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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1)

안동일 작

예수 그리스도의 종 (A Sservant of Jesus Christ)

조선의 마케도니안과 미국 선교 본부

1885년 3월1일은 3월의 첫날이자 일요일 주일 이었다.
이날 이수정은 헨리 루미스와 함께 요코하마의 가이간 교회를 찾아 주일 예배를 드리고는 그곳 선교센터 응접실에서 며칠 전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를 감격스레 만났다. 함께 도착한 스크랜턴 모자는 다른 사람 들과의 얘기가 길어 졌는지 아직 선교 센터로 오지 않고 있었다.
사나이들의 첫정은 8초안에 가늠된다고 했는데 아펜젤러와 이수정은 첫눈에 서로에게 끌리는 강한 기류를 느꼈다. 반가운 수인사가 끝나고 아펜젤러가 먼저 한 말은 리뷰에 실렸던 이수정의 편지가 매우 감동적이었다는 말이었고  그 편지 덕에 자신 부부가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고 했다. 영어로 말했기에 루미스가 통역 하려 했지만 수정이 알아 듣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영어로  ‘ 다 루미스 선교사의  잘 된 번역 덕분’이라고 공을 루미스에게 돌렸다.  루미스 선교사는 앞으로 수정이 아펜젤러 부부에게 편지로 말한대로  조선말이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에 대해서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루미스는 이수정이 자신들 미국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의 하늘이 보낸 사도라고 극찬을 했다. 당시의 그로서는 진심이기도 했다.

이어 이수정이  아펜젤러에게 대뜸 던진 질문이 미국은 기독교 국가인가, 그리고 기독교를 바로 믿게 되면 나라가 부강 발전 할 수 있는가  아펜젤러 군의 생각을 듣고 싶디고 했다.
그랬더니 아펜젤러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꽤 길었던 이 대답은 이수정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조선 선교에 매진 하게 했고 일본에 오는 선교사들에 대한 조선 안내인이자 조선 말,  풍속과 문화의 교사 노릇에 전력하게 만들었다.

“역시 선생님께서는 개인의 구원 보다는 나라의 구원을 생각 하시는군요, 매우 좋습니다.  미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나라는 아니지만, 사실상 기독교 국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국교로 지정 하지 않은 것이 더 기독교 적이기는 하지요.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 미국의 기독교적 전통은 기독교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할 정도로  미국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주도해 세운 나라로,  청교도 정신, 개신교 정신은 미국 건국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종교적 자유 추구,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독립선언서는 지금도 저와 같은 청년들의 피를 끓게 하고 있습니다. ”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독립선언서가 아직도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는 말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와 독립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찾았으며, 이러한 신앙은 독립선언서 곳곳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 되었으며 행복의 추구권을 갖는다는 이어진 독립선언서 내용은 수정의 가슴을 더 뛰게 만들었다.

“ 또 미국의 헌법과 , 권리장전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민주 공화국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야 말로 기독교 정신의 정수 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많은 기독교 목사들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설교와 기도뿐만 아니라 직접 민병대를 조직하여 영국군에 맞서 싸우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목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독립을 향한 대중의 의지를 결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습니다.”
수정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미국이야 말로 신에게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자부심을 국민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넓고 비옥한 땅과 지하자원 그래서 부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을 세계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 했고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온 것입니다, ”
수정은 박수까지 치고 싶었다.

이처럼 이날 아펜젤러는 수정이 그동안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진솔하며 일리있는 설명을 둘려줬다. 한달여 전인 1월말에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그것 보다 한층 웃길 이었다.
이수정이 그윽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펜젤러의 말 가운데 어려운 부분을 한자를 써가며 일본어로 통역해 주던 루미스 선교사도 희색이 만면해서 두사람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앞으로 요즘 표현대로 라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이날 만남 이후 아펜젤러와 이수정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이었지만 최고의 동반자 그리고 돈독한 사제지간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이수정을 회고 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처음부터 아펜젤러는 수정을 스승으로 대했다. 겸손한 제자의 자세를 취했는데 수정에 대한 호칭도 일본어 ‘이 센세’ 였다. 처음에는 ‘이 센세 사마’라고  경칭을 붙혔는데 수정이 나서 ‘센세’에 사마를 붙히면 오히려 비꼬는 말이 된다고 일러 줘야 했다. 先生 이란 말 ‘센세’ ‘센세이’ 자체가 이미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센세이 사마’와 같이 함께 사용하는 것은 틀린 표현으로 간주된다. 부장 국장 사장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아펜젤러의 겸손하고 담백한 성격도 성격 이었지만 그만큼 수정이 언변과 기개가 뛰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나이가 스무살 가까운 차이가 났던 것도 한 몫했다. 수정은 1842년 생이고 아펜젤러는 58년 생이다. 참고로 루미스는 37년 생 이다. 연상인 그도 수정을 꼭 센세로 부르며 예우 공경했다.

