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안동일 작
이수정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천주학을 만난 것은 그가 20대 초반이던 1862년 일어난 임술 봉기 때였다. 관에서는 임술 민란이라고 했지만 수정의 입장에서는 난(亂)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종래의 민란 과는 그 양상이며 피해상황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봉기건 난리건 간에 커다란 소요 사태의 와중에 천주를 만났다는 얘기다. 큰아버지 이달규(李達逵) 생원을 통해서 였다. 후일 임오군란 으로 그의 일본행이 성사되는 것을 보면 그의 인생은 난리와는 인연이 깊은 편이다.
임술농민봉기(壬戌農民蜂起) 혹은 임술민란(壬戌民亂)은 1862년 임술년, 조선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 민요 ( 民擾) 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심화된 체제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2백 60년이 흐른 상태였고, 이 과정에서 제도의 문란 과 지배 계층의 횡포가 갈수록 심화 되고 있었다. 망국의 세도 정치 때문이었다. 정조가 돌연 사망한 후 어린 순조가 등극하면서 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랐고 그 세도 정치가 자그만치 60년 가까이 계속 되면서 나라의 기강과 경제 형편이 급전직하로 사정없이 무너진다.
몇차례 강조 했듯이 과거제도가 무용지물이 되고 매관매직이 판을 치면서 제대로 된 관리가 배출 되지 못하면서 그나마 조선의 자랑이었던 선비정신, 청백리 정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왕에게 직언하던 기록관 사관들도 자취를 감췄다. 나라 살림의 근간인 조세 제도는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당시 세금 제도는 토지세에 해당하는 전세를 납부하는 전정, 국방세에 해당하는 군포를 납부하는 군정, 환곡의 이자를 거두는 환정의 삼정(三政)이었다. 봉기가 일어난 철종 무렵에는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해 이 셋 중 정상적으로 되는 것이 없었다. 관리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백성들을 착취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은 과중되었지만 착복과 횡령으로 국가재정은 고갈되었다. 피지배 농민 계층의 생활고는 가중되었고, 불만은 누적되었다. 당시 정권은 이 체제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국왕은 무능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국가통치의 원칙을 아랑고 하지 않았다. 관원들은 뇌물을 통해 벼슬을 구했기에 그 본전을 뽑아내고 뇌물을 더 바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다.
물이 끓으면 넘치게 마련이다. 1862년 3월 4일(음력 2월 4일)의 단성을 시작으로, 3월 14일(음력 2월 14일)의 진주 에서 폭발한 농민들의 분노는 3개월 이상 삼남과 중부 지방을 거쳐 함경도 등 북부 지방 까지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해 동헌을 파괴하고, 수령을 능욕했다. 몇몇지역에서는 세금 횡령 및 전가를 일삼은 아전과 토호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후일 통계 자료에 따르면 조선 전역에서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난 곳은 무려 90여개 군현에 이른다. 당시 조선 전역의 군현이 3백여개로 집계 되는데 3분의 1 가까운 숫자의 군현에서 민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줄잡아 연인원 수십만이 참여한 그 민요 에서 그 인명 피해, 사망자는 전역을 다 따져도 1백을 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그런 민란이 있는가? 영조 때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는 3천이 죽었고 순조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는 5천이 죽었다. 임술 민요의 백성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고 또 관군과의 충돌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때 괸군의 기강이 너무도 해이해져 있어 도저히 동원할 형편이 안됐다고 분석하기도 힌다. 사망자는 민요 이후 안핵사가 처형한 인원이 50 정도, 민요의 과정에서 농민군과 마주쳐야 했던 동헌을 지키던 포졸 군졸과 민중의 원성을 샀던 악덕 서리배 들을 합쳐 50 쯤 된다.
수정은 이 봉기에 참여 하지 않았다. 그 기간 중 천주학을 열심히 공부 했어야 했다. 백부의 권고에 따른 일이었다.
