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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4 )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선교 본부

  안동일 작

  자 그러면 이쯤에서 당시 1880년대 후반  낙후된 아시아로 향한 청년 신자들의 선교 열풍을  불게 했던 미국 기독교계의 그간  사정을 알아보자.  

 아펜젤러는 이수정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있게 미국은 기독교 정신을 건국이념로 하고 있으며 그 정신에 입각해 난관을 헤치고 발전을 구가해왔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부강 하게 되었다면서 그 은총을 나누기 위해 선교에 나섰다고 했다. 

이말은 엄밀히 따져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그리고 루미스 처럼 좌고 우면 하지 않고 선교의 길에 나선 청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은 타당하고 근거가 있는 신념 이겠지만  종교에, 특히 기독교에 믿음과 소양이 없는 비 신자들과 매우 냉정하게 분석된 자료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들의 경우에는 다르다.  

미국의 기독교가 처음부터 순탄하게 그리고 일사 분란하게 시작돼 발전을 구가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긴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생존 그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히들 미국의 3대 정신으로 개척 정신, 실용주의 정신, 개신교 정신이라 해서 3를 꼽는다. 파이오니어, 프렉티컬 , 프로테스탄트가 그것이다.  영국 성공회에서 시작한 미국의 기독교는 이 3대 정신을 바탕으로 백년 만에 그야말로 눈부시게 꽃을 피운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그렇다. 

  잘 알고 있는 대로 미국 대륙은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 된 10년 뒤인 1502년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에 의해 인도나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이 확인 됐다.  지도 제작자들은 이후  그의 라틴어 이름 ‘Americus’의 여성형인 ‘아메리카(America)라는 이름을 붙인 세계 지도를 제작했다. 이 이름은 널리 퍼져 결국남 북 미  두 대륙 전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아메리고의 탐험은 주로 남미 쪽에 국한 됐었지만 이후 1524년에 지오반니 베라자노 ( Verrazzano) 가  프랑스 국왕의 의뢰로 북서 항로를 찾기 위해 북미 동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대륙 북쪽 지방에도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베라자노는 지금의 자신 이름의 긴 다리가 있는 뉴욕 만에 상륙 했었다. 

 북 아메리카에 유럽인 들이 정착 한 것은 1560년 스페인 군 장교 페드로 아빌레스(Pedro  Avilés)가 현재 플로리다주의 세인트 오거스틴에 건설한 식민지가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  이 정착촌은 영국이 건설한 제임스타운(Jamestown, 1607)이나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 1625)보다 훨씬 앞서며, 현재까지도 사람이 거주하는 가장 오래된 유럽인 정착지다. 

 영국인들의 북미 대륙 정착은 스페인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영국은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들어 1585년  월터 롤리 ( Walter Raleigh)의 주도로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의 로어노크 섬에 첫 식민지 건설이 시도됐다.  이태 뒤인  1587년 까지 두 차례 정착 시도가 있었으나, 보급선 부족, 원주민과의 갈등, 정착민들의 미숙함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좌초 됐다.  1590년 보급선이 돌아왔을 때, 정착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로 남게 됐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606년, 제임스 1세 국왕은 런던에 본사를 둔 민간 합자회사인 버지니아 회사 (Virginia Company)에 북미 식민지 개척 허가를 내주게 된다.  주된 목적은 금광 탐사, 새로운 무역로 개척, 그리고 이교도 개종 등 경제적 이익 추구와 선교였다.  국왕은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큰 회사들에게 식민지 설립 특허를 내주어  힘들이지 않고 식민지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함께 거머쥘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1607년, 144명의 남성 정착민을 태운 세 척의 배가 체사피크 만에 도착해 개간을 시작했다.  맹수와 원주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거지 일대에는  나무로 방책을 세운 일종의 요새를  먼저 건립 했다. 정착민들은 이곳을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제임스 타운이라 불렀다.  그들은 인근 노천광을 개간하면  거기서 금과 은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들이 찾은 것은 겉보기만 누런 황철광뿐이었다. 

