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 언덕 위의 도시 –
안동일 작
작가는 미국, 아메리카 합중국이 오늘날 같이 강성한 나라가 된 것에는 윌 리엄 팬, 로저 윌리엄스, 볼티모어 경 집안과 같은 선각자들의 종교 자유화 실험, 일정한 실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뿌리 내린 이 땅의 종교의 자유가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 였다고 생각 한다. 만약 미국이 영국 국교회나 청교도의 회중교회 만을 고집했다면 유럽에서의 다량 이민은 이루어 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종교의 교세며 그 영향력이 극도로 쇠락 했다지만 18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 까지만 만 하더라도 해서 유럽 각국의 일반 민중들에게 종교는 삶 그 자체이기도 했고 양심과 인정의 근원이자 보루였다. 미국이 자신들의 종교를 허락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저들은 신대륙으로 몰려 오지 않았다.
합중국은 그 명칭 처럼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명실 상부하게 허용한 첫 번째 국가다. 그 결과 현재의 상황을 보면 종교 백화점, 특히 기독교 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모든 기독교 종파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천주교만 빼놓고 거의 모든 개신교 종파의 헤드쿼터,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개신교의 주요 종파인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의 경우는 마치 종주국과 같은 위세를 지니고 있다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이렇듯 종교의 자유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한 단면이자 복합적인 모습 이기도 하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도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다.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다. 물론 언급한대로 과학과 인지의 발달로 종교의 그 영향력이며 위세가 눈에 뜨이게 쇠락 했기에 새로운 모습을 찾아야 하는 당위가 있기는 하지만 …
“ 나는 내 정치 인생 내내 빛나는 도시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그 도시를 언급할 때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제대로 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 그 도시는 바다보다, 바람보다 강한 바위 위에 세워진 높고 자랑스러운 도시였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조화와 평화 속에 가득 살고 있는 도시였죠. 상업과 창의성으로 활기 넘치는 자유 무역항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벽이 있어야 한다면, 그 벽에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은 이곳에 오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1989년 1월 11일 집무실에서 행한 고별연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연설은 네오 팍스 아메리카나의 한 상징이 된 명 연설로 꼽히면서 자주 회자 되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3,300 단어로 구성된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미국이 다시 세계의 지도국으로 자리하게 한 자신의 공로를 상기 시키면서 이는 하느님의 가호 였다는 종교적 신념을 토로해 미국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 연설은 그의 집무실에서 저녁 9시에 시작돼 10시가 다 돼서야 끝 났는데 생방송으로 전국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방영됐고 수천 만명의 미국인들은 끝까지 이를 시청했다.
레이건은 오랫동안 아껴 놓았던 몇 가지 생각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백악관 사저의 모습을 묘사하며 좋아하는 몇 개의 창문들이 있는데 그곳에 이른 아침마다 서서 밖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곤 했다는 자신의 이야기로 관심을 끌고는 워싱턴 기념탑이며 제퍼슨 기념관으로 건국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꺼냈고 이어 미드웨이 해상에서 베트남 난민들이 미국의 함선을 만나면 “ 헬로우 프리덤 맨, 도와주세요 “ 했다는 얘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자신과 부인 낸시여사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곳 시민들이 친절하게 다가서려 했지만 KGB 요원들이 막아섰다는 얘기는 영화의 한장면을 보듯이 생생했다. 역시 명배우는 명배우였다.
그러면서 미국은 세계로부터 다시 존경받게 됐고 세계는 미국의 지도력을 고대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모든 위대한 변화는 저녁 식탁에서 시작된다고 가정의 가치 ‘페밀리 벨류’를 역설 했다.