수정이 살던 곡성에서는 민요가 일어 나지 않았던것이다. 전라도는 삼남 가운데서도 가장 항쟁이 많이 일어난 지역으로서 3월27일 익산을 시작으로 4월과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함평 · 고산 · 부안 · 금구 · 장흥 · 순천 · 강진 등 전라도 54개 군현 가운데 30여 곳에서 크고 작은 항쟁이 일어났음에도 수정이 사는 곡성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전역을 휩쓴 항쟁은 많은 지역에서 최초의 항쟁 논의가 대부분 향회에서 시작 됐다는 점이다. 양반까지 포함됐다는 말이다. 그무렵 고을 마다 마을의 각종사안 이며 조세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논의구조가 있었다. 바로 향회(鄕會)였다. 고을의 지배세력인 향반들이 모이는 기구였지만 유사시에는 참가층이 확대되었다. 여기에 조정에서 닥달하며 다시 정비했던 오가 작통제는 이때 논의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조정과 관료 들이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다시 세웠던 오가작통제와 향회가 비수가 되어 저들에게 돌아간 셈 이었다. 초기에 일어난 항쟁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진주 지역만 해도 좌수 까지 지냈던 향촌계 계주 유계춘 과 전주 이씨로 왕실의 인척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던 이명윤등 양반층이 주동자의 한사람 이었다.
향회에서의 논의는 처음에는 고을 수령이며 감영에 폐정 시정을 청원하는 등장(等狀), 청원서를 내자는 것으로 부터 시작됐다. 무기를 들고 거병해 관군과 맞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관청으로로 몰려가 목소리를 높인 시위를 해서라도 문제를 제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 졌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곳에서 시위하기 위해 읍내로 들어간 농민들은 점차 격앙돼 수령을 무릎꿇려 능욕하고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고 관아를 부수고 이서배들의 집을 불태우고 더러는 죽이기 까지 했던 것이다. 수령이 살해된 예는 전역에서 한곳도 없었다. 참 착한 농민군이다.
그나마 이런 폭력 사태에 양반들은 빠져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함께 모였지만 이들 대부분의 양반들은 초군이라 불리웠던 농민들이 논의와 시위를 주도하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흐르자 나가자 중간에 빠져 나갔던 것이다. 전국에서 대동소이 했다. 평온한 투쟁이 계속 됐던 곡성 이웃 고을 함평의 경우 농민들은 14개 면의 면민들이 지역의 훈장들이며 향촌 계주 들과 연계해 조직적으로 참여해 한달간이나 동헌에서 사또와 모임을 지속하는 완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옆 고을들 에서 초군들이 현청으로 몰려가 시또로 부터 시정 약속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곡성의 이수정은 동리의 청년들과 함께 곡성 향촌계의 좌장으로 있던 백부 이달규 생원에게 달려 갔다.
“무슨 일로 이렇게 신 새벽에 몰려 왔는가?”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남이 장에 가니까 따라가는 형세가 돼서는 안될 터인데…나는 찬동할 수 없네 ”
“그게 아닙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민요가 있었던 군현은 민원을 들어주는 척 이라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군현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들인가? 나는 무엇도 반대 이지만 애기나 한번 들어 보세나”
청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계책이 있을리 없었다. 현청으로 몰려가 현감의 시정 약조라도 받아 내자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향촌계 어른들이 암묵적으로 라도 허락해 주시기만 한다면 두레와 상두계의 청년층이 나서 겠다고 했지만 이생원은 요지 부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할 테고 폭력은 폭력을 부르기 마련이라 면서 반대 했다.
청년들이 풀 죽어 돌아 가려 하자 백부는 수정만 남으라고 했다.
“선뜻 동조 하지 않아 실망 했니?”
“아닙니다. 큰아버지”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이 이렇게 쉽고 순탄하게만 끝날것 같지는 않구나.”
백부는 지금은 워낙 분위기가 그렇기에 나라에서도 각 고을 관청에서도 그러마고 넘어 가는 것 같아도 관의 속성상 후과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실제 그 무렵 벌써 진주의 주동자 9명이 처형돼 성문 효시 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소요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돼 세상이 달라지게 될것이라고 믿을 만한 분이 귀뜸을 해 왔구나.”
“그게 누군데요?”
“조정에 있는 분이지. 나와는 내 윗선에서 뜻을 같이 하는 분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백부는 말을 이었다.
“영리한 수정이 너는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큰 아버지는 천주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란다.”
백부의 말대로 이런저런 정황으로 수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백부는 언변이나 생활태도가 남달랐다. 집에는 돕는이들이 진작 부터 없었고 사랑에 혼자 있을 때면 묵상을 한다고 조용히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혼자 상을 받을 때 성호를 머리와 어깨에 십자가 성호를 긋는 모습을 수정도 몇 차례나 목격 하곤 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받을 때도 항상 잠시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곤 했다.
백부의 친자식 들인 사촌들은 어떤지 몰랐지만 수정과 그의 동생들 그리고 부친은 애써 모른척 하고 있었단 것이다.
“그랬군요” 무심한듯 대답했다.
