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사상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운동 3.1 혁명
3.1운동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모멘텀이 됐다는 점은 여러차례 언급했다. 왕정을 복고하자는 말은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 백성이 추구하고 원했던 것은 민주 공화정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서구 열강은 조선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식민 지배에 시달리고 있거나 그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약소 식민 지배 민족들은 귀감을 얻었다.
후일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미영 중소 연합국 수뇌들이 모여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회합을 가졌을 때 한국의 독립은 기정 사실이 돼 있었다. 같은 시기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일본에 병합 됐던 류구국(오키나와)은 거론 조차 되지 않았다.
민족의 염원을 절대 다수 국민이 목놓아 외쳤던 기미년 3.1 거사를 저들은 똑똑히 목도 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3.1 혁명에 천착해 있던 필자는 어제 신기한 경험을 했다.
권일신 성조와 의암 손병희 선생 그리고 남강 이승훈 선생, 그리고 박희도 선생이 한자리에 모여 3.1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설마 현실의 일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 터. 그랬다 꿈이었다. 매우 맑은 날 카페리 연락선을 타고 백령도라고 생각 되는 곳을 갔던 꿈이었다. 시점은 지금 인 것 같은데 서울서 미국에 다시 오기 전에 타고 타녔던 흰색 국산 중형차가 등장 했다. 인천 차이나 타운 이라고 생각 되는 곳에서 친구들과 하고 점심을 먹고 놀다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 가려는데 부두가 나왔고 카 페리를 타게 됐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과정 내내 흥겨웠고 가뿐 했다. 아무튼 신기하고 신비한 꿈 이었다. 차를 지정된 곳에 정차시키고 갑판으로 올랐다. 배는 무척이나 깨끗했고 파도는 약간 있었지만 날씨가 그렇게 쾌청 할 수 없었다.멀리 보이는 검푸른 섬들과 군네 군데 뭉게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백령도 라고 했는데 단연코 그곳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카 페리가 다니지 않는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그곳은 연옥의 최 상위 단계에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차마 천국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겸손으로 생각해줬으면 한다.
백령도 라고 했지만 깨끗한 전원주택, 이곳 미국의 최고급 주택형 콘도미니엄 단지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얼마전에 본 김혜자씨와 손석구씨가 나온 드라마의 영향 이었던 듯 싶다. 사람들은 많이 눈에 뜨이지 않았는데 간혹 멀리서 보이는 남녀 모습은 모두 표정이 밝았고 옷차림이 화사했다. 음식은 먹어야 하는지 식당도 있었고 편의점 같은 가게도 눈에 띄었다
동네를 산책 하고 있는데 저만큼 아이들 놀이터가 보이는 조선식 팔각 정자에 갓을 쓴 양반 한 사람과 검은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맨 풍채 좋은 중년 남자, 그리고 흰 한복 두루마기에 머리를 단정히 빗은 초로의 남성 그리고 푸른 양복을 입은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광경이 눈에 들어 왔다.
나는 대뜸 그들이 직암 권일신, 의암 손병희, 남강 이승훈 그리고 동광 박희도라고 알아 차렸다. 천당이 됐건 연옥의 상층부가 됐건 하는나라에 가는 사람들은 생전의 가장 건강하고 대표적인 모습으로 존재 하게 된다는데 네 사람의 모습이 그랬던 것이다.
네사람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것 같았다.
손병희가 직암에게 “어르신 께서 불러 주시고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셔서 이렇게 좋은 곳을 구경하게 됐다”는 진심 담긴 인삿사말을 건네는 것을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들었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사는 곳이 제각기 였던 모양이다. 박희도가 특히 주변이 생소 한지 연신 주변을 돌아 보고 있었다. 그분들은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직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암 자네는 어떻게 해서 동학, 천도교에 들게 되었는가?”
“모든 인간이 바로 한울이라는 평등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그런데 이제는 한울님, 천주님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었는가?”
” 예 그렇습니다.”
그럴법 했다. 천당 연옥은 하느님 나라이지 한울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들었다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가르침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 아이와 노인과 여성, 그리고 하층민들을 모두 동등한 한울님으로 대접하는 당시 조선 사회 로서는 혁신적 사상이었다. 부당한 수탈에 저항하는 사상이 되고, 대외적으로는 남녀노소와 신분으로 갈기갈기 분열돼 있던 조선인 모두의 힘을 합해 외세와 맞설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다. 인간은 정녕 한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은 내세를 정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 자네들이 주동한 그 만세 운동이 이 민족 역사에 큰 물줄기를 만들었다는 것 알고 있는가?”
