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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6 )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언덕 위의 도시와  윌리엄 펜

안동일 작

윌리엄 펜 (William Penn)은 영국의 퀘이커 교도 지도자이자 저술가로, 북미 식민지 펜실베이니아주의 설립자로 종교적 관용과 민주적 원칙을 옹호하며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644년 영국 국교회를 믿는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나 옥스포드 재학중이던 22세때 조지 폭스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아 퀘이커 교파에 가입한 이래 파란만장한 생애를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1655년에 서인도 제도에 있는 자메이카를 점령한 해군 제독으로 왕으로 부터 작위를 받았고 큰 영토를 하사 받은  윌리엄 펜 경이다. 아들과 이름이 같은데 당시에는 주니어를 붙히는 관습이 나오기 전으로 작위로 구분했다.

그는 해군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며 부와 명성을 얻었고, ‘제독 윌리엄 경(Admiral Sir William Penn)’으로 불렸다.그의 부와 명성은 아들 윌리엄 펜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1654)의  주요 해전에 참여해 공을 쌓았고  올리버 크롬웰의 서인도 제도 원정군을 지휘해 1655년 자메이카를 점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왕정복고 후인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에서는 요크 공작(훗날 제임스 2세 국왕)의 부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여러  해전 승리에 기여했다.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국왕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해군 위원(Commissioner for the Navy)으로 임명되었고  1660년부터 1670년 사망할 때까지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윌리엄 펜 경은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궁정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를 바랐지만 아들이 퀘이커 교 (Quaker)로 개종하고  비순응주의(Nonconformity)를 고집하자  실망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 경은 아들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으며, 찰스 2세 국왕이 자신에게 진  채무를 아들에게 상환하도록 조치했다. 이 채무는  훗날 아메리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의 광대한 토지 소유권으로 대신 상환되었고, 이는 아들 윌리엄 펜이 식민지를 건설하는 기반이 되었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이름 자체도 국왕이 제독인 아버지 윌리엄 펜 경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이다.

퀘이커(Quaker)교는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라고 부르는 개신교 종파로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창시했다. 1652년  그가 제창한 종교 명상운동으로 시작됐다.  폭스는  1624년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부터 깊은 종교적 갈망을 느꼈다.

당시 성공회의 형식주의에 실망해 19세에 집을 떠나 4년 여간 방랑하며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수도를 했다.  1647년, 그는 명상 중에  목사나 교회 건물 등 외적인 도움 없이도 “그리스도가 자신의 백성을 직접 가르치러 오셨다”는 ‘내면의 빛(Inner Light)’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을 했다.  이 경험은 그의 평생 사역의 핵심이 되었고  1652년, 펜들 힐(Pendle Hill)에서 순회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명상 기도 중 신 앞에서 몸을 떨곤 했는데 이 모습 때문에 치안판사로부터 ‘퀘이커(Quaker, 떠는 사람)’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었으며, 이 이름이 고유명사처럼 굳어졌다.
그의 핵심 가르침은 평등과 내면의 빛이다. 모든 사람 안에 신의 직접적인 영감이 존재하며, 누구나 성직자 없이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기에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존대말(당시의 ‘thee’와 ‘thou’)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평화주의를 주창해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무기를 들거나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당시 영국 국교회와 정치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크롬웰 치하 때 잠깐 빛을 보기는 했지만 곧 탄압을 받으면서  폭스는 1649년에서 1673년 사이 여러 차례 체포돼 모두  8번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담은 『일기(Journal)』와 여러 소책자를 저술하며 운동을 이끌었다.   폭스는 영국, 아일랜드는 물론  북미 카리브해 제도 등 광범위한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으며, 1669년 부유한 후원자 마거릿 펠(Margaret Fell)과 결혼하여 퀘이커 공동체 조직을 체계화했다. 그의 사상은 윌리엄 펜과 같은 후대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정의, 평화주의, 남녀평등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한편  22살때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폭스를 만난 윌리엄 펜은 즉시  폭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가 됐다.  그를 만난 이래 펜은 그로 부터 받은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여러  저술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학교(옥스포드 디비니티)에서 퇴학 당해야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투옥돼야  했다.   1668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는 팜프릿으로 인해 런던 탑에 갇혔고, 1670년에는 ‘집회 금지법'(Conventicle Act) 위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다.  같은 해인 1670년에는 ‘불법 설교’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치렀는데, 이 재판은 배심원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