그는 마지막 피날레로 언덕 위의 도시 이야기를 꺼냈다. 연설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이 겨울날 밤, 그 도성은 어떻게 서 있습니까? 8년 전보다 더 풍요롭고 더 안전하며 더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성이 세워진 지 200년, 2세기가 지나고도, 그 성은 여전히 강하고 진실되게 그 화강암 산마루에 서있으며 그 빛은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은 여전히 등대로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흑암에서 달아나는 모든, 길을 잃은 순례자들을 고향으로 끌어드리는 자석입니다. “
“우리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그 도성의 거리로 들어가면서, 레이건 혁명의 모든 남녀에게, 지난 8년간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함께 일한 모든 남녀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냅니다. 친구들, 우리는 해냈습니다. 우리는 단지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는 이 도성을 더 강하게, 더 자유롭게, 믿을 만한 손에 맡겨졌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았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미국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언덕 위의 도시’ (A city upon a hill) 는 1630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청교도 지도자였던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 아르벨라(Arbella)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하던 중 동료 이주민들에게 한 설교 가운데 나온 말이다. 그는 이주민들이 건설할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언덕 위의 도시 이며 전 세계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만약 실패한다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마태복음 5장 14절, 예수의 산상수훈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는 구절 을 원용한 말 이었다.

이 언덕 위의 도시라는 표현은 잠시 잊혀졌다가 잠시 후 살펴 볼 미국의 대각성 운동 때 부흥 목사들에 의해 다시 발굴 회자 되었고 이후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미국이 종교의 영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를 상징하는 강력한 표현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로널드 레이건이 고별 연설에서 이를 다시 소환해 큰 울림을 던졌던 것이다. 이후 클린턴,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등 후임 대통령들도 이 개념과 수사를 즐겨 사용했다. 이 표현은 미국이 도덕적,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전 세계에 귀감이 되는 특별한 나라, 이상향이 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쪽 비평가들은 이 수사가 종종 미국의 실제 국내 정책(불평등, 사회적 불의)이나 외교 정책(일방적 행동, 전쟁)의 복잡성과 모순을 가린다고 지적하지만 자유 민주주의 현실 정치인인 미국 대통령에게 좌파 종속이론 신봉자가 되어 미국의 불의를 깨닫고 잘못을 고백하라고 닥달하는 것은 번짓수가 틀린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 종교 자유가 정착 한것은 퀘이커의 윌리엄 펜(William Penn), 침례교의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가톨릭의 볼티모어 가문(Lord Baltimore)이 식민지 시대, 종교 자유를 주창 하며 각각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메릴랜드를 건설하며 종교적 관용을 실험한 것에서 비롯 됐음은 지난번에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들 외에도 종교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에 크게 기여한 주요 인물이 있다. 바로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 이다.
미국 독립의 주역이자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종교 자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창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777년에 모든 종파의 기독교인, 유대인, 무신론자 등에게 종교 자유를 제공하기 위해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령(Virginia Statute for Religious Freedom)’ 을 작성해 통과 시켰다. 이 법령은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의 종교 조항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직을 제퍼슨 바로 뒤에 수행한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역시 목회자는 아니었으나, 정치권에서 제퍼슨의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령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785년 ‘종교 평가에 반대하는 기념관 및 진정서(A Memorial and Remonstrance Against Religious Assessments)’를 발표해, 특정 기독교 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주(州) 세금 법안에 반대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종교적 자유와 정부 권력과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강력히 옹호했으며, 양심의 자유는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식민지 시대 말기와 독립 직후 종교의 자유가 미국 건국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 정치인 들이다. 어찌보면 서말 구슬을 꿴 이가 바로 이들이 아닌가 싶다.
실제 제퍼슨에게는 언덕 위의 도시 개념이 다른이 들과 달랐을 것이다.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이성주의자 였다. 제퍼슨은 대통령 취임 선서 때 에도 성경에 손을 얹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에 성경 사용이 법적 의무는 아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성경 사용 전통이 시작됐지만 제퍼슨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후론 거의 쭉 지켜져 왔다.