당시 선교사 들에게는 현지 주민들에게 사제 혹은 목회자로서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신조가 있어 너무 가깝게 지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에 곳곳에서 분규가 있기도 했던 것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세상사는 사람의 일이다.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 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날의 만남은 공교롭게도 3월 1일의 일이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이수정의 가슴을 뛰게 했던 이날의 만남이  정확히 34년 뒤인 1919년 3월1일,  한 단초가 되어 그 큰 일이 조선땅에서 일어 나리라고는 생각 못했지 싶다.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이수정과 아펜젤러 그리고 루미스 선교사의 당시 상황과 처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이수정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우국충정의 개화파 조선 기독교인, 루미스는 미 장로회 소속 중견 선교사, 아펜젤러는 감리회 소속 청년 선교사이기에 그들의 각기 상황은 많은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수정은 일본에서의 행적 말고는 그 이전과 이후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기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한바 있지난  아무튼 그가 대단한 기개와 포용력 그리고 친화력을 지닌 실력자 였음은 틀림없다. 콧대 높은 선진국의 선교사들이며 일본 지식인들을 무릎꿇게 하는 실력과 기개가 있었다. 손 빠른 성서 번역 말고도 그가 남긴 휘호며 시, 각지에서의 어록과 기고문들을 보면  일단  그의 유학 학문의 깊이는 매우 깊고도 넓다. 당대의 일본의 최고 지성인이었던 동지사 대학의 설립자가 그의 휘호와 한시를 배접해 족자와 병풍으로 꾸며 가보 처럼 간직 전시 했다는 것을 보면 한학의 그 깊이와 위풍을 짐작 할 수 있다. 마치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기개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일본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인 기독교인 대회에 조선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참석해 조선말로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대표 기도를 행해 좌중은 아멘 소리만 알아 들을 수 있었지만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기념 사진을 찍을 때는 앞줄 맨 가운데에  당당히 앉아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조선 최초의 공인된 개신교인으로 성서를 한글로 번역 했다는  사실 이외에 그에 관한 기록, 특히 그의 행적은 루미스 선교사에 의해 소개 된부분 그리고 일본 교회사에 나와 있는 기록이 전부다. 한국 쪽에서는 찾기 힘들다. 역모에 준하는 무부무군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사를 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루미스 선교사는 일본에서 40여 년간 사역을 했고 가이간 교회를 비롯해 많은 개신교 교회를 건립한 아시아 선교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크리스챤 위클리 기고문(1883년 3월)을 통해 “선교역사 속 많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봤지만 다음에 소개할 사실들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며 이수정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첫 대목이다.

“이수정은 1842년 조선의 남부 지방인 곡성 옥과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술에 뛰어나 과거 에 급제해 관료의 길에 나섰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구출한 공로로 조선 조정의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다. 그는 조국에서의 영예를 사양하고 일본 문물 연구를 위해 약 10개월 전인 1882년에 일본에 도착했다. 이수정은 일본의 저명 농경제학자 쓰다 센(津田仙)을 통해 기독교를 처음 접한 뒤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한학에 능통했던 이수정은 곧바로 한문 성경을 통해 말씀을 접했다. 어느 날 그는 조선을 위한 가장 귀중한 책들 즉 성경이 담긴 바구니를 든 두 사람이 나타나는 신비로운 꿈을 꾸게 된다. 이 꿈을 하늘의 계시로 여긴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에 매진했고 1883년 4월 28일 도쿄의 야스카와 케이조(安川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루미스는  “ 세례 후 그가 얻은 평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믿는 자만이 아는 것” 이라며 이수정의 신앙에 깊은 감명을 표 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일이었음에도 이수정은 모든 학문을 포기하고 성경 연구와 번역, 동포 전도, 한국선교 권유 등의 사역에 매진했다”고 적었다.