백부는 자신이 곡성 공소의 비선호법 (秘線護法)이라고 했다. 비밀스럽게 법을 수호하는 주요 일꾼 이라는 얘기다. 큰 박해를 여러차례 거치면서 조선 천주교단은 살아남는 지혜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곡성은 전남 에서도 알아주는 천주교 마을 이었다. 수정이 태어나기 한참 전인 1827년 정해년에 일어난 꽤 컸던, 그리고 안타까왔던 박해, 정해박해가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정해 박해가 안타까운 까닭은 평화와 평등의 천주교 공동체에서 양반 상놈 갈등이 터져 나와 밀고로 이어져 수백 수천의 사람이 연루 돼 고초를 치렀다는 점 때문이다. 한덕운 토마스라는 유명한 양반 출신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백겸이 전형적인 견부 호자로 이 사건, 박해의 단초를 제공한 작자다. 기회가 닿으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백부는 이때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날 이생원이 조카 수정에게 한번 읽어 보라며 건낸 책이 성경직해광익과 주교요지 였다. 수정으로서는 도대체 어떤 내용 이길래 사람들이 저리 빠져 들까 싶어진작에 보고싶었던 천주학 책 들이었다. 불감청 고소원이란 말이 이럴때 쓰여진다.
성경직해광익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최창현이 중국에서 들어온 성경직해 성경광익의 내용 을 발췌해 한글로 번역해 펴낸 책이다.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천주교의 기본적 가르침을 순 한글로 명확히 설명한 책이다. 이 두 한글 교덕서는 당시 천주교가 조선의 모든 계층으로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직해광익을 통해 당시 신자들은 통해 ‘복음’, 성서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4 복음서 전체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내용만을 담고 있지만, 조선 백성이 우리 글로 접한 최초의 ‘하느님 말씀’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교회 에서 보여진 한글 번역의 노력은 지식층 남인 유학자들이 한문 교리서를 받아들여 읽었던 지적 노력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때 유행한 책이 천주실의와 칠극이었다면 이 두 책이 나온 신유 박해 무렵과 그 이후 에는 단연 이 두 책이 으뜸 길에 놓여있다.
수정은 주교요지에 먼저 눈길이 갔고 단숨에 앍어 내려 갔다.
주교요지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이 일반 양민과 아녀자 교우들을 위해 저술한 상·하 2권의 우리 말 교리서다. 천주에 대한 인간의 바른 인식(상권)과 성경에 바탕을 둔 계시(하권)에 관한 설명이 주요 내용이다. 조선의 사회 상황과 정서에 비춰 교리를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신자들 사이에서 필사, 비밀리에 전파된 이 교리서에 대해 주문모 신부는 “ 조선 땅에서 꼴과 땔나무보다도 더 요긴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언문, 암글이라 해서 괄시하고 천시 했지만 정약종 어른의 언문은 정말 찰졌다. .
< 인심이 스스로 천주님 계신 줄을 아느리라, 무릇,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 위에 임자가 계신 줄을 알므로, 병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 하늘을 우러러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며 빌고, 번개와 우레를 만나면, 자기 죄악을 생각하고 마음이 놀랍고 송구하니, 만일 천상에 임자가 아니 계신다면, 어찌 사람마다 마음이 이러 하리요>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난다.
<슬프다! 오늘 이 시각에도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는데, 그 속에서 내년을 기다리다가 지옥에 들어간 이가 무수할 것이니, 너도 내년이란 말을 다시는 말지니라. 사람이 개과천선하면, 천주께서 그 죄를 용서함을 허락하시지만, 장래를 기다리고 미루어 가는 사람에게는 훗날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 오늘부터 곧 시작하여 미루고 핑계하지 말지어다.>
정말 찰지지 않은가 수정은 이 주교 요지를 읽고 천주학에 빠져 들었고 성경광익을 읽고 거기에 나와 있는 복음이 원본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원본 번역을 생각 했던 듯 싶다. 그는 백부를 여러 차례 다시 찾았고 한문본을 포함해 다른 교덕서들을 섭렵햇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두번째 사제 최앙업 토마스 신부가 편술한 성교요리 문답이 유달리 가슴에 남았다.
성교요리문답은 조선교회가 처음으로 채택한 공식 교리서로,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를 중심으로 한 문답식 교리서다. 중국 교회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같은 이름의 한문본을 번역한 것으로 백부와 개인적 인연이 깊었다는 최양업 신부가 편찬했다. 괞히 신부, 사제가 아니었다. 결이 달랐고 내용에 깊이가 있었다. .