제퍼슨은 예수에 대해서 도덕적 스승으로서 반복적으로 존경심을 표하면서 평생 동안 자신을 기독교인 이라고 일관되게 칭했지만 칼뱅주의, 삼위일체,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에 스며든 플라톤주의적 요소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독립 초기의 미국의 대통령, ‘미스터 프레지던트’들의 신앙에 대해서 알아본다. 서말 구슬 이었던 종교의 자유가 정치인들에 의해 입법화 돼 보배가 된 것에서 보여지듯 정치의 수장격인 대통령의 신앙관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참 그 시절 독립 초기에는 미스터가 매우 높은 경칭이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라는 명칭은 왕이 아닌 공화주의 지도자임을 강조하며 ‘전하(His Highness)’ 같은 칭호 대신 평등을 상징하는 경칭으로 의장, 대표를 뜻하는 ‘President’에 ‘Mr.’를 붙인 표현이다. 이는 국민을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최고 책임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는 성공회 사제와 청교도 목사를 ‘미스터(Mr.)’라고 호칭했다. 당시 ‘미스터’는 오늘날처럼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라, 대학 졸업자, 전문직 종사자, 혹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신사(gentleman) 계층에게만 부여되는 경칭이었던 것이다. 일반 평민 남성은 보통 ‘굿맨(Goodman)’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사제와 목사는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에 속했으며, 대부분 하버드나 영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미스터’라는 호칭은 그들의 학식과 지위를 인정하는 표시였다. 공식 문서에서는 종종 목사를 ‘더 레브런 미스터 ‘ (The Reverend Mister) ‘ 혹은 ‘더 미스터 레브런’으로 표기하여 일반 ‘미스터’와 구별하기도 했다. 교회 내에서나 사회적으로 목사의 역할과 지위는 명백했기 때문에, 호칭만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혼동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파더(Father)라는 호칭은 성공회 내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20세기 중반에야 앵글로 가톨릭 운동의 영향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독립 시대를 거쳐 건국 후 대통령 미스터 프레지던트에 오른 초기 건국의 주역들은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포함해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염원 했던 것이 미국을 여봐란 듯이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신앙은 경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 신자였다. 1779년, 워싱턴이 델라웨어 인디언 추장으로부터 아들의 교육에 관한 조언을 요청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워싱턴은 원주민 들에게 ‘우리의 예술과 생활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이는 당신들을 더 위대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에 이어 미국의 제2대 대통령에 오른 존 애덤스(John Adams)는 1797년 취임 연설에서 ‘기독에 대한 존경심은 공공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고의 권고 사항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장로교 신자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유니테리언'(Unitarianism, 단일신론)에 가까웠다고 평가되고 있다. 신의 섭리를 믿으면서도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고, 엄격한 도덕적 삶을 살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전통적인 교리에는 고개를 흔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앙숙이자 정적 이었던 제퍼슨과 이점에서는 비슷하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런 신앙이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는 대각성 운동의 한 계기가 된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어찌됏건 평생 동안 자신을 기독교인 이라고 일관되게 칭했다는 예기는 이미 했다. 그런 그가 청장년 시절 복음주의 개혁 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의외다.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쓴 지 1년 후인 1777년의 일이다. 그 교회는 칼뱅주의 개혁교회였고, 제퍼슨은 그 교회의 내규를 작성했으며 다른 어떤 신자들 보다 더 많은 돈을 기부했다. 그는 이 교회의 헌장에서 그들이 ‘복음의 지식의 유익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교회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종교 자유를 명문화 한 미국 헌법의 설계자였지만 자신은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그는 의회의 목사 임명 위원회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 1785년에 쓴 글 ‘기념과 반론’에서 그는 기독교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기원했다고 믿는 종교’라고 묘사했다’
그러면서 매디슨은 멋진 말을 했다. “우리를 설득한 증거에 아직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믿음을 구현하는 것” 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와 국가 기관 간의 분리를 주장했지만, 하나님과 정부를 분리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매디슨은 자신의 저작에서 도덕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해 ‘전능하고 현명하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의 도덕적 질서와 인간의 행복에 매우 중요하다’고 썼다.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른바 혁명 1세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6대 퀸시 애담스가 가면 존 애담스의 아들이기에 독립혁명 2새대가 된다. 먼로는 “유럽 국가들이 서반구 국가들에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제퍼슨과 애담스와는 달리 기독교 주요 교리를 믿는다고 공언했다. 그는 1817년 첫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능자께서 우릴 위해 이미 높이 나타내신 그 보호를 계속해서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는 성경의 원칙, 미국의 건국 원칙에 어긋나는 노예제도에 대해 반대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이 악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는 ‘노예제의 지옥 사냥개’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애덤스의 좌우명은 ‘의무는 우리에게 있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였다. 그런데 그는 부친과는 달리 성경을 매우 중시했다.