이수정 행적에 대한 연구는 이 루미스 선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다. 그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한학자인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가계에 대해 루미스 선교사는 전주이씨  왕족과 근척인 집안으로 추정, 학식이 높고 가풍이 당당하다고 했는데 전주이씨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없단다. 후일 그를 추적한 소장파 기독교 학자는 그가 평창이씨 라고 발표 했다. 천주교 최초 세례자 이승훈이 바로 평창이씨다.
어려서 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건장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행적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이수정이 조정에 등용되어 여러방면에 공로를 세웠다고 했는데 그의 과거 급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무반 종사품관이라는 기록이 있다는데 이로 미루어 그는 무과에 급제 했음이 틀림없다. 대과 급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당시 문과는 안동김문의 세도 정치 아래 매관 매직과 부정이 횡행했기에 실력있는 이가 뽑히지 않았다. 이미 과거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나마 무예 실기를 치뤘던 무과는 조작이 문과 만큼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전형료를 받았다는데 철종 어간  몇년 동안 매해 천명씩의 무과 급제자가 배출 됐다.  유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던 그는 문과에 몇차례 응시 해서 쓴 맛을 보았을 테고 적지 않은 나이에 무과로 방향을 돌렸던 모양이다.

그가 임오군란때 민비를 피신시킨 호위 무장  홍계훈과 진작부터 교분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를 입증한다. 수정은 임오군란 당시에 갑장의 무우였던 홍과 함께 민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로 인해 왕실의 신임을 얻었고 이 덕으로 몽매에도 바라던 일본 수신사에 합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듯 싶다.
그가 당시 조정의  유력자 민영익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별기군의 교관 혹은 중견 별감으로 있었다는 추론을 할 수 있게 한다.

엄밀히 말해 ‘별기군’이라는 명칭은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공식 명칭은 일종의 신식 사관학교인 교련병대(敎鍊兵隊)다.  별기군이라는 단어는 본래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특수한 훈련부대(별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미 정조 시절부터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별기군이라는 이름은 그저 그때의 훈련부대 통칭이다. 교련병대의 또다른 통칭은 일본군이 훈련시켰다는 뜻의 왜별기(倭別技)였다.
이 교련병대의 총책임자가 병판을 겸임하고 있던 민태호 였고 그 교련소의 당상(오늘날의 훈련소장)이 민영익이었다. 그는 당시 겨우 스물 한살이었다. . 교관 및 간부들의 계급은 정령관(正領官),부령관(副領官), 참령관(參領官)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는 오늘날의 영관에 해당한다.  생도들은 훈련을 마치면 소위에 해당하는 계급 참위(參尉)로 임관했다.  임오군란 직전에는 사관 140명, 병사 300여 명으로 약 440명의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 돼 있다. 제식소총은 일본에서 도입한 스나이더 엔필드와 패턴 1853 엔필드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별기대는  생도를 양반가에서 뽑았기에  생도들이 사회에서의 지위를 믿고 군대 내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큰 문제였단다. 참령관을 맡은 우범선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도들이 너라고 부르는 하극상을 당해야 했다. 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던 우범선은 교관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를 이수정이 그의 성정상  어린 소장 민영익을 도와  쇄신했을 테고 민의 신임(?)이 두터워 졌을 것이다.

임오군란 때 교련대 별기군은 난군의 표적이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상대적으로 막강한 화력의 별기군은 큰 저항을 하지 않고 뿔뿔이 대피 했단다. 아군끼리의 희생을 피하려는 고육책이었던 듯 싶다. 이때 이수정은 바로 옆에 있었던 중궁전 수비대 홍계훈에게 달려 갔고 함께 민비를 대원군 부인 민씨가 내준 가마에 태워 상궁으로 변복해 피신 시켰던 것이다.
진작부터 그의 일본행을 부추켰다는 안종수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는 1859년 생으로 이수정 보다 한참 연하다. 그런데 그의 인사기록에 보면 별기군 참방을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또한 이수정이 별기군에 있었다는 증좌다.

안종수는 1881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최초 신사유람단 단장인 조병직을  수행해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시찰할 수 있었는데 그는 특히 새로운 농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이자 당시 서양농학을 수입하고 있던 정교학사(耕敎學舍) 창립자인 쓰다 센 을 만나  근대적  농학 지식을 습득했고  쓰다센의 「농업삼사」(農業三事)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농학서(新農學書)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 했다.

신사유람단 이후에도 그는 외교부 격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있었으나 1886년  김옥균(金玉均)의 잔당으로 성토당해 마도(馬島)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후 해배 돼  1895년 이후 항일 의병이 일어났을 때 나주부(羅州府) 참서관(參書官)으로 있다가 살해되었다.

