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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9)

– 가제트의 퍼스트 시티즌 논쟁–

 안동일 작

1773년 초봄 부터 여름까지 메릴랜드의 아나폴리스와 볼티모어의 시민들은 주간으로 발행되는 ‘메릴랜드 가제트’를 맹렬하게 기다렸다. 식민지  최초의 신문중에 하나인 메릴랜드 가제트는 당시 로서는 드물게 여자 사장이 발행하고 있었다.

섬세하면서도  불편부당한 편집으로 호평을 받고 있어 사람들은 페니 한잎으로  까치 소식을 들었다.  가제트 라는 말은 당시 부터 신문, 보도문 등을 뜻하는 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어원은 이탈리아의 동전 한닢 그리고 날 짐승 까치에서 나온 말.
그때  그곳 시민들이 가제트를 기다린 것은 그 신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두 인사의 설전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돼 있는 공무 수수료를 놓고 벌어진 설전 이었다.

그해  1월부터 7월까지 ‘첫째 시민'(First Citizen)과 ‘안틸론’ (Antilon)이라는 필명(가명)을 쓰는 논객 두 사람이 이 신문을 통해 총독의 수수료 부과 권한에 대해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고 시민 독자들은  편을 나누어 이를 응원하며 주시 했던 것이다.
안틸론이 먼저 가상의 대화 형식을 빌려 총독을 옹호하는 글을 게재하자, 첫째 시민이 이에 반박하는 답변을 보내며 논쟁이 점화됐다. 이 신문은 양측의 주장을 가감없이 모두 실음으로써 시민들이 정치적 사안을 판단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첫째 시민은 ” 영국의 헌법 정신에 따르면, 세금은 오직 국민이 선출한 대표(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부과할 수 있는데 의회를 건너뛰고 독단적으로 수수료를 정하는 것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첫째 시민은 총독의 포고령을 단순한 행정 명령이 아니라 권력 남용으로 규정하며 총독이 의회의 승인 없이 마음대로 금액을 결정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이는 곧 입법부를 무력화하고  전제 정치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첫째 시민은 고위 관료들이 과도한 수수료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는 구조를 비판했다. 관료들이 자신들의 수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며, 이는 공정하지 못한 특권층의 탐욕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연히 논쟁은 첫째 시민이 우세했다. 그러자 불리해진 개미귀신(안틸론은 앤트와 라이온의 합성어)은 관례를 깨고 첫째시민의 신상을 들고 나와 그의 종교(가톨릭)를 문제 삼으며 “투표권도 없는 자가 정치를 논하느냐, 변호사도 아니면서..”라고 공격하자,  첫째 시민은  이에  여유있게 논리적으로 맞섰다.
그는 종교와 상관없이 이 땅의 시민으로서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으며, 보편적인 자유와 권리는 특정 종교나 계급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개미 귀신이 자신은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어 법을 더 잘 안다고 한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변호사가 될 수 없었던 당시 제도의 부당성을 역설해 갈채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첫째 시민의 법지식이 웃길이라고 했다.

장장 7개월의 지상 논쟁을 벌인  ‘제1시민'(First Citizen) 논객 활동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메릴랜드  식민지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가톨릭 인사에서 독립 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메릴랜드 인구의 약 15%만이 가톨릭 신자였고 이들은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는 글, 유려한 문장으로  메릴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갈채 받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논쟁을 통해 그의 애국심과 정치 철학이 널리 알려졌고, 신분이나 종교를 넘어 메릴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끌 적임자로 인정받았다.  논쟁 전까지 그는  법적으로 투표권도 없는 ‘이류 시민’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1시민’ 논쟁 이후, 그는 사실상 메릴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이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774년, 그는 볼티모어 대표로 메릴랜드의 혁명 위원회에 위원에 선출되며 공식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그가 법적으로 공직에 나설 수 없는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신임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는 그의 논객 활동이 직접적으로 이끈 영광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활약은 독립 후 메릴랜드 주 헌법 제정 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철폐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시민’ 논쟁은그에게 에게 개인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제약을 뛰어넘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중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길을 열어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실록 소설이라 하더라도 너무 역시적 사실만 나열하고 있어 흥미가 반감된다는 독자들의 볼멘 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어 이번호 부터는 주인공 한명을 등장 시켜 그의 시선으로 당시의 상황과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 보려 한다.
오늘 우리가 만난 주인공은 찰스 캐럴(Charles Carroll , 아래 사진)  이다.  앞서  소개 한 ‘첫째 시민’ 이 바로 그다.  그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찰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조부는 정착자(Settler) 찰스, 부친은 지명을 따 아나폴리스(Annapolise) 찰스, 그리고 그는 영지의 이름인 캐롤턴(Carrollton)의 찰스로 불린다.