애덤스는 “미국 혁명의 최고의 영광은 시민 정부의 원칙과 기독교의 원칙을 하나의 불가분의 유대로 연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미국은 건국에 있어 성경이 수행했던 불가결한 역할을 다시 발견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애덤스는 대통령 취임 선서 시 성경 대신 법전을 사용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825년 취임 시 합중국 헌법을 담은 법전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이는 헌법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도 1853년 취임 시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고 ‘선서(swear)’ 대신 ‘확언(affirm)’을 선택했다. 이는 헌법에서 허용하는 선택지였다. 대통령 취임 선서와 성경의 예외적 일화는 그 뒤에도 몇차례 이어지지만 이제는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데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는 1901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서거 후 급히 취임 선서를 할 당시 성경이 준비되지 않아 아무런 책 없이 선서했다.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후 에어 포스 원 기내에서 취임 선서를 할 때, 기내에 있던 가톨릭 기도서(missal)에 손을 얹었다.
미 헌법은 공직자로서의 자격 요건이나 검증에 어떠한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백악관에 입성한 역대 대통령들은 공개적인 신앙의 사람들이었고, 기독교 주류교단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대통령들 중에서 1/4 정도는 영국 성공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 성공회의 교인들이었다. 국부로 칭송 받는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현대로 오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성공회 신자였다.
다음으로는 장로교인들이 많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뿌리를 둔 이 교파에는 앤드류 잭슨, 우드로우 윌슨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이 속하는데 이들은 스코틀랜드-아이리쉬계 후손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만 캐톨릭이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단일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단 두 명의 대통령만이 카톨릭교인 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존 F. 케네디와 최근의 조 바이든 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어떠한 종교적 전통이나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 링컨은 어렸을 때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고, 대통령으로서 공직을 수행할 때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의지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어떠한 특정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 링컨만이 아쉬운 신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링컨의 암살 후 백악관에 들어간 앤드류 존슨도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떠한 교단이나 회중에 속한 적이 없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아무런 신앙 배경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났다가 성인이 돼서야 크리스천이 됐다. 그는 시카고 UCC 교단의 교회(Trinity United Church of Christ)에 출석했다. 그러나 그는 2008년 대선 유세 중 동 교회 담임목회자의 성명서 문제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게 돼 현재는 정기적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는 않다.
트럼프는 비종파 기독교인(nondenominational Christian)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간략하게 알아 보기로 한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얼마전 44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종파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소개했는데 영국 성공회(Episcopalian)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제럴드 포드, 조지 H.W. 부시 등 모두 11명의 대통령이 신자였다. 또 장로교(Presbyterian) 신자가 우드로 윌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로널드 레이건 등 8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어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등 침례교(Baptist), 조지 W. 부시 등 감리교(Methodist),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등 유니테리언(유일신교) 신자가 각각 4명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천주교, 사도교회(Disciples of Christ), 네덜란드 개혁파교회(Dutch Reformed), 퀘이커교(Quaker) 신자가 각각 2명이었으며 조합교회(캘빈 쿨리지) 신자가 1명이었다. 생각보다 다양하다. 이점이 미국의 저력인지도 모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