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가제트의 퍼스트 시티즌 논쟁 2 –
안동일 작
개미지옥 대니얼 덜레이니는 일등 (제1) 시민 찰스 캐럴이 변호사 자격도 없는 미개한(?) 가톨릭 신자임을 비난하며 공격했지만, 대중은 찰스의 설득력 있는 논리와 세련된 법학 지식에 더 열광했다. 덜레이니는 총독이 임명하는 메릴렌드 상원의원 이었고 변호사였지만 모든 면에서 일등시민 찰스 캐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국 식민지 시대에 변호사가 되는 주된 방법은 실무 경험을 쌓는 도제 제도(Apprenticeship)였다. 현직 변호사의 밑에서 일하며 법을 배우는 이른바 ‘독법(Reading Law)’ 과정이었다. 지망생은 기성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서기 업무(계약서나 유언장 작성 등)를 수행하며 법률 서적을 읽고 실무를 익혔다. 보통 3년에서 7년 정도의 수련 기간이 필요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류층 자제들은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정식 법학 교육 기관인 법학원(Inns of Court)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식민지 변호사들은 영국 유학 대신 현지 도제 과정을 선택했다.
수련을 마친 후에는 법원이나 지역 변호사 협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오늘날의 필기시험과 달리, 당시에는 판사 앞에서 구두 시험(Oral Examination)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학 내 법학 강의가 시작된 것은 1779년 윌리엄 앤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 미국 최초의 법학 교좌가 설치되면서 부터다. 1782년에는 최초의 독립 로스쿨인 리치필드 로스쿨(Litchfield Law School)이 세워졌으나, 이는 식민지 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변호사 직업은 초기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으나, 상업이 발달하고 정치가 복잡해지면서 점차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 실제로 미국 독립 선언서 서명자 56명 중 45%가 변호사 출신이었다.
제1시민 찰스는 종교탄압 때문에 변호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논리학 수업과 훈련을 받은 엘리트 였고 유수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법학자였다. 찰스는 학문적 바탕 위에 실용성을 강조했던 예수회에서 배출한 최고 인재의 하나였던 것이다.
찰스가 10대 초반 프랑스 유학시 다녔던 기숙학교가 바로 루이 르 그랑 콜레주 (Collège Louis-le-Grand 맨 위 사진)였다. 18세기 프랑스의 가톨릭 기숙학교(콜레주, Collège)는 당시 유럽 제국 엘리트 교육의 핵심 기관이었고 그중에서도 예수회가 파리에 세운 루이 르 그랑은 최고의 명문이었다. 구체제(Ancien Régime)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로 꼽힌다. 볼테르와 데카르트가 나온 곳이 바로 이 콜레쥬다.
예수회에서 세웠지만 수사 양성 보다는 일반인 가툴릭 엘리트를 키워 내는데 집중했던 학교다. 이 학교에서는 예수회(Jesuit) ‘학습 지침서(Ratio Studiorum)’에 따라 철저하게 조직된 인문학을 강의 했다. 특히 이곳의 논리학 강의는 유명했다. 당시 논리학은 문법(라틴어 헬라어), 수사학과 함께 ‘삼학'(Trivium) 의 하나로 여져지면서 학생들은 개념의 정의, 판단, 추론(삼단논법) 등 인문학적 소양의 기초로써 논리학을 배우면서 사고의 형식 전체에 대해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학생들은 논리학 수업에서 “신은 완전한 존재이며, 완전한 존재는 실재한다. 따라서 신은 실재한다.” 는 안셀무스의 명언으로 연역의 논리를 배웠고 “우주는 존재하고, 모든 존재에는 원인이 있다. 따라서 우주를 존재하게 한 ‘제1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가 곧 신이다.” 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언을 통해 귀납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후일 프랑스 문부성에서 발간한 자료에는 구체적인 수업 방법이 전범으로 소개돼 있다. 나중에 이 소설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카트라이 신부 등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예수회 인사들의 철학을 이해하는 준비로서 조금 더 알아 본다.