찰스 캐럴을 공부 하면서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 들인 권 철신, 일신 형제와 조동섬을 떠올려야 했다. 1737년에 태어난 찰스 캐럴은 권철신과 동년배다. 권 철신은 36년, 일신은 42년 생이다. 동섬은 38년 생. 양의 동서는 달랐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정도는 달랐지만 동 시대를 양쪽에서 천주교의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산 인물들이다. 일신은 1791년 순교했고 철신은 1891년 순교 했지만 찰스와 동섬은 많은 족적을 남가고 그 시절로는 천수를 누려 구순을 넘기고 같은 해인 1832년에 세상을 떠났다.

미국 건국 아버지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캐럴턴의 찰스 캐럴은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56인 가운데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자, 서명자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에 헌신해 독립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자신의 신앙인 천주교를 살렸다.  천주교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는 그 모든 것이 천주교 부흥을 위해  헌신한 그 개인의 심모원려 였고 그윽한 천주의 뜻 이라고 이해 한다.   그가 없었다면 미국의 천주교의 오늘은 없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찰스 캐럴은 1737년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독실한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메릴랜드 뿐 아니라 식민지 전체 에서도  당대 최고의 부유한 가문이었다.
가문의 미국 시조격인 ‘정착자’ 찰스 캐롤(Charles Carroll the Settler)은 1670년대 메릴랜드의 소유주였던 볼티모어 경(Lord Baltimore)으로부터 검찰총장 임명을 받고 아일랜드로 부터 메릴랜드에 정착했다. 그는 검찰 총장 이외에도 토지 등기소장,  관세청장 등 고위 관직을 거치며 권력과 부를 쌓았다.
정착자 찰스는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한 후  그녀가 남긴 영국 쪽 유산을 모두 수입업과 아나폴리스의 도, 소매업에 투자했다. 거기에 더해 1693년, 그는 볼티모어 경의 대리인이었던 헨리 다널(Henry Darnall) 대리 총독의 딸과 재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그는 방대한 토지를 지참금으로 받아 캐럴 제국의 기초를 더 크게 닦았다.

캐롤 가문은 아나폴리스 시내의 부지는 물론, 하워드 카운티에 7,000에이커(약 850만 평) 규모의 도어레건 매너(Doughoregan Manor)를 포함해  총 5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 방대한 농장들은 수백 명의 노예 노동력을 통해 담배, 밀, 가축 등을 생산하며  큰수익을 창출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는 매우 편치않았다.  당시 메릴랜드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공직 참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캐롤 가문은 정치 대신 경제 활동에 집중하여 금융업 , 철강 산업(볼티모어 철공소), 조선업 등에 투자하며 부를 더욱 증대시켰다. 다행히 당시 재산권은 보호되었던 모양이다.

메릴랜드는 앞서 살펴 보았듯이 1630년대에 볼티모어 경(Lord Baltimore)이 영국 내 탄압을 피해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안식처로설립된 곳이었지만 계속되는 청교도인들의 유입으로 천주교는 곧 소수파가 돼야 했다.더욱이  영국 내전(1642~1651년)의 여파로 식민지 내 청교도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649년 모든 기독교 신파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메릴랜드 관용법(Maryland Toleration Act)이 통과되며 초기에는 평화로운 공존이 간신히 이루어 졌지만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메릴랜드에서도 개신교 세력이 무력으로 볼티모어 경의 통치권을 찬탈했다.  그후 1694년 관용법이 영구 폐지되었으며, 1702년에는 영국 국교회(Anglicanism)가 공식 주교회로 선포되었다. 1704년에는 “교황교의 확산 방지를 위한 법(Act to Prevent the Growth of Popery)”이 통과되어 가톨릭 학교 운영과 공개 미사가 금지되었다. 1718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투표권이 완전히 박탈되었으며, 변호사나 교사 등의 전문직 종사도 제한되었다.