이런 탄압과 인고의  세월이 10여년 쯤 계속된 끝에 1681년, 펜은 영국 국왕 찰스 2세로부터 아메리카 대륙 델라웨어강 서쪽의 광대한 땅을 받게 된다. 10년전인 1670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윌리엄의 당부를 국왕이 그제서야  들어준 것이었다. 국왕으로서는 골치덩어리 퀘이커들을 멀리 떠나 보낸다는 심산도 있었다.
원래 윌리엄 펜은 이 땅의 이름을 단순히 “실베이니아”(Sylvania, 숲이 우거진 땅)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펜의 아버지에게 빚진 1만 6천 파운드의 부채를 갚는 대신 이 땅을 주면서, 위대한 제독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Penn’을 붙여 “펜실베이니아”라고 명명했다. 펜은 이 이름이 마치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딴 것처럼 보일까 봐 당황했지만, 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튼 기뻐한 펜은 박해받던 퀘이커 교도들을 이끌고 이주했다.  그들의 첫  정착지 이자 펜실베이니아의 첫 카운티의 하나인 벅스 카운티는 펜의 가족 영지이자 많은  정착자들을 배출한  버킹엄셔의 이름을 따서 벅스로 불리웠다.
펜과 그의 퀘이커교도 들은 모든  신념(유일신 사상) 을 가진 사람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던져, 처음부터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영국 왕실 성공회가  회중 교회보다 더 싫어하는 천주교, 로만 카톨릭에게도 문을 열었다.

윌리엄 펜은 그의 식민지 개척 비전 전체를 ‘신성한 실험(Holy Experiment)’이라고 지칭했다. 그의 펜실베이니아 설립 원칙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특정 연설보다는 헌법 문서, 서신, 소책자 등을 통해 알려졌다.
박해받던 퀘이커 교도들과 다른 종교적 소수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였다. 개인의 자유, 종교적 관용, 민주적 거버넌스(대의제 의회),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평화로운 관계 유지를 포함했다.
이 ‘실험’은 후일 미국의 독립 선언과 헌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필라델피아를 “형제애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거룩한 실험”에 근거를 둔 국가가 성립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영국 왕실을 의식해야 했기에 애둘러 표현 했지만 미구에 합중국과 같은 연합의 나라가  신대륙에 건설될 것을 예견했다는 얘기다. 윌리엄 펜은 이 “거룩한 실험”이 그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한 대로 그가 통치하는 식민지  펜실베이나아는  대의제 의회, 제한된 정부 권력, 배심원 재판 등을 포함한 펜의 진보적인 헌법(특히 1701년의 ‘특권 헌장’)은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자유와 자치권을 부여했다.

펜은 다양한 언어로 유럽 각국에 이 자유로운  식민지를 광고 해  잉글랜드인 뿐 아니라  웨일스인, 독일인과 네덜란드인 들이 몰려들게 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위치와 풍광이며  그곳에 이주 했을 때 제공할 특혜들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유럽  전역에 배포했던 것이다.  그는 여성들의 동등권 까지도 이  소책자에서 주창했다.

종교는 물론 인종과 나라의 구분 없이  이민자들에게 토지를 나눠 줬고  직업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기에, 펜실베이니아는 빠르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나라”로 알려지며 번성할 수 있었다.