겨울이 오자 혹독한 추위가 불어닥쳤고, 식량이 떨어져도 보급이 되지 않아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던 끝에 원주민들과 교분을 맺고 담배를 재배하는 법을 배웠다.  정착민들은 열심히 담배농사를 지었고  본국에 담배를 가져다 팔아 그 돈으로 겨우 생필품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영국으로 부터의 이주민이 유입되었고  효율적인 담배 재배 방법이 발견되면서 식민지는 담배 농사로 경제적으로 일어서기 시작했고, 이는 제임스타운의 생존과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북미대륙에 처음으로 영구적인 식민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은 초기에 말라리아, 추위, 굶주림 등으로 인해 높은 사망률을 겪으며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불굴의 투지로 살아 남았다.  그런데 부랑아 전과자 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해서 후대 사람들에게 대우를 못받는 이곳 정착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1607년  제임스 타운에 최초로 세워졌다는 성공회 교회는 제임스타운 요새 안에 지어졌으며, 헛간 같은 모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공회 성직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1608년 1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리고 정착민들은  1619년에는  대표자를 뽑아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북미대륙에서 최초로 선거에 의해 탄생한 의회가 된다.

 이 의회는  버지니아 식민지에선 영국 성공회가 공립교회(Established Church)가 된다고 지정했다. 의회는 세금으로 교회를 후원했으며, 다른 교회(교파)로부터 성공회를 보호했다. 또 의회는 식민지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행정구역인 카운티(county)와 성공회 전도구(parish)를 지정했다.즉 버지니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성공회 신자가 된다는 말이었다. 

  또 그해 1619년  홀아비들을 위해 19명의 신붓감들이 영국에서 도착했는데, 그들을 데려오는 데 홀아비 1인당 120파운드에 해당하는 담배를 지불했다. 또 그무렵 네덜란드 배가 이곳에 들어와 20명의 흑인 노예를 농가에 팔고 갔는데 이것이 북미 식민지에서 노예제도가 시작된 기원이 된다.

 성공회 교리는 성경을 구원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고백하며,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지키고,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직을 존중하는 네 가지 신앙 기준에 기반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개신교로 분류되면서도 가톨릭의 전통을 계승하는 특징을 가진다.  

  한편 유명한 메이플라워의 메사추세스 도착은 버지나아 식민지가 세워진지  10여 년 뒤의 일이다.   1620년 9월 16일, 약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신대륙으로 향했다. 거친 바다와 악천후 속에서 66일간의 힘든 항해를 거쳤다.

 1620년 11월 21일, 메이플라워호는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 항에 닻을 내렸다. 당초의 목적지와는 영 다른 곳이었다.  여러 정찰 끝에  12월 21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 지역을 최종 정착지로 정했다. 이들이 세운 정착촌을  플리머스 식민지로 부르고 있지만  식민지 라는 말 보는 자치 정착 타운촌으로 부르는게 맞다. 필그림들은 상륙 전 ‘메이플라워 서약’을 통해 자치 정부 구성과 법률 준수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정착민들의 주류가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필그림)들이었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우리 스스로를 하나의 시민 정치체(civil body politic)로 구성한다”고 명시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한 공정한 법률을 만들고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정착민들 사이의 질서와 합의를 위한 자발적인 사회계약이었다. 종교적 가치와 신앙 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건너 왔다.는 서두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정착 초기에는 혹독한 겨울 추위와 기아로 인해 절반 가까운 인원이 사망하는 등 시련이 있었지만 그들은 생존을 위한 단결과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해 냈고 이듬해에는 수확을 감사하는 추수 감사절을 지낼 수 있게 됐다. 인근의. 원주민 왐파노아그 족의 도움이 큰 몫을 했다. 

 아무튼 1620년대 중반 북미 대륙에는 두 개의 영국인 정착지가 건설 되고 있었던 것이다. 크기는 당연히 버지니아쪽이 월등했다.  버지니아는  1624년  최초의 왕령 식민지가 된다. 영국왕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의 특허를 취소하고  프랜시스 와이어트(Francis Wyatt)를  버지니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최초의 국왕 임명 총독이다.   

 그때 영국왕은 케이프 코드의  정착민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치민들이 자체적으로 선출한 플리머스 식민지의 초대 총독은 존 카버(John Carver)로 알려져 있다.  버지니아며 후일 건설되는 식민지들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 총독, 가버너(Governor)라는 표현을 사용 하고 있지만 리더 혹은 촌장이 어울리는 번역이다. 그는 메이플라워 서약 체결 직후인 1620년 11월  선상에서 리더로 선출됐다.