” 이곳에 와서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알게 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파급력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 이 땅의 민중들, 백성들이 나서 줬기 때문입니다.”
“다 하느님의 안배라고 생각 하고 있다네, ”
” 직암 어르신 같은 선배 선열들께서 희생 하셨기 때문 입니다. 천주교의 희생이 없었으면 개신교가 이땅에 그리 쉽게 전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렇게들 생각 하시는가?”
“저희 동학도 그렇게 생각 합니다. 우금치 전투에서도 많은 동도들이 절두산과 새남터를 얘기 했더랬습니다. ”
“그래 남강은 어떻게 31거사에 참여 하게 되어 개신교가 큰 활약을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을 꼬?”
“어르신 말씀대로 주님의 뜻이었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큰일 하셨네.”
“여기 박군이 많은 일을 했습니다.”
“알고 있다네”
“의암 자네는 이재에도 밝더군 그리고 요즘 말로 쇼맨쉽이 있어. 캐딜락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서 신도들을 모았다고 ?”
“그렇습니다. 입은 거지는 밥을 얻어 먹어도 벗은 거지는 굶습니다.”
“허허 재마았는 말이군 ”
“그 캐달락이야 말로 일진회 돈으로 산겁니다. ”
일진회는 돈 많은 보부상이 주축이된 대표적 친일 단체다.
“그 때문에 소문난 잔치라고 생각 했는지 신도들이 더 몰려 왔습니다. 시주도 많아졌구요”
“그랬군…”
” 천도교의 재력이 없었으면 인쇄소도 그렇고 각 교회며 학생들 동원도 그렇고 거사가 불가능 했을 겁니다.”
“남강 자네도 재력이 꽤 있었다고 들었는데 한때는 조선 제일 부호소리도 듣지 않았던가?”
“다 하나님 사업 하는데 썼지요, 거사 때는 무일푼이었습니다. 의암의 통큰 지원 없었으면 …”
” 학생들이며 교회 조직의 청년들을 동원하는데는 여기 박군의 공헌이 지대 했습니다.”
” 예, 그렇습니다”
이 손 두 사람이 다시 박희도를 거론했다.
” 박군 자네는 어떻게 해서 가독교 신자가 되었는가?”
“모두 해주 의창학교 노블 목사님 덕분입니다.”
” 학교에서 노보을 목사님 부부로 부터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분 부인도 선교사 였는가?”
“예”
“그래 미국 젊은 선교사들이 참으로 큰 일들을 했어요,”
“그 똑똑한 인재들이 온 것이야 말로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 하지요.”
“참 아펜젤러 라고 하는 목사님은 우리 옆집에 산다네.”
“그렇습니까? 훌륭한 분이 요절을 하셔서 너무도 슬퍼 했는데 역시 잘 돼셨군요.’
“어르신 , 조선 이름을 노보을이라고 하는 노블 목사님도 그곳에 계십니까?”
“노보을 목사는 잘 모르겠네”
“노보을 목사님은 아펜잴러 목사님의 고향 후배이고 신학교도 함께 나온, 정말 열성적인 전승자 이십니다.”
“내 돌아가면 한번 알아보고 다른 이를 통해서라도 박군 안부를 전해 줌세”
이 대화를 끝으로 화제는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로 넘어 갔다. 그곳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이 세상의 일이었다. 네 사람 은 오늘의 조국 현실에 대해 안타까와 하고 있었지만 종국에는 잘될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 역시 차근히 후일 다듬어 전하기로 한다. 직암은 세사람에게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 계속 기도 해 달라고 누누히 강조 했다. 그곳에서도 기도는 가장 중요한 일과 인 듯 싶었다. 어떤 형식으로 알아내는지는 몰라도 오늘의 우리 현실을 꿰고들 있었다.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15명은 천도교인, 16명은 기독교(개신교)인이었고, 2명은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과 일제의 불교 왜색화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백용성 스님이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천도교와 기독교 측에서는 민족 역량을 총결집하는 궐기인 만큼 유학을 신봉 하는 대한제국 시기의 명망가들을 참여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은 왕정복고가 빠져 있다는 이유로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인 만큼 종교의 이동異同을 불문하고 합동하여 추진하자.”를 기본 취지로 하여 먼저 천도교와 기독교가 공동 추진을 합의하고 이에 만해 스님과 용성 스님이 동참함으로써 불교계 지도자들 까지 포함된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되었고,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독립운동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그들에게는 종교적 믿음이 있었기에 강한 신념과 용기를 갖고 독립운동에 분연히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관순이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3.1운동에 헌신하며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천안 매봉교회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선교사의 알선으로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키운 믿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 매봉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심을 키운 그녀는 지역을 순회하던 샤프(Alise H. Sharp) 선교사를 통해 신앙생활의 전환점을 맞았다. 기독교가 자신 만을 위한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1916년 이화학당에 입학하도록 주선한 장본인이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기 유관순의 가치관이 집대성됐는데, 정동제일교회 손정도 목사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주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한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앙의 에너지를 이웃의 자유와 평등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배웠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은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조직된 이화학당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탑골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과 3월 5일 서울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 후 일제의 휴교령으로 귀향한 유관순은 고향 병천에서 매봉교회 교인들과 본격적인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병천 장터에 모여들며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병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붙잡으며 조국에 대한 숭고한 희생을 감당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기 전날 밤, 생가 뒤의 매봉산에 올라 이런 기도를 했단고 한다. .