루이 르 그랑의 교육 과정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바탕으로 한 스콜라 철학 전통을 따랐다. 예수회 학자들이 집대성한 주석서인 ‘코임브라 과정(Cursus Conimbricensis)’이 표준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논리학과 수학의 관계까지 다루는 방대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단순히 이론을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일의 숙제와 암송, 정기적인 구두 및 서면 작문, 그리고 학생들 간의 치열한 논리적 변론(Disputations)을 통해 논증 능력을 실질적으로 연마했다.
논리학은 상급 과정인 형이상학이나 신학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도구(Organon)로 기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뿌리를 두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학적 원리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철학 교과 전체에서 통합해 가르쳤고 역사나 문학 텍스트 속에서도 논리적 주장을 찾아내는 사례 연구(Case Study)를 병행하여 실용성을 높였다.
당시 루이 르 그랑 콜레주에서 교육받은 볼테르(Voltaire)는 이곳에서 익힌 날카로운 논리적 분석력과 수사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이후 계몽주의 사상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논쟁을 벌이며 논리적 엄밀함을 익혔다. 학생들은 교사와 함께 텍스트에 숨겨진 삼단논법의 구조를 찾아내고, 각 문장이 논리적 전제인지 결론인지 분석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역할 분담의 토론이 중시 됐다. 논제를 옹호하는 응답자(Respondens)와 논제의 허점을 공격하는 반대자(Opponens)로 나뉘어 대결했다. 반대자가 공격을 하면 응답자는 상대의 전제(Premise)를 ‘인정(Concedo)’, ‘부정(Nego)’, 또는 용어의 의미를 ‘구분(Distinguo)’하는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로만 답변해야 했다.
상대의 논리가 부분적으로만 맞을 경우, “그 전제는 A라는 의미에서는 맞지만 B라는 의미에서는 틀리다”라고 논리적으로 쪼개어 반박하는 훈련을 통해 사고의 정밀함을 길렀다. 지식을 완전히 내면화하기 위해 체계적인 반복 학습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논리적 주장을 담은 글을 먼저 작성한 뒤, 이를 동료들 앞에서 구두로 발표하고 비판을 견뎌내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수사학(말하기)과 논리학(생각하기)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볼테르나 데카르트 같은 인물들이 훗날 권위적인 사상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된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었던 것이다.
이런 훈련과 학습 위에 찰스 캐럴은 예수회의 실용성과 현실 적응성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예수회의 실용적 현지 적응성은 동방에서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마태오 리치, 루이 그라몽 등의 예에서 우리도 살펴 보았듯이 유명하고 유익했하다.
몇차례 언급 했듯이 예수회는 학문과 사도적 열성으로 명성이 높은 수도회다. 1539년 이냐시오 로욜라에 의해 창립되어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은 이래 가장 많은 사제를 배출한 가톨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회로 오늘날에도 그렇다. 당시 에는 유럽 제 왕실이 후원 또는 묵인했던 노예무역을 격렬히 반대 했고 오늘날에도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예수회는 이런 성향 때문에 한때 유럽 각국의 국왕 제후들이며 라이벌 수도회의 압력으로 해산을 당하기도 했던 정치적 부침을 겪어야 했다. 찰스 캐럴이 루이 르 그랑에 다니던 1750년대 에는 프랑스 왕실과의 불화가 첨예했던 때였다.
결과론적으로 세상 모든 일을 긍적적으로 보면 다 그렇겠지만 찰스 캐럴이 예수회의 교육을 받고 예수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펴 나갔다는 것은 미국 가톨릭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회의 학구적이며 사도적 열정, 그리고 규율이야 말로 그 시절 독립투쟁 공간에서 미국 천주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주요 수도회(4대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예수회의 영성과 개성을 풍자한 유머는 매우 유명하다. 특히 ‘전등이 나갔을 때의 대처법’ 시리즈가 그렇다. 아직 못들어 본 독자들을 위해 쉬어가는 의미에서 압축해 전해 드린다.
기도실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갑자기 정전이 되었을 때의 상황이다. 베네딕토회 (전통과 기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시편과 기도문을 암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를 이어간다. 프란치스코회 (청빈과 순수) 어둠 그 자체를 하느님이 주신 소박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손을 모으고 ‘빛의 자매인 어둠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가난하고 단순한 삶에 감사해 한다. 도미니코회 (학구와 논리) 이 상황을 지적으로 분석한다. 빛과 어둠의 형이상학적 관계에 대해 토론하거나, 빛의 부재에 관한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예수회 (실용과 행동) 가장 현실적이다. 조용히 나가서 두꺼비집을 고치거나 새 전구를 사와서 불을 켠다. 때로는 “누가 전구를 갈아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 정의적 관점을 논하기도 한다.