수정은 조선 천주교의 지난한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백방으로 노력해 그 계보와 연원 인물들에 대해 탐구 했고 머릿속에 확실한 그림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1860년대 초반은 조선 천주교의 황금기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그때 까지의 상황에 비추어 그렇다는 얘기다.
1843년 병오 박해 이후 20년 동안 이렇다할 박해가 없었다. 전교의 자유가 허용 된것은 아니었지만 묵인하는 형세였다. 임금 철종과 시파 안동김문의 성향과도 맞물리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앙드레아 신부의 지대한 공헌이었다. 24살 정말로 꽃다운 나이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3년여의 공생활 동안 이땅에 뿌린 씨앗은 엄청났다. 그의 영민함과 충직함은 고위 관료 들에게 까지 귀감이 됐고 조선의 신자들은 그를 보내기는 했지만 희망을 가 질수 있었다. 하늘이 조선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듯 싶었다.
그때 조선은 로마 교황청이 공인한 교구의 하나였다. 1831년 유난히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비오 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로 즉위했다. 그는 교황위에 오른 뒤 조선교회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마침내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이로써, 조선교회는 독립교구가 될 수 있었다. 1784년 권일신 이벽이 모여 명레방에서 집회를 가진 이래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100여년 뒤 조선인 성인이 될 정하상 바오로, 정약종의 아들, 정약용의 조카, 그리고 이수정의 백부 이달규의 벗 정하상 그가 목숨을 걸고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명문의 청원문을 써서 로마 교황청까지 전달한 것도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25년에 쓰여졌으나 1827년에야 교황청으로 어렵사리 전해진 이 편지를 읽은 그레고리오 16세(당시 추기경)는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구나”라고 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단다.
조선대목구 설립과 함께 조선 선교를 담당하게 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한글 사랑은 유별났다. 이 사랑이 조선 천주교의 초석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했다.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기 위해 이들은 당연히 조선말과 글을 배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글의 우수성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글의 문법을 나름 체계화해 후임 선교사들이 보다 쉽게 우리말을 배울 수 있도록 길을 닦았다. 후일 개신교의 헐버트 선교사가 띄어 쓰기라는 획기적인 한글 개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반한다.
당시 제한된 수의 선교사들이 전국의 교우촌, 공소를 돌면서 신자들을 일일이 가르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글 교리서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각종 한글 교리서와 쪽 성경은 신자들의 필수품이 됐고, 신자들은 이를 통해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우리글 한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주교 서적은 행상인들을 통해 전국 지방에까지 퍼졌다. 말한대로 선교 활동에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때여서, 관리들도 서적의 유통을 묵인했다. 일반인들은 한글 교리서로 교리를 배우고 스스로 영세를 청했다.
베르뇌 주교는 신자 아닌 일반인들이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로마에 직접 보고 하기도 했다. 또한 베르뇌 주교는 1864년 공소의 회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것을 강력히 명하기도 하는 등 한글 보급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이같은 노력과 시절인연이 맞아 떨어지면서 조선대목구는 임술 봉기가 일어났던 1863년 무렵 약 135개 공소(公所)에 2만 3000여 명의 신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다시 농민 봉기 문제로 돌아오면 1862년 말이 되자 전국 각지의 봉기는 제주도를 끝으로 거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으며, 농민들도 자체적으로 해산하였다. 임술민란은 피지배 계층의 분노를 폭발시킨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 실체는 소규모 봉기가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관군과의 충돌은 그 어느 지역에서도 일어 나지 않았다. 동헌을 지키는 포졸들과의 싸움만 있었다. 그것도 더러.
전역의 봉기에 망연자실 당황한 안동 김씨 정권은 삼정의 문란을 개선 할 삼정이정청을 설립한다, 탐관오리를 색출 한다 하여 법석으로 떨면서 대비책을 논의하고, 민란이 일어난 지역에 안핵사와 위무사를 파견해 농민들을 다독이는 한편 주동자들을 처벌을 최소화 했지만 민심은 이미 그들을 폐기 처분 하고 있었다. .
수정의 백부 이달규 생원의 말대로 임술봉기는 조선 근대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는 그 단초를 임술년의 민요가 만들어 냈던 것이다.
임술봉기에 놀란 철종은 가뜩이나 병약했던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이듬해인 1863년 겨울,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아는 대로 어린 고종이 즉위하게 되고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이제는 됐다’고 만세를 불렀다. 아직 정식으로 입교 하지는 않았지만 이수정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대원군이야 말로 친 천주교 인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 민씨는 베르네 주교로 부터 세례 까지 받은 신자였다. 하지만 이 기대는 처절한 배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과연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