펜은  펜실베이니아에서 각국 출신들이  평화롭게 연합해 지내면 본국들도 평화 롭게 된다는 지론을 폈다. 평화적인 나라들의 연합에 관한 펜의 아이디어는 먼 후일 유엔의 창립에 영감을 주었다고 얘기된다. 유엔은 윌리엄 펜의 생일인 10월 24일을 창설일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정부 체제를 통하여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고 , 공명 정대한 재판,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갖는 권력, 등으로  후일 미국 헌법의 근거를 형성할 권력 분립을 선보였다. 한마디로 그 시절에 완전한 민주주의 제도를 실시하려 했다.
펜실베이니아는 모든 기독교 계통 유일신 교도(monotheists)에게 완전한 예배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는 박해받던 퀘이커뿐만 아니라 독일 메노나이트, 아미시, 루터교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도 등 다양한 기독교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퀘이커 신념에 따라 펜실베이니아는 상비군이나 민병대가 없었으며, 무력에 의한 강압을 거부했다. 이는 다른 식민지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펜은 인디언들에게 무장하지 않은 채 접근했으며, 무력을 사용해 땅을 빼앗는 대신 레나페족(Lenape)을 포함한 원주민 부족들로부터 공정하게 토지를 구매하고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펜실베이니아는 초기 식민지 시대 동안  인디언 봉기나 유혈 극이  거의 없었다.
펜은 “정부 헌장”(Frame of Government, 1682)을 통해 식민지 주민들에게 입법 대표 선출권, 배심원 재판권, 부당한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 광범위한 기본권을 부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민주주의 실험이었다.

퀘이커는 ‘내면의 빛'(inner light)이라는 신념에 따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보았기에  이는 여성 교육 장려,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펜 개인은 노예를 소유했으나, 퀘이커 공동체는 점차 반노예 운동을 주도함), 온건한 형벌 제도 등에 영향을 미쳤다.

펜은 식민지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배심원 재판을 포함한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민주적 법 원칙은 훗날 미국 헌법의 영감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여러 차례 투옥되고 재판을 받았던 그의 경험이  타산지석이 되었다.
그의 이같은 민주적이고 관용적인 통치 방식과 법체제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로부터 “종교적 황금시대를 실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정착자들이 펜실베이니아로 떼지어 왔다. 빠른 성장과 변화에 불구하고, 펜은 그의 가족을 위하여 전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벅스군에 이어 필라델피아를 건설했다.  델라웨어강을 따라 계획된 도시 필라델피아는 빠르게 상업 및 지식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필라델피아 (Philadelphia)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형제 사랑의 도시”라는 뜻. Philia 는 ‘사랑’ 을 뜻하고  Adelphos 는 ‘형제’를 뜻한다.  펜의 신념인 평등과 관용의 이상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상징적인 선택이었다. 이처럼 펜은 모든 사람이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형제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적 도시를 구상했다.

그는  각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을 찾고 경험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라는 자연권이 있다고 보았다. 펜은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신앙은 강요될 수 없으며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펜은 종교적 관용이 더 강력한 정부와 부유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다양한 신앙을 가진 이민자들을 환영함으로써 사회적 조화를 이루고 번영을 촉진하고자 했다.

1684년 필라델피아 식민지의 건설이 어느정도 윤곽이 잡혀가면서 완성되자 펜은 종교적 정치적 아이디어들을 더 넓게 실행 하기 위해 내륙 안쪽을 탐험해 진출 했다. 그는 그 지역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 (주로 레나페족)과 친구를 맺고 그들의 대지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것을 확실히 했다.  다른 식민지 개척자들과 달리, 무장하지 않고 원주민들을 만나  조약을 맺고 정당한 토지 매입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접근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 이었다.

펜은 통역 없이 협상에서 소통하기 위해  인디언 방언들을 배웠다. 펜은 만약 유럽인이 인디언에게 잘못하면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리기 위해 양측 동등한 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명 정대한 재판이 열릴 것을 약속 하면서 그들에게 법률을 소개했다.
펜이 필라델피아 서쪽 켄싱턴에 있는 섀커맥슨의 한 느릅나무 아래서 인디언들과 이런 말을 전하며 조약을 맺는 모습은 이 시절 최고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꼽혀 지금도 미국 의회 의사당 벽에 멋진 부조로 기념되어 있다.
그는 공명 정대하게 숙고된 금액으로 인디언들의 땅에 파운드를 지불하는 그의 태도에 대해   볼테르는 “맹세로 비준되거나 침해되지 않은 사람들 (인디언과 유럽인들) 사이 단 하나의 조약으로 ‘거대한 조약’을 이끌어 냈다”고 칭송했다.