이왕 나온 김에 하나 더,
“신부님, 메르세데스(벤츠)를 사게 해달라고 9일 기도를 해도 될까요?” 수도회 별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풍자한 유머다. 프란치스코회 신부: (의아해 하며) “형제님, 그런데 ‘메르세데스’가 무엇인가요?” (청빈하여 명품 차를 모름) 예수회 신부: (눈을 가늘게 뜨며) “형제님, 그런데 ‘9일 기도(노베나)’가 무엇인가요?” (학구적이고 실용적이라 민간 신심에 어두움) 교구 신부: (미소 지으며) “아, 저도 그렇게 기도해서 이 차를 샀답니다!”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핵심 이었던 예수회 기숙학교 콜레주들은 그 무렵 프랑스를 풍미했던 갈리카니즘의 극성으로 인해 1764년 공식적으로 페교되는 격변을 겪는다. 개미귀신이 했던 ‘프랑스왕도 처벌한 미개한 신앙’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갈리카니즘(Gallicanism)은 우리말로 갈리아주의라고 번역 되는데 프랑스 민족주의, 국수주의로 이해 하면 된다. 갈리아는 아다시피 프랑스 지역과 프랑스 민족의 옛 이름. 종교적으로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행정적,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내 세속적 문제에 있어서는 국왕의 권한이 교황보다 우선한다고 보면서 교황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고, 프랑스 교회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자국 공의회의 결정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회와 강력한 길항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예수회가 갈리카니즘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직접적인 순명 서약을 특징으로 하는 수도회로 프랑스 왕권보다 교황의 권위를 우선시하는 ‘울트라 몬타니즘(Ultramontanism, 교황 지상주의)’의 대표 세력으로 간주됐다.
프랑스 국왕과 법관들은 예수회를 ‘로마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국의 도구’로 보았고 이들이 교육과 고해성사를 통해 프랑스 정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국가 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갈등은 176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예수회의 규범이 프랑스 법과 충돌한다고 판결했다. 1762년 법원의 이 판결을 시작으로 1764년 루이 15세의 칙령으로 프랑스 내 예수회 활동이 금지되었고, 루이 르 그랑 등 모든 예수회 학교는 폐쇄되거나 국가 관할로 넘어갔다.
이때 찰스 캐럴은 영국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탄압과 혼란의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국가 권력과 종교의 갈등에 대해 남다른 각성과 소회를 갖게 했던 것은 틀림없다.
루이 르 그랑은 프랑스 혁명 뒤 복교되어 줄곳 세계 최고의 고등학교로 위치 했다. 근자에는 일반고교 과정과 대학 위의 대학이라 불리는 그랑제콜 진학을 위한 프레파 과정으로 나뉘어 있는데 일반 과정은 물론 프레파 역시 프랑스 내 프레파들 중 최고로 꼽힌다.
르 그랑을 유명하게 하는건 이 학교 출신의 수재들이 많기 때문. 볼테르, 데카르트 이후에도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 실존 철학으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 등이 이곳 출신이다. 여러 분야에 걸친 인재를 길러낸 이 학교는 근세에 들어 특히 수학으로 유명하다. 죽기 전날 밤 남긴 유서에 5차방정식의 이론을 풀이해두었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도 이 학교 동문. 5차방정식은 그가 유서를 남기기 전까지 무려 3백년이나 증명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 볼테르, 찰스 캐럴, 사르트르가 공부했던 리세 르 그랑의 중앙 석조관 건물)
아무튼 개미지옥과의 지상 논쟁에서 보기좋게 승리한 일등 시민은 일약 독립지사의 반열에 올랐고 1774년 결성돼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던 메릴랜드 혁명 의회(Provincial Convention)가 찰스 종교적 제약을 무시하고 그를 위원으로 위촉 했다는 사실은 전한 바 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메릴랜드의 여론은 여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지지하는 애국파(Patriots),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충성파(Loyalists), 그리고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중립파(Neutral)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 식민지내 기독교 교단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미국 독립전쟁(1775~1783) 당시 미국 내 기독교 교단들은 신학적 신념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주로 영국 국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종교적 자유를 중시했던 교단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장로교회 (Presbyterians)는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교단 중 하나로,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독립전쟁을 “장로교인의 반란”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대륙회의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존 위더스푼 목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회중교회 (Congregationalists)또한 적극적인 독립파였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류 교단이었던 회중교회는 각급 교회의 목사들이 연일 설교를 통해 종교의 변혁과 독립의 정당성을 전파하며 혁명 정신을 고취했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가 정치적 독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침례교회 (Baptists)는 당시 소수 교파로서 국교 제도에 의한 박해를 받아온 종파 답게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쟁취하기 위해 독립을 적극 지지했고 이 과정에서 일반 민중들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었다.