아무튼 이수정은 1882년 9월 19일 , 박영효를 대표 정사로 김옥균과 민영익을 공동 부사로 하는 임오군란 사죄 사절단 일행과 함께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고베(神戶)를 거쳐 10일 후인 9월 29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틀 후  동경에 도착한 이수정이 “짐을 풀 사이도 없이” 제일 먼저 농학자 쯔다센 박사를 찾았다.
쯔다센은 안종수의 소개로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주었고 농정 지식에 관한 고견을 들려 줬다.
그때 이수정이 벽에 걸려 있는 한문 산상수훈 족자에 관심을 보이면서 개신교 얘기가 시작 된다. 이 부분은 후일 다시 다룬다. 쓰다 센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정독 했고 그날 특별한 경험, 현묘한 꿈을 꿨다고 알려져 있다.

꿈에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두 사람이 한 바구니 가득 책을 가지고 와 이수정이 ‘이것들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그들은 ‘이 책들은 당신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책들이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수정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그들은 ‘그것은 성경이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수정은 이 꿈이 예사의 꿈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자기에게 주신 일종의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이상한 꿈을 꾼 이후 이수정은 성경연구에 더욱 몰입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의 빛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이끌려갔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 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또 다른 기록에는 조선으로 돌아 갔다가 다시 일본 진출을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얘기기에 넘어가기로 한다.
이수정은 쓰다센 박사로부터 농업을 위시한 선진 기술을 전수 받는 중에 훌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 인품의 기원이 기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얼마 뒤  쓰다센 박사는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亨) 목사등 일본 기독교 주요 인사들에게  이수정에게 소개했고 이수정은 그해 188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과 언론으로부터 “매우 멋진 의상에 대단히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통했던 이수정은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면서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이같은 기독사상의 빠른 흡수에는 천주교, 천주학이라는 저변이 있었다.  .

아무튼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 간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試取)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비록 일본에서 9개월 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루미스의 보고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성서공회  본부에 봰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scholarship)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 친구는 ‘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순교 당했답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 ‘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특기 할 만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루미스의 전언에도이수정의 친척과 친지가 천주교인으로 희생됐다고 했듯이 그가 천주교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진작에도 충분히 짐직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가 조선의 천주교 전래 역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수정을 연구하는 소장 학자 가운데 필자가 보기에는 군계일학인  한국 총신대의 박용규 교수가 발굴해 낸 사실인데 박교수에 따르면 이 수정은 1883년 동경에서 천주교의 조선 전래 과정을 그린 ‘천주교입조선사실'(天主敎入朝鮮事實)이라는 저작을 남겼다는 것이다. 일종의 천주교소사로 “자신이 보고 경험한 바를 기억에 의존하여 기술한 책치고는 매우 섬세하고 논리적이고 심지어 역사 서술 방법에 있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성 자체가 훌륭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방으로 이 저작(논문 혹은 기고문)을 찾아 봤지만 이 전언 말고 자세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이수정은  자신의 친구 손붕구(孫鵬九)의 뒤를 이어 명치 1883년 8월부터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수로 재직했으며 그 이듬해인 84년 여름에 출간한 한국어 교재,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의 뛰어난 구성과 내용전개에서도 그의 실력과 창의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지리, 민속, 제도, 법률, 정사, 도학, 문예, 물산, 기구 등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대화식으로 조선을 소개한 책이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은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신자들 모두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대 부흥 운동이 일어 나던 해였다.   그와 같은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1883년 5월 8일부터 한국 기독교계에도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 3회 전국기독교도(全國基督敎徒) 대친목회(大親睦會)가 동경에서 열렸다. 일종의 대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무교회 파로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는 당시 일본 최고의 기독 지성인이었다.

<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참석자 중에는 한 사람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는 이 은둔국(隱遁國)의 국민을 대표하는 명문(名門)의 사람으로 일주일 전에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 의복을 항상 착용하는 기품이이 당당(堂堂)한 者로서 우리 중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 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五旬節)과 같이 만들어주었다. 대 친목회(大親睦會)는 부흥을 완전한 펜타코스트(Pentecost)로 화(化)하게 함에는 현실이 불같은 ‘혀’가 필요하지만(행 2:3)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의 상상력으로 보충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무엇인가 기적적이요 놀랄만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온 회중(會衆)이 다 같이 감득(感得)했다. 우리들 회중 일동은 다 태양이 머리 위에 비치고 있지 않은가 하기까지 신기하게 여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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