탄압 기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은 캐롤 가문을 위시해  자신의 저택 내에 개인 예배실을 만들어 비밀리에 미사를 드려야 했다.  이러한 탄압은 천주교 가문이었던 캐롤 가문이 정치보다는 경제 활동과 토지 확보에 더욱 집중하여 훗날 막대한 부를 쌓게 된 역설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오늘의 주인공 캐럴턴 찰스의 아버지 ‘아나폴리스 찰스’ 역시 빼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정착자 찰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바탕으로 뛰어난 성실성과 수완으로 부를 더욱  확장시켰다.  담배 농장뿐만 아니라 철강업(Hockley Forge), 금융업, 조선업에 까지  투자해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에 대한 극심한 정치적 차별 속에서  경제력으로 가문의 위상을 지켰다. 정치적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경제적 실리와 종교적 신념 만큼은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아들이 미국 건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 그는  그나마 남은 가톨릭교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당국과 끊임없이 투쟁했고 여러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찰스의 조부인 개척자 찰스도 검찰 총장을 지낸 이였지만 종교 때문에  두번 투옥 됐었다.  집안의 신앙은 그토록 투철했던 것이다.

독립 전쟁 전후 시기, 천주교(가톨릭)는 개신교 중심의 식민지 사회에서 심각한 종교적·정치적 편견에 직면해 있었다. 가장 큰 편견은 천주교인이 미국의 국익보다 ‘외국의 군주’인 로마 교황에게 더 큰 충성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천주교인을 잠재적인 반역자나 ‘제5열(내부의 적)’로 간주했으며, 이러한 불신은 영국과 프랑스·스페인 등 가톨릭 강대국 사이의 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천주교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민주적이고 공화주의적인 가치와 충돌한다고 보았다. 천주교는 ‘전제적’이고 ‘뒤처진’ 종교로 묘사되었으며, 비판자들은 교황의 지시를 따르는 신자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행동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개신교 주류 사회는 천주교를 성경 중심이 아닌 미신적이고 무지한 종교로 폄하했다. 성사(Sacrament) 중심의 전통이나 성인 공경 등을 비이성적인 행위로 치부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타락한 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천주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기저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주류 사회의 극심한 박해와 법적 차별 속에서도 당시 미국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기저에는 가정 중심의 신앙 공동체, 예수회의 교육적 영향, 그리고 미국적 가치와 신앙의 결합이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천주교 미사가 금지되었던 시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신앙의 거점을 가가호호의 ‘가정’으로 옮겼다. 메릴랜드의 케럴가와  같은 지역의 천주교 귀족들은 자신의 대저택 안에 비밀리에 개인 예배실을 만들고 순회 신부들을 모셨다.
또 무엇 보다 어머니들의 역할이 컸다. 공적인 종교 교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정 내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치며 신앙의 대를 이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의례를 넘어 가족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게 했다.

당시 미국 천주교를 이끌었던 핵심 세력은 예수회 신부들이었다. 예수회는 천주교가 ‘미신적’이라는 개신교의 공격에 맞서 논리적이고 지적인 신앙 방어(Apologetics)를 제공했다. 이는 찰스 캐럴과 같은 인물들이 개신교 엘리트들과 토론하며 지적으로 밀리지 않는 토대가 되었다.
에수회 신부들은 목숨을 걸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흩어진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이러한 사제들의 헌신은 신자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신앙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그러면서 무억보다 중요한 것은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미국의 독립 정신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가톨릭 교리가 가르치는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가 미국 혁명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오히려 박해받기 때문에 더 당당해진다”는 심리도 작용했다.

아니폴리스 찰스는 아들이 메릴랜드 내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아들을 11세 때 프랑스로 유학 보내 16년 동안 유럽 최고의 지식을 습득하게 했다. 이는 훗날 아들이 건국의 아버지가 되는 지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아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를 통해 신앙심과 도덕적 가치관, 정치적 식견, 그리고 재산 관리법 까지 상세히 가르쳤다. 아들이 귀국했을 때 ‘캐럴턴 매너(Carrollton Manor)’라는 거대한 영지를 물려주었는데, 이것이 아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of Carrollton’을 붙이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아들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미국의 기틀을 잡는 과정을 자랑스레  지켜보았으나, 공식적인 독립 전쟁의 종결(1783년)을 불과 1년 앞둔 17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1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조기 유학을 떠난   찰스 캐럴이  공부한 학교들이  예수회  신학교에서 세운 기숙 중 고등학교 였다는 것은 의미 하는 바가 크다. 수차례 언급 했듯이 권일신 이승훈의 천주교 신앙은 로욜라와 하비에르의 예수회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중등교육을 예수회 교육기관서 마친 찰스는  파리와 영국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 했다.  영국 런던에서는  명문 법학 대학원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서  민법 및 영미법(Common Law)을 수학해 국제적인 식견과 법률적 지식을 쌓았다.