이런 평등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선도하는 윌리엄 펜의 지도 아래 펜실베이니아와 필라델피아 켄싱턴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  펜실베이니아의 경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비옥한 토양에서 생산된 밀, 옥수수 등의 농산물 수출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며, 이는 “북미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농업 외에도 풍부한 철광석, 목재 등을 활용한 제철, 제재, 조선업 등 상공업이 활발하게 발달했다. 필라델피아 항구는 빠르게 성장하는 무역 중심지였으며,  동력원인 수력을 이용한 제재소, 제분소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델라웨어 강을 기반으로 한 중요한 조선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필라델피아 항구는 카리브해, 유럽, 다른 식민지들과의 무역 허브 역할을 했다. 제철, 직물, 인쇄, 가죽 제품 등 소규모 제조업도 활발했다.

1693년 자신의 저서 ‘유럽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에서 펜은 전쟁을 방지하거나 끝내는 데 평등 원칙의 평화로운 협상과 상대를 존중하는 외교의 사용을 강조했다. 이는 말한대로  “펜의 생일 (10월 24일)을 유엔의 날로 삼아  축제로 벌이면서 이 원칙의 유산을 인정하는 유엔의 원형”으로 묘사되어 왔다.  1699년에  펜은 아메리카에서 잉글랜드 식민지들 전부의 동맹을 만드는 계획을 담은 팜피릿을 작성에 배포하기도 했다. 상당한 자치를 인정하는 동맹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윌리엄 펜에게 시련이 닥쳐 왔다.
시일이 경과 하면서 식민지 내부의 여러 파벌(퀘이커 대 비퀘이커, 의회 대 펜 가문 대리인) 간의 정치적 불화가  불거지기 시작 했던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을 제외한 기타 종파의 주민들이 말타면 견마 잡히고 싶어 한다고 더 많은 권리와 자치를 요구 하면서 사사건건 반대를 일 삼았고 영주 펜에 대한 임대료 소작료를 깎거나 없애려 들어 정부의 재정 상태가 악화 되었다.
또 퀘이커 신념인 평화주의는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과 같은 갈등 상황에서  본국 영국 왕실과 식민지 방위 문제로  충돌했고, 결국 퀘이커 교도들이 영국의 간섭아래 정치적 주도권을 잃는 원인이 되었다. 식민 의회에서 퀘이커는 소수가 돼야 했다.

더욱이 본국에서는  펜과 펜실바니아를 호혜적으로 보지 않않고 통치권을 회수 하려는 움직임 까지 보엿다. 거기에 펜 개인의 재정 문제도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펜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헤 1701년 런던행에 올랐다. 이 런던행이 마지막 길이 될 것 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펜의 일생의 다음 10여년간의 세월은 런던에서의 다양한 법정 문제들로 채워져야 했던 것이다.

펜이  런던으로 가야 했던 1701년  그의 식민지 통치권(proprietary charter)은  영국 왕실에 의해 박탈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국왕 윌리엄 3세와 의회는 펜실베이니아의 자치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퀘이커 평화주의 신념으로 인해 민병대가 조직 되지 않아 식민지 방위가 소홀하다는 점을 크게 문제 삼고 있었다.
펜에게 펜실베이니아는 종교적 자유라는 ‘신성한 실험(Holy Experiment)’의 장이자 그의 가족의 미래가 달린 재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권과 식민지 주민들이 누리고 있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직접 영국으로 돌아가 국왕과 의회를 설득하고 로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언급 했듯이 그 무렵 펜실베이니아에는 정착민들 간의 토지 분쟁, 임대료 문제, 그리고 퀘이커 교도와 비퀘이커 교도 간의 불화 등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영국 귀환 직전에 이러한 내부 갈등을 완화하고 자치정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펜은  ‘특권 헌장(Charter of Privileges)’에 서명했는데, 이는 식민지 의회에 큰 권한을 부여하는 조치였다. 이 또한 왕실의 눈에는 다른 식민지와 견주어 매우 큰 불만 이었다.

