. 당시의 법 집행관들은 전업 공무원이기보다는 본업(농부, 상인 등)을 따로 가진 경우가 많았고, 제복을 입지 않았다. 대규모 폭동이나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는 각 식민지의 민병대가 투입되어 치안을 유지하는 최후의 무력 수단 역할을 했지만 이들 민병대는 그때 총독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혁명이 시작되면서 기존의 보안관(주로 왕실 충성파)들은 권위를 잃었고, 그 역할은 혁명파 통신위원회나 안전위원회(Committees of Safety)가 장악한 민병대와 패트리엇(애국파) 성향의 치안관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들은 영국 충성파는 주민들을 감시하고 자산을 압류하는 등 이른바 ‘혁명적 법 집행’을 수행했다.
한편 혁명 기구들이 속속 결성될 때 영국군은 말 한대로 식민지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기보다는 특정 거점 위주로 주둔하고 있었다. 1774년 당시 북미 전체의 영국 정규군은 약 7,000명 수준이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인 약 4,000명이 매사추세츠주(특히 보스턴)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1774년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계엄령에 준하는 강압법(Coercive Acts)을 시행하며 군대를 증강 배치했다. 나머지는 무역 도시인 뉴욕과 몇몇 국경에 집중해 있었다.
물론 영국 정규군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었기에 총독들의 지원 요청과 왕실의 명에 따라 이런 기구들을 불법적인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지리적·전략적 한계로 인해 지역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그래도 독립혁명 와중에 체포된 인사들이 다수였으며 9명 정도가 교수형에 처해 졌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독립 운동은 일제 때 우리의 독립운동과 마찬 가지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대사였다. 그런데도 식민 주민들은 리더들의 웅변에 즉각 호응해 분연히 총을 들었다. 후일 미국인들이 한국의 3.1운동을 그토록 높이 평가 하는 전차이기도 하다.
1774년 9월, 보스턴의 게이지 장군의 영국 정규군은 막 모여든 식민지 민병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보스턴 인근의 민병대 무기고를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이는 식민지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켜 오히려 민병대의 결집을 가속화 했다.
1775년 4월, 혁명 지도자(새뮤얼 애덤스 등) 체포와 군수품 탈취를 위해 콩코드로 진격하던 영국군이 민병대와 충돌하며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가 발생했다. 이것이 공식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전에 우리는 대륙회에 대해서 살펴 봐야 한다. 대륙회의야 말로 그 시절 미국 식민지의 난다 긴다 하는 빼어난 ‘사람들”들의 집합이었고 건국 아버지들의 산실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중심에 기독교 신앙이 있었고 그 한 축을 메릴랜드의 천주교인 찰스 캐럴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해 글로 발표한 이는 아직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 부분도 월드 프리미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