<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 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
이처럼 31 혁명은 주도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역량도 역량이었지만 이를 실행했던 교단 조직, 그리고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신도 등 종교적 기반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국민의 10% 이상이 참여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종교 운동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종교가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주목 되는 것은 당시 민족 최대의 종교로 성장해 자리 매김하고 있었던 천도교야 그렇다 치다리도 이 땅에 뿌리 내린지 20년 밖에 안되는 기독교 개신교가 그처럼 가열차게 또 폭 넓게 운동에 참여 했다는 점이다. 물론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교리 상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천주교도 마찬 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한다.
천도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보국안민을 기치로 하고 세상을 바꾸는 후천개벽을 표방하는 종교다. 그리고 동학혁명을 하면서 일제에 처절하게 항거했던 전력이 있다. 그러니 천도교가 반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도교는 그때 신도 3백만을 자랑한다는 최대의 종교 였다. 그 이면에는 3대 교령 손병희의 공이 컸다. 그는 수완과 카리스마를 겸한 지도자였다.
천도교가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된것도 그의 수완 덕택이었다. 손병희는 1894년 우금치 전투에 북접의 참모장으로 참가 했으나 처절한 패배를 맛 볻 뒤 최시형 등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 등지로 피신해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붙잡혀서 처형당하면서 그는 3대 교주에 올랐으나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 망명 하게 된다.
망명 시절 국내의 동학 조직을 원격으로 지도 하는 한편 신분을 숨기고 충주 출신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면서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권동진 오세창 동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인연을 맺고 자기사람으로 만든다.
1904년 손병희는 측근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동학 조직을 정비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고 단발령 수용등 개화 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을 돕게 하는 현실적 보신책도 구사한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마침 천도교에 접근해 온 일진회와의 합병을 성사 시킨다. 대표적 친일 단체인 일진회는 조선 땅의 부를 움켜쥐고 있던 보부상들의 모임이 그 전신이다. 그때 일진회 수장이 유명한 친일파 송병준이다. 그는 교주가 부재중인 동학을 자신이 집어 삼켜 이미지를 일신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
위기를 돌파하고 몸집을 불린 손병희의 동학은 얼마 뒤 후 일진회 측이 을사조약을 지지하고 합방 청원 까지 하려 한다는 정황을 빌미로 분기탱천 한듯 정교 분리를 내세워 일진회 세력을 단호하게 처내고 조직을 분리한다. 저들의 재산은 절만 만 돌려 줬다. 그것도 저들은 감지 덕지 하게 만들면서…
1906년 동학은 그해 귀국한 손병희를 교령으로 하는 천도교로 정식 개칭했다. 그후 10여년간 손병희의 천도교는 일취월장 세를 불린다. 그는 입은 거지는 얻어 먹지만 벗은 거지는 굶는 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빈궁한 테, 유약한 테를 결코 보이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 미국산 캐딜락을 구입해 운전수를 고용해 몰고 다녔던 때가 이즈음이다. 그가 몰고 다니는 캐틸락이 경성 거리를 지날 때면 사람들이 몰려 나와 구경을 하느라 장사진을 이뤘고 그날 저녁 교단 본부에는 신도 가입 인원이 또 그만큼 장사진을 이뤘단다.
손병희 천도교 수하에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최남선 같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윤치호와 같은 구한말 원로들과도 절친하게 지냈고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김규식등 젊은 인재들도 그의 명륜동 저택의 단곳 식객이었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나선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의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섰다. (계속)