가톨릭 (Catholics)은 당시 소수파 였고 국교회의 탄압에 가장 전면에 있었기에 신자들 대부분이 국교회의 지배를 벗어날 기회로 보고 독립을 지지했다.
반면 독립에 반대하거나 이 때문에 교단이 분열된 종파도 여럿 있었다. 국왕에 대한 충성파 이거나 중립을 표방 했던 종파 들이다.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나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독립에 반대하거나 신중한 태도를 보인 교단들이다.
영국 국교회 (성공회, Anglicans)는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했기 때문에 대다수 성직자와 지도자들이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독립에 반대했다. 일부는 교단을 이탈해 독립전선에 가담 하기도 했지만 소수 였다. 독립전쟁에 즈음해 성공회는 국교 지위를 잃었으며, 이후 영국의 영향력이 극히 제한된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감리교 (Methodists)가 입장이 묘했다.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기에 초기에는 독립 투쟁에 그리 적극 나서지 않았다. 많은 영국인 설교자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남은 이들은 이후 미국 감리교를 독자적으로 형성했다. 일부는 독립운동에 참여 했지만 침례교 만큼의 일치된 적극성을 보이지 못했기에 이후 수위 개신교단 자리를 침례교에 내주게 되었다.
퀘이커 (Quakers)교도들은 철저한 평화주의 원칙에 따라 전쟁 참여 자체를 거부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측 모두로부터 의심을 사기도 했다.
후일의 일이지만 독립전쟁의 승리는 미국 종교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교 제도의 폐지로 특정 교단을 국가가 후원하는 제도가 사라지고 정교분리 원칙이 확립되었다. 장로교를 위시해 침례교, 감리교도 영국이나 유럽 본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미국적 정체성을 가진 독자적인 교단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무렵 식민지 미국의 종교 지형을 살펴 본다고 했을 때 미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있었다. 바로 1차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1730~1740년대) 이다.
1차 대각성운동은 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 중반에 식민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개신교 신앙 운동이다.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와 장로회 교회들의 메마른 합리주의와 중부 식민주들에 분포해 있던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에 집착한 형식주의, 그리고 남부 제 교회들의 메너리즘에 빠진 목회와 사교 중심의 교회 활동에 대한 반성과 각성으로 일어난 강력한 부흥운동 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뜨끈 뜨끈한 영적 감흥과 회개와 각성이 필요 하다는 외침으로 시작된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식민 전역에서 의미있는 돌풍을 일으켰다. 집회 마다 무언가 신비한 영적 현상이 일어 났던 것은 사실인듯 싶다.