 카버는  메이플라워 서약을 주도 했고 식민지 건설 초기, 특히 원주민 왐파노아그족(Wampanoag)과의 우호적 관계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왐파노아그족의 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와 평화 약속을 맺어 식민지의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 안타깝게도 카버 총독은 식민지 건설 이듬해인 1621년 4월, 첫 번째 파종 시기를 앞두고 과로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카버 총독 사망 후, 31세의 젊은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가 두 번째 총독으로 선출되어 이후 30년 넘게 식민지를 이끌었다. 브래드퍼드는 플리머스 식민지의 성공적인 정착과 성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신앙심 가득한 일기로  후세에 기록을 남긴 인물로도 칭송을 받고 있다.   

 후일 어느  비신자가 “당신들의 신이 있다면 지도자 존 커버를 그리 쉽게 세상 떠나게 했습니까?” 했을 때 그가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존에게 기도 할 수 있는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영국 왕실로부터의 직접적인 간섭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플리머스가 다른 식민지들과는 다른 독특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필그림들은 당초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버지니아 북부에 정착 허가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허가받은 지역을 한참 벗어난 곳 매사추세츠에 정착했다.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행정력이 즉각적으로 미치기 어려웠다.

 당시 영국 왕실은 아메리카 북부의 이 외딴 지역에 큰 관심이 없었다. 플리머스는 금이나 담배 같은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왕실은 식민지 초기 생존 기간 동안 이들의 자치를 묵인했다.

 플리머스는 버지니아처럼 국왕이 직접 관리하는 ‘왕령 식민지'(Crown Colony)가 아니었고  초기에는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민간 주도 식민지였으며, 나중에는 사실상 독립적인 특허 식민지(Charter Colony) 형태로 운영되었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인구는 초기에 혹독한 겨울을 겪으며 급감했지만, 이후 지속적인 이민과 자연 증가를 통해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다른 식민지들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식민지 소멸 시점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플리머스 식민지 인구 변화 추이를 살펴 보면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했던 102명 중, 첫 겨울을 넘기고 생존한 인원은 절반에 가까운 약 50명에 불과했지만 1630년에는 추가 이민자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인구는 약 300명까지 늘어났다.

 그후 1640년에는 1020명, *1650년 1,566명 *1660년 1,980명 *1670년에는 5,333명으로 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1691년 플리머스 식민지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 합병될 무렵의 인구는 약 7,000명까지 성장했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인구는 안정적인 성장을 보였지만, 대규모 청교도 이민이 몰려들었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 비하면 성장 속도는 훨씬 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 이상 자치권을 유지하며 공동체를 유지할 만큼 자립 자주적이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만큼, 그들의 신앙생활과 교회는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정착민들은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개혁하기에는 너무 타락했다고 보고,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기를 원했던 ‘분리주의자 (Separatists)들이었다. 

 이들은  신대륙에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  교회를 자유롭게 건설했다.  이들의 교회 조직은 ‘회중 교회'(Congregational Church):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는 개별 교회가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하며, 교인들이 직접 목사를 선택하고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는 훗날 미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했다. 법률, 도덕 규범, 사회생활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었으며, 주일 예배는 의무적이었다.   정착민들은 상륙 직후 혹독한 겨울 동안 거주지 건설에 집중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특정 교회를 따로 건축하지 못했다. 초기 예배는 초기 리더  존 카버의 집이나 다른 지도자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 안정된 후, 그들은 공동 집회소(Meeting House)를 겸하는 단순한 형태의 목조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예배뿐만 아니라 마을 회의나 방어를 위한 요새 역할도 겸했다.

청교도 신념에 따라, 교회 건물은 화려한 장식이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없는 매우 검소하고 실용적인 형태였다. 예배 형식 또한 성경 읽기, 설교, 기도, 찬송에 집중했으며, 영국 국교회의 화려한 의식을 배제했다.

   플리머스 자치주는 식민지 역사 대부분 동안 자치가 보장되었지만, 1686년,영국 왕실의  큰 간섭이 있었다.  제임스 2세가 뉴잉글랜드 지역의 식민지들(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등)을 통합하여 뉴잉글랜드 자치령(Dominion of New England)을 설립한다고 공표 했던 것이다. 

 국왕은  총독까지  임명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는 식민지 주민들의 자치권과 청교도적 생활 방식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큰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이 통합 자치령 공표은 1689년 영국서 명예혁명이 발발. 왕권이 무너지면서 붕괴되었고, 식민지들은 다시 자치권을 회복했다.