위에 언급된 정치적 위협 외에도, 영국에 있는 그의 재정 고문 필립 포드(Philip Ford)의 사기 행각으로 인한 심각한 개인적 재정난도 그를 영국으로 불러들인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어찌보면 이 일이 가장 화급하고 심각한 일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그는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에 투옥 까지 돼야 했다.

 

원흉은 필립 포드(Philip Ford)라는 윌리엄 펜의 영국내 재정 대리인이었다. 필립 포드는 런던과 브리스틀 지역 퀘이커 공동체 소속 유력신자 였기에 펜은 그를 믿고 영국과 아일랜드내의 재산 관리도 담당 하도록 했다.
그런 그가 펜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혹자는 펜을 제거 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포드는 복잡한 회계 조작을 통해 펜에게 막대한 빚을 떠넘겼고,  복잡한 허위 재정 거래를 통해 펜실베이니아 소유권에 대한 권리 까지도 주장했다.  자신의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실제 펜은 펜실베이니아를 ‘신성한 실험’ 으로 여기고 막대한 개인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정착민들이 임대료(quitrents) 지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식민지는 그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포드의 돈이 그 정도로 유입될 정황은 아니었다.

펜은 자신이 포드에게 빚을 지고 있고 이 빚을 못갚으면 식민지를 넘기겠다는 각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리한 법률 공방이 계속 됐고 하늘도 노했던지 그 사이 포드가 죽었다. 하지만 포드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펜에게 빚 상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정 다툼으로 인해 펜은 1708년 1월부터 8월까지 약 9개월 동안 채무자 감옥에 수감돼야 했다. 그를 진작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던 왕실과 성공회 귀족들이 저쪽 편을 들었던 이유도 크게 한몫 했다.

당시 채무자 감옥은  국가가 운영하는 형벌 기관이라기보다는 민간이 운영하는 영리 목적의 수용소에 가까웠으며, 수감자의 경제력에 따라 환경이 극명하게 달랐다. 그는 비교적 편안한 “마스터스 사이드(Master’s Side)”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다만 말년에  수치스러운 투옥 생활을 견뎌야 했다.

퀘이커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금하여 보석금을 마련해 준 덕분에 펜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그는 포드 가문과의 법정 싸움을 계속해야 했기에 식민지로 돌아올 수 없었다.  펜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를 영국 왕실에 다시 매각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1712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기억력과 언어 능력을 잃게 되면서 그 협상은 중단되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1718년 7월 30일 73세의 나이로 버크셔주 트위포드 근처 러스콤에 있는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버킹엄셔주 세인트가일스에 있는 퀘이커 집회소 묘지에 자신의 첫 부인 곁에 안장되었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는 그의 부재 속에 대리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의회와 총독 위원회 사이의 권력 다툼이 꽤 시끄러웠다.  펜은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거리가 멀고 현지 상황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워 식민지 내 정쟁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정착민은 펜의 부재를 틈타 자치권을 더 확대하려 했다. 이들은  펜에 대한 연간 임대료(quitrents)와 소정의 나 세금 납부를 기피 했는데, 이는 펜의 재정난을 더욱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펜은 거의 무일푼 상태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펜실베이니아 식민지는 정치적으로는 그리 안정 되지 못했지만 독립전쟁 때까지 그의 가족들이 소유권을 유지하며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했다.

대륙회의가 처음 열린 곳이 필라델피아 였고 전쟁 기간동안 수도의 역할을 한 곳도 이곳이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리적 심장부였다. 모든 대륙회의가 소집된 역사적인 장소다.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와 1775년 제2차 대륙회의가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 의사당인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 )에서 열렸다. 이 곳에서 1776년 독립선언서가 채택 및 공표되었고, 1787년에는 미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당시 북미에서 가장 크고 가장 문화가 발달된 세련된 도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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