1765년,  28살에 메릴랜드로 돌아온 그는  부친으로부터 광활한 토지인 ‘캐럴턴 매너(Carrollton Manor)’를 물려받았으며, 이때부터 자신을 다른 캐럴들과 구분하기 위해 ‘캐럴턴의 찰스 캐럴’이라 불렀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할 당시 이 별칭이 공식화 된 일화는 유명하다.  동료 의원들이 “성(Surname)이 ‘캐럴’인 사람, 이름이 찰스인 사람이 워낙 많아 영국군이 너를 못 찾을 수도 있겠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 하면서  거주지인 ‘캐럴턴(of Carrollton)’을 덧붙여 서명했다.  영국이 반역자를 교수형에 처할 때 자신을 확실히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는 당당한 태도의 발로였다.

찰스 캐럴이 유능한 법학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정식 변호사(Lawyer/Attorney)로 활동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메릴랜드 식민지의 가톨릭 차별 법령인 ‘형벌법(Penal Laws)’ 때문이었다. 그가   메릴랜드로 돌아온 1765년에도 가톨릭 신자에게 변호사 자격을 주지 않는 법은 여전히 유효했다.

변호사 자격을 얻으려면 영국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가톨릭의 핵심 교리(화체설 등)를 부정하는 내용의 ‘심사령(Test Act)’ 선서를 해야 했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캐럴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야 하는 이 선서를 단연코 거부했다.

이와 관련해 그와 함께 유학했던 그의 사촌 찰스 캐롤 (역시 이름이 찰스다. 그래서 그의 이름 뒤에는 변호사 라는 말인 베리스터(Barrister)를 뒤에 붙인다)은 그 무렵 성공회로 개종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캐랠턴을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 한다.  사가들은 이때 집안 내의 협의와 안배가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베리스터 캐럴은  건국을 보지 못하고 1783년 세상을 떠났다.

1773년 ‘첫 번째 시민’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할 때,  개미귀신과 논쟁 할때도 상대측인 개마귀신 대니얼 덜레이니는 캐럴이  변호사 자격이 없는 가톨릭 신자임을 비난하며 공격했지만, 대중은 그의 논리적인 법학 지식에 더 열광했다. 덜레이니는 총독이 임명하는 메릴렌드 상원의원 이었고 변호사였다. 캐럴은   자격증은 없었지만, 그의 법학  지식 수준은 당대 최고 수준의 법률가들과 대등했고 이는  독립운동에서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찰스 캐럴(Carrollton)이 1765년 유럽 유학을 마치고 메릴랜드로 돌아온 후, 1773년 ‘퍼스트 시티즌(First Citizen)’ 논쟁으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주로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고 가정을 꾸리는 한편 신앙을 공고히 했던 개인적인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캐럴가의 중심 성곽이라 할 수 있는  도허레건 매너(Doughoregan Manor)에 거주하며 대농장주(Planter)로서 가업을 돌보면서 매너 안의 상당을 가꿨다.    1768년 6월 5일, 평생 반려자 였으며 혁명의 열혈 지원자였던  메리 ‘몰리’ 다널(Mary Darnall)과 결혼했다. 그녀는 찰스의 할머니쪽  오촌 조카 였다.  73년 논쟁 전까지 엘리자베스(1769), 메리(1770), 루이자 레이첼(1772) 등 세 딸을 두었다.   전 생애 동안 총 7명의 자녀를 얻었으나 3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 애석하게도 메리 다넬 캐럴은 1782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독립선언서 서명을 앞두고 집안에 닥쳐올 보복  때문에 망설이던 찰스의 등을 떠밀었던 당찬 메리를 그리워 하며 찰스는 아흔 넘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재혼 하지 않고 수절했다. 당시로는 너무 드문 일이다.
아무튼 그 시기  비록 공직에는 나갈 수 없었지만, 영국 의회와 총독의  정책 (인지세법 등)에 대한 불만을 사적인 편지를 통해 꾸준히 표출했고  아나폴리스의 여러 지적·사교 클럽에 참여하며, 훗날 혁명 동지가 되는 인물들과 교류하며 식민지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견해를 넓혔다.

이처럼 1765~1772년 사이의 캐럴은 식민지 최고의 부호 중 한 명으로서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으나, 1773년 메릴랜드 총독의 수수료 부과 문제에 반대하며 메릴랜드 가제트에 익명으로 글을 기고하면서 대중적인 애국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낭중지추 였던 것이다.

후일 ‘가제트의 퍼스트 시티즌 논쟁’ 이라 명명된 이 논쟁은  메릴랜드 혁명, 나아가 미국 독립혁명의 한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논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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