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뉴욕 시민 참여 센터 대표)
추석은 단지 명절이 아니다. 수천 년 농경 민족의 수확에 대한 감사와 조상을 기리는 전통에 신라 시대의 공동체 문화 가배가 결합하며 한민족 최대 명절로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가족 중심의 제사가 강화되며 그 형태는 축소된 경향이 있지만, 추석은 여전히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큰 연결고리다.
한민족의 조상 숭배는 유교 이전에 토속 신앙으로 존재했다. 기제사 외에도 설날, 한식, 단오,추석 등 4대 명절마다 조상에게 예를 갖추며 후대에게 자신들의 은덕을 기억해 달라는 염원을 담아왔다. 제사는 단순히 죽은 자를 위한 의례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공동체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자 '나'의 존재가 영속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능의 발현이다.
죽음은 개인의 육체적 생명을 끝내지만, 인류는 가장 소중한 존재를 추모함으로써 그 정체성(正體性), 즉 얼을 공동체 속에 계속 유지해왔다. 이 추모의 대상은 사랑하는 가족에서부터 민족의 영웅까지 확장된다. 한평생을 살다 사라지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뚜렷한 업적과 의미를 남긴 존재는 후대의 기억 속에 남아 사회적 생명을 얻고 지속된다.
인류는, 공동체를 위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그들의 가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면화하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탄생과 죽음을 기리는 행사, 동상이나 석상 같은 조형물, 사당이나 추모 공원, 그리고 역사적 기록과 교육. 이 모든 것이 한 인물을 공동체와 함께 영생(永生)하게 하는 방법이다.
120년이 넘는 미주 한인 이민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기억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민의 개척자이자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의 족적을 미국 땅 곳곳에 남겼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인근의 10번(I-10)과 110번(I-110) 고속도로 분기점에 도산 안창호기념 인터체인지(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 표지판이 서 있고,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는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UC 리버사이드에는 김영옥 대령 연구소가 설립되어 있으며, 캘리포니아주 5번 연방 고속도로 일부 구간은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로 명명되었다. 필라델피아 인근에는 서재필 박사가 거주했던 필립 제이슨 기념관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의 이름이 미국의 도로와 건물, 학문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미주 한인 사회가 그들의 가치를 공동체의 얼로 삼았음을 상징한다.
현재 미주 한인 공동체는 침체를 겪고 있다. 친목 위주의 각종협회와 한인회가 동력을 잃어가면서 민족 공동체로서의 구심점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민족 공동체의 역할을 재건할 새로운 공간이다. 한글과 한국 문화 교육, 미국 생활에 필요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나아가 경조사까지 치를 수 있는 미주 한인 커뮤니티 센터가 한인 밀집 지역 곳곳에 건립되어야 한다.
이 커뮤니티 센터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미주 한인의 영속성을 담는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각 센터의 중심에는 미주한인들의 역사적 영웅들, 그리고 센터 건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들의 석상이나 동상이 함께 서 있는 생각을 해본다. 이민 1세대가 땀 흘려 모은 재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개인의 기억은 손주 세대를 넘기기 어렵고, 아무리 화려한 비석도 찾아오는 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어쩌면 재산을 미주 한인 공동체의 중심축인 커뮤니티 센터 건립에 기여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를 민족 공동체와 함께 영생하는 인물로 남는 나름 의미 있는 선택이 될수 있지 않을까? 공동체가 기억하는 우리의 얼은 곧 우리 각자가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동찬 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