대각성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로는 감리교 운동을 이끈 조지 휫필드목사와 회중교회의 조너선 에드워즈 목사였다. 이들은 여러 식민주를 돌아다니며 교파를 초월해 많은 군중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설교했다. 대규모 군중들을 수용할 만한 교회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들판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며칠씩 계속해, 근본으로 돌아가 성령불을 맞이 하는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 하자는 웅변 설교로 전역에 영적 신앙의 활기를 들불처럼 불어 넣었다. 식민 전역에 퍼진 이 뜨끈뜬한 열기는 거족적 독립 투쟁의 한 기반이 되었다. 언덕 위의 도시가 종교도 다른 영국 왕의 압제에 시달릴 수는 없는 노릇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신앙체험을 비판 폄하하고 , 지나친 감정과 위험한 종교적 망상을 자극하며, 허락 없이 기존의 교구에 함부로 들어와 설교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하는 목회자, 교회 지도자들도 있었다. 주로 점잖은 장로교 목회자 들과 학자들이 그랬다.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찰스 캐럴(아나폴리스 캐럴)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은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자체 신앙 고수와 정치적 생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언급한 대로 대각성운동은 개인의 감정적 회심과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개신교 복음주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 찰스 캐럴과 같은 천주교인들은 예수회(Jesuit)의 지성적 교육과 가톨릭의 전통적인 계층 질서, 성사(Sacrament) 중심의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대각성운동의 감정적이고 무질서한 부흥 집회 방식을 비이성적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찰스 캐럴등 천주교 지도자들은 대각성운동 그 자체보다는 이 운동이 가져온 ‘종교적 다원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개신교 내 여러 종파(분파)가 갈라져 확장 하면서 어느 한 교파가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오히려 천주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줄 기회라고 믿었다. (아나폴리스와 캐럴턴이 주고 받은 서신)
캐럴은 대각성운동의 열기에 휩쓸리는 대신, 천주교 신자도 미국 사회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후일 독립 전쟁에 적극 참여해 천주교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헌법적으로 정교 분리와 평등한 법적 보호를 쟁취하는 데 주력했다. 천주교인들은 이 운동으로 인해 촉발된 사회적 변화와 종교적 관용의 분위기를 천주교의 시민권 확보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노예제도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당시 부터 미국 각 기독교 교단의 뜨거운 감자였다.
남부에서는 노예제도와 노예주 존립의 성서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교파(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일부 등)가 있었고, 북부와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폐지론)을 이끌던 교파(퀘이커, 장로교, 감리교 등)가 존재하여, 교단의 분열의 주요 원인이자 통합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남부 교회들은 구약성경의 ‘야벳의 후손은 함의 후손을 종으로 삼을지니라’는 창세기 구절 등을 인용하며, 노예제는 신이 부여한 질서라고 주장했다. 남부의 침례교(Southern Baptist Convention ),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약칭 PCUS ), 감리교(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등이 노예 소유를 허용하거나 묵인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를 위한 교회 설립을 금지하기도 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측은 주로 북부 및 부흥운동에 나섰던 교단과 그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 사랑, 해방의 복음 메시지를 강조하며 노예제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퀘이커 (Quakers)교도들은 노예제 폐지를 최초로 주도하고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감리교의 경우 북부 감리교는 노예제 폐지 운동의 핵심 세력이 되었지만 남부는 그렇지 않아 교단이 남북으로 분열 돼야 했다. 장로교도 마찬가지로 남과 북으로 분열 됐다. 회중교회 (Congregationalist)는 북구에 중심을 둔 교파 답게 노예제를 비판했고 폐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처럼 식민시대 말기 미국 기독교계는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인해 노예제를 옹호하는 세력과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는 결국 남북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교단 자체의 분열로 이어졌다.
워낙 교세가 미미했던 가톨릭은 노예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거나 운동에 참여 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인정론에 입각해 온정주의적 하인제도 정도를 옹호 했다.
찰스 캐럴만 하더라도 노예제에 대한 개인적 고뇌와 자선의 모습을 보였다. 식민지 최대의 부호로서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기나 서신 등을 통해 노예제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큰 심리적 불편함과 부도덕함을 느꼈음을 드러냈다. 말년에는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의 회장을 맡아 노예 해방을 위한 사회적 논의에 참여하면서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는 등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선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다시 찰스 캐럴과 독립전쟁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온다.
1774년 메릴랜드의 혁명 활동은 영국 의회의 강압적인 정책에 맞서 식민지의 자치권을 지키기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주로 메릴랜드 연락위원회(Committee of Correspondence)와 메릴랜드 임시 의회( Convention)를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었다.
메릴랜드 연락위원회는 다른 식민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 대응을 조율하기 위해 설립된 그림자 정부 형태의 조직이었다. 각지에서 연락위원회를 만들고 이내 대륙회의를 결성한 ‘건국 아버지’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예수회 천주교인 찰스 캐럴과 종교에 관해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