  1630년대 ‘대이주'(Great Migration) 기간 동안 수많은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보스턴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이 지역 식민지는 빠르게 성장하여 뉴잉글랜드 일대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플리머스 식민지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1630년대  대 이동 시기를 전후로  뉴잉글랜드 해안 뿐 아니라  동부해안으로 영국인 들을 비롯해 각지의 유럽인들이  물밀듯이 몰려 들었다. 유럽의 기독교 개신교 그리고 무종교 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실제 메이플라워 호만 해도 배를 탄 전체 승선원 102명 중 ‘순례자들(Pilgrims)’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배에는 ‘낯선 사람들(strangers)’ 즉 상업적 이주민들이 더 많았다.  이후 미국의 역사도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이후 영국은 다시 북아메리카에 관심을 쏟았다. 짧은 기간 안에 캐롤라니아에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네덜란드 인들은 뉴네덜란드 에서 축출되었다.   뉴 네덜란드에서 이름을 바꾼 뉴욕 이며  뉴저지, 델라웨어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에 새로운 독점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이  지역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왕령 식민지로 전환되었고  국왕이 총독을 임명했다.  뉴햄프셔는 1679년, 뉴욕은 1685년, 뉴저지는 1702년에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같은 지역에 있던  플리머스 식민지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1691년에 하나의 행정 구역인 ‘매사추세츠만 주'(Province of Massachusetts Bay)로 공식 합병된다. 

 두 식민지는 모두 청교도(Puritan) 계열의 이주민에 의해 세워졌지만, 종교적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한쪽은 필그림 한쪽은 퓨리탄으로 불린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필그림'(Pilgrims)으로 알려진 분리주의자(Separatists)들이 세웠다. 이들은 언급한 대로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너무 타락했다고 보고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1630년에  건립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비분리주의 청교도(Non-Separatist Puritans)들이 세웠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 내에 남아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분리주의자들보다는 더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이처럼  플리머스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종교적으로 유사하면서도 다른 배경을 가진 두 개의 독립적인 초기 식민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매사추세츠만이 인구 면에서 경제 면애서  더 우세해졌다.

 1691년, 영국 국왕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새로운 헌장(charter)을 발부하여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플리머스 식민지, 메인주 등을 포함하는 ”매사추세츠만 주’ 를 형성한다고 선포했이 결과 플리머스 식민지는 독립적인 정치체로서의 지위를 잃고 더 크고 강력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 흡수되었다. 종교적으로는 개혁 성공회와 회중교회로 반분된 양상이었다.   이무렵  각 식민지의 종교 양상은  지역마다  다르게 전개 되고 있었다.    

한편 뉴욕은 원래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화란 개혁 교회가 주된 교회였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모피 무역을 위해 1614년에 정착지를 세우고, 1625년에는 맨해튼섬에 요새인 ‘포트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이곳은 ‘뉴 암스테르담’으로 불리며 식민지의 중심지가 되었다.

  1664년, 영국은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찰스 2세의 동생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이후 식민지는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요크 공작이 모든 토지와 정부를 통제하는 소유 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 통치 기간에 이미 다양한 유럽인들이 정착했기 때문에, 영국이 점령한 뒤에도 문화적 다양성이 종교적 다양성이 유지되었다. 

   펜실베이니아는 1681년 영국의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에 의해 세워졌다.  영국왕 찰스 2세는 윌리엄 펜의 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펜에게 펜실베이니아 지역의 광활한 영토를 수여했다.    펜이 신봉하는 무교회 주의  퀘이커교는 평등, 비폭력, 종교적 관용을 중시하여 영국에서 박해를 받았다. 윌리엄 펜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거룩한 실험’을 실현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를 세웠다.  원주민과의 관계: 펜은 원주민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그들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구매했다. 이러한 평화 정책으로 펜실베이니아는 오랫동안 원주민과의 갈등이 적었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 유럽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몰려들었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으로 인해 펜실베이니아는 빠르게 번성했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중부 식민지는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이민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여러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했다.   농업과 함께 모피 무역을 비롯한 상업 활동이 발달했다. 

독립전쟁이 일어 나던 1775년 무렵 미국은 기독교  백화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각 교단이 할거 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 로드아일랜드의 침례교회, 남부의 미국 성공회,   그리고 전역에 고루 퍼져있는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개혁교회 , 거기에 불같은 성령을 중시하는 오순절 교회,  메릴랜드의 천주교회 ,그리고 후일 크게 성장하는 몰몬교며 여오와 증인 등 신흥 기독교의 씨앗 까지….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이 서로 크게 대립하고 다투지 않았다는 점이다. 용광로 처럼. 물론 몇몇 불미 스럽고 안타까운 사건 사고들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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