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3.1 혁명과 기독교 그리고 천주교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서명자 명단을 보면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城) 순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그 대표자 들이다. 즉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을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 측은 천도교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반면 기독교계는 기독교의 기여와 역할을 중시한다. 그래서 양쪽의 주장과 입장을 절충해 천도교가 선도(先導)하고 기독교가 주도(主導)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민족 대표로 종교인들이 나서야 했고 피해도 종교 측이 많았던 것은 일제 강점하에서 종교 기관만이 그나마 합법적인 모임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천도교도 정교 분리의 원칙을 천명했었고. 기독교 역시 교인들의 정치운동,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했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방침이 역설적으로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주도했다는 점은 시위자 피검자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일제는 그해 3월에서 5월 까지 전역에서 1,542회의 시위에 2,051,448명이 참여했고 피살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890명이었다고 발표 했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통계를 축소 조작 했다고도 하는데 당시 일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체포 46,948명, 공소 19,054명이었고,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통계는 신빙성 있다. .
전국에 있는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에서 궐기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주요 독립운동이 벌어진 340개 지역 중에서 명백하게 기독교인이 주도한 곳은 78개 지역( 교회에서 시작했고, 목사, 청년회장이 주동이 된 지역) 이었고, 천도교와 연합하여 시위한 곳은 42개 지역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진작부터 이뤄졌던 기독교계의 발빠른 교단 조직화는 거사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로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회록에서 ‘대한국 독립노회’라고 표기된 데서 ‘독노회’라는 별칭이 사용되었다.) 조직하고,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는 등 교단을 조직화했다. 美감리회는 1908년에, 南감리회는 1918년에 각각 ‘延會’를 조직한 후 연회 산하에 지방회를 구축했다.
따라서 장로회는 총회→노회→시찰회→당회의 조직으로, 감리회는 연회→지방회→구역회로 연결되는 조직망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기독교계는 3.1운동에 주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3.1 만세운동의 준비 단계 뿐 아니라 2.1 무오 독립선언,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등에서 거사 준비단계와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회와 그 교회에서 훈련받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기독교회가 입은 피해는 파괴된 교회만도 전파 17개소를 비롯하여 59개소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에도 알려진 제암리교회에서는 비기독교인 포함 30여명이 불에 타 죽었다 평남 강서의 사천에서는 교회에서 출발한 시위대 가운데 교인 11명이 현장 발포로 사망했고, 원산교회에서는 일제 헌병대의 총격으로 무려 43명이 즉사하였으며, 20여 명의 중상자들이 나왔다. 정주의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를 비롯해 많은 기독 학교가 전소되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했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숫자를 당시의 조선의 인구와 대비해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욱 뚜렷해진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장로회와 감리회를 합친 기독교인은 22만 명 내외였다. (장로교: 교회수 3,471, 교인 수 160,919/ 미감리교: 교회 655, 교인 41,044/ 남감리교: 교회 238, 교인 10,740. 총 212,703명 총독부 학무국 집계) 전체 인구의 1.5% 내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천주교인은 대략 8만 2천명으로 집계 되고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1.5% 내외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실은 그 숫자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1.5 퍼센트가 여론 선도층, 민중 지도층 이었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가. 바로 1885년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이 땅에 전해진 이래 미국의 청년 선교사들이 전한 자유와 평등 사상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보다 먼저 학교와 병원을 건립했고 성경의 말씀과 함께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고 기독 청년들은 이흫 해면처럼 빨라 들였던 것이다.
그 백 년전 이벽 권일신 이승훈등 천주교 성조 들이 그랬듯이 1890년대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은 개신교의 정신이 이나라를 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구름처럼 몰려 들었던 것이다.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스크랜튼, 노블 등 청년 선교사들은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창호 김규식 여운형 등의 청년 지도자들을 길러 냈고 이들은 배재학당 이화학당 협성학교등 학교를 근간으로 독립협회며 만민 공동회를 결성해 근대 민주 사상을 이땅에 펼치기 위해 노력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이 실제적으로 3.1운동을 주도해 나갔다고 보면 된다.
국권이 상실된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은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는데, 이처럼 한말부터 기독교인들은 매국 원흉 제거 등에 앞장섰다.
이런 전통은 독립협회→상동파 및 황성기독교 청년회→신민회→105인사건→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민족운동의 흐름을 거쳐 3.1운동을 연결된다.
물론 1919년 당시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내재적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나 선언 현장에 불참했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또 일제가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공식적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던 것처럼 3.1 혁명 과정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협조적인 활약도 기독교 주도론에 힘을 싣고 있다. .
그러면 3.1 혁명 때 천주교는 무엇을 했을까.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연히 경성의 천주교 신학생들도 이에 참여, 가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경성교구를 책임지고 있던 프랑스 출신 뮈텔 주교는 성당과 신학교의 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의 참여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솟 뚜껑 보고 놀란다더나 바로 그 격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기에 묘사했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뮈텔 주교는 동족의 고통에 울면서 애타하는 신학생들을 무섭다고 묘사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신학생들은 실제 퇴학시켰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윤형중 마태오 신부, 방유룡 레오 신부, 구천우 요셉 신부등의 후일 회고에 따르면, 하나 같이 “만세운동 대열에 우리들도 끼고 싶었지만,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이 퇴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 개중 몇명이 뛰어나갔는데 그들은 경찰서 유치장서 학교의 퇴학 처분 소식 까지 들어야 했다.” 면서 이구 동성으로 “일생을 두고 미안한 일 이었다. “고 입을 모았다.
만세시위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던 신학교와 사제들의 조치는 다른 교구의 신부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대구 대목구의 초대 감목이었던 드망즈 주교의 일기다.
<조선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지만 신문들은 절대적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 대구 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이 흥분돼 있다. 그들은 그저께 저녁,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교장은 무척 화가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聖召)를 잃는 학생들도 나올 것이다.>
<9일 아침에 대성당(계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줄리앙 신부가 “학교 상황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다. 교장 샤르즈뵈프 신부의 온갖 권면도 소용이 없었고, 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내에서 행진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그의 권위가 무시된 것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단다. >
<교리 강의 때문에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신학교로 갔다. 나는 신부들을 포함해 전 신학생을 체육실에 집합하도록 지시하고, 그들을 앉히지 않고 서서 훈계를 듣게 했다. 나는 그들에게 “순명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는다. 신학생들과 상관 없는 정치적 소요 같은 행동이 일어난다면, 유 무죄를 불문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후 교리 강의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경찰이 와 있었다.>
이렇게 천주교는 교단 차원에서 3.1 혁명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일부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해 심문 과정에서 천주교도 라고 자백 했지만 이는 매우 소수에 그쳤다.
자라와 솟뚜껑을 언급 했듯이 이런 기저에는 지난 시기 너무도 혹독했던 탄압과 희생을 더는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프랑스인 일색이었던 당시 조선 천주교 지도부의 결심이 가장 큰 이유로 지목 된다. 지난 시기 서양 신부들의 희생 참수는 모두 프랑스 신부들의 몫이었다. 14명이 순교 했다.
당시 교계의 수장 뮈텔 주교의 개안적 성향과 완고함이 영향이 컸다. 뮈텔 주교는 프랑스에서 조선에 파견된 한국 천주교의 역대 대목구장과 교구장 중 재임 기간이 제일 길다.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얘기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1년 조선으로 파견 왔다가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 5년 후인 1890년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인 장 블랑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 대목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발을 디딘다.
그는 초기에는 조선 왕실에, 합방후에는 총독부에 철저히 협력적으로 대응했다. 이 덕에 천주교의 교세 확장이 이루어져 성심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 할 수 있었다. 독일 성 베네딕도회에 조선 진출을 요청하여, 1909년 베네딕도회 독일인 수도자들이 서울 백동에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게 했다.
한국어와 한문에 능했고 한국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뮈텔 본인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가 엄히 처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연구해 교황청에 보고함으로서 1925년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당시의 79위 순교자가 시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들 모두는 1984년에 시성됐다. 또한 본인 스스로 나름 진솔하고 자세한 일기를 써서 일제 치하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 본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남겼다.
이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 했지만 교리와 원칙마저 무시하고 행한 친일 행적은 우리의 고개를 가로 젓게 한다. 1926년 대주교로 승품하였고, 1933년 사망했다.
특히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토마스에 대한 그의 너무도 완고하고 완강한 태도는 당시의 천주교도 들은 물론 우리 대한인 모두를 당혹하게 한다.
뮈텔이 당시 쓰던 일기 1910년 2월 16일자.
< 오늘 저녁 5시 경에 여순 재판소 일본 검사로부터 사형수 안중근과 니콜라 빌렘 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에 면회를 허락해 주어 감사하지만 여순으로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 답하였다. 이에 사촌 안명근 야고보가 다시 찾아와 다시 부탁했지만 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
일기에는 “안명근 야고보가 아주 무례했다”고 쓰여 있다. 뮈텔이 고해성사를 거부한 것에는 일제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의 스승이자 직속 교구신부인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의 금지령을 어기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러자 뮈텔은 빌렘 신부가 귀국도 하기 전에 ‘정치적인 일에 관여했다’ 면서 2개월간 성사 집전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가톨릭에서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은 주교에게 있고, 신부는 주교로부터 일부 성사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다. 때문에 주교가 권한을 취소할 경우, 신부는 어떤 성사도 집전할 수 없다.
이에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의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의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성사 집전 금지령을 해제했다. 뮈텔 주교가 내렸던 금지령을 교황청이 직권으로 취소시킨 것이다. 교황청이 뮈텔 보다 탄력적이었던 것이다. 뮈텔 그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 1910년 3월 28일. 토마스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천주교인 이라면 가슴을 쓸어 내리며 통탄할 표현이다. 후일 군종 신부 카트라이트가 가장 격분 했던 일도 이 표현을 접했을 때였다. 군종인 그는 안중근 토마스가 독립군 중장의 신분으로 적국 원수를 저격한 일은 전쟁 